다시 한 번기회가 주어진다면03
부제: 새로운 사람
며칠, 몇 달, 몇 년
봄, 여름, 가을, 겨울
몇 해가 바뀌었는지 모를 만큼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흘러갔는데,
너가 없는 이곳은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도 흘러간다.
"학원 갔다가 바로 집 들어와야 돼. 소개해줄 사람 있어."
"네.."
학원가는 길에 작은 반항심이 불타올랐다.
가뜩이나 이곳에 온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공부까지 하면서 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봐.. 여기서 다시 20살을 채우고 내 간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여기 옥상에서 떨어지면 존나게 아프겠지?"
"그럼."
"살 수도 없겠지..?"
"절대."
"그렇겠죠..? 아 깜짝이야, 어..?"
"표정 보니 날 아는 눈치인데? 저 알아요?"
"아, 아뇨. 누구신데요..?"
이석민이다.
빼박 이석민.
와 어쩜 어렸을 때랑 달라진 게 없냐.
"건물주인데요."
교복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쪽쪽 빨며 말하는데 누가 믿어줄까?
지나가는 개도 비웃겠다.
"뭔 개ㅅ.. 아.. 건물주시구나."
"여기서 죽으면 건물 값 떨어져서 안돼요. 죽을 거면 저쪽 가서 죽으세요."
"안 죽어!! 아니, 요!!!! 제가 왜 죽어요!!"
"왜요? 무서워졌어요?"
이석민이랑은 학교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말 한마디에 첫 만남도 바뀌는 구나.
이석민을 만나니 살 것만 같다. 조금은 재밌게 지낼 수 있겠네.
"그냥요."
"전 가볼게요. 집에 가서 낮잠 자야겠어요."
"가지 마! 아.. 가지 마요!"
"나한테 반했나보네요? 이렇게 붙잡는 거 보니."
"뭔 말도 안되는.."
"배고프다 뭐라도 먹을래요?"
"응!!!!"
"왜 반말해요?"
"그냥 반말하고 싶으니까요."
"반말하게 해주면 안 죽을 거예요?"
"안 죽는다고 이 미친놈아."
"욕하라고는 안 했는데.."
"자꾸 죽지 말라고 하니까.. 나 안 죽어, 못 죽어."
"그럼 됐네. 밥먹으러가요."
이때부터 이 새끼는 막무가내였어;;
**
[여주야 집에서 가방 내려놓자마자 집 앞 카페로 와
-엄마-]
학원도 안 가고 신나게 놀고 걱정 반, 여운이 남아있는 즐거움 반으로 집에 가던 중이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여주야! 여기!"
"어..?"
"내 아들이 딱 좋아하겠네! 안녕?"
"아, 아주머니.."
"응?"
"아! 안녕하세요!!"
"아니 글쎄 이런 우연이 다 있지 뭐니? 엄마 회사 거래처분이신데 얘기 들어보니까 내 동창이래..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잘 맞춰져있던 퍼즐이 바닥으로 떨어져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 같다.
민규가 없어도 운명은 운명인지 둘은 친구사이가 되셨고, 난 덕분에 죽을 맛이다.
"아들도 있는데 너랑 동갑이래. 올 때가 됐는데.."
"온다구요!?"
"응. 너가 외로워보여서 사돈이라도 맺을까 둘이 자리 만들어줬지~"
"말도 안 돼.."
카페 안을 가득 채우는 벨소리에 놀라 앞을 보니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고 계셨다.
모든 신경이 카페 안에 집중돼서 무슨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란다.
"뭐라고? 그거 다음에 하면 안 돼? 어쩔 수 없지.. 응, 알았어."
"왜?"
"바쁜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하네.. 어쩌지?"
"괜찮아요..! 전 학원 숙제가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제 적 학원숙제야?
예의 없어 보였으려나..?
집에 들어와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데 여전히 심장은 더 빨리 뛰면 뛰었지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한 심장운동 덕에 김민규의 생각이 더더욱 짙어졌다.
얼마나 민규 생각을 오래 한 건지 엄마가 돌아오셨고 신발을 벗으시며 말하셨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아들 잠깐 얼굴 비추고 갔는데.."
"방금!?"
"응.. 엄청 잘생겼던데? 딱 너 스타일이더라."
난 왜 한박자씩 느릴까..
엇박으로 살아가는 인생 어떡하냐..
**
자고 일어나니 또 한달이 지났다. 이제 익숙하지 뭐.
등굣길에 갑자기 뒤에서 날 치는 누군가에 놀라 펄쩍 뛰는데 내 반응이 웃긴지 해맑게도 웃는 이석민이다.
"아오.. 뭐하냐.."
"어? 너 넥타이는?"
"헐 맞다! 깜빡했네.."
"내거해. 난 모범생이라 벌점 별로 안 쌓였어."
"지랄하네."
교문에 가까워지기 전에 자기 넥타이를 빼 나에게 매준 이석민은 환하게도 웃어보였다.
그렇게 당당하게 교문을 지나가는 이석민은 학주한테 당연히 걸렸다.
"오늘은 넥타이를 안 매셨어? 너 벌점으로 효도하려고 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
"효도라뇨..! 학주쌤도 참!!"
"너 이번에 벌점 한 번 더 받으면 교내청소 시킬 거다."
"아니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죠? 그건 학교폭력 대상자가 하는 거 아니에요?"
"됐고, 얼른 들어가. 가서 아침 청소해야지."
"너무하셨네.. 전 우유당번이라 청소 없어요."
"그럼 얼른 우유 가지고 들어가야지."
"그럼요 당연하죠!"
도망가듯 우유창고를 가던 석민이는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석민이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벌점 내가 받았으니 우유배달은 너가. 난 이만 가본다!!"
미안하다고 생각한 내가 생각 없는 사람이다.
우유를 번쩍 들자 힘이 없는 나레기는 금방 내려놓게 되었다.
"이석민 죽여 버리던가 해야지.."
가다 쉬다 반복하다 어떤 개념 없는 아이들이 뛰어오다 나를 쳤고 무거운 걸 들고 있던 탓에 뒤로 넘어져 내 위에 떨어진 몇몇 개의 우유들을 그대로 받아야했다.
다행히 터지지는 않았지만 누워있으려니 쪽팔리기도 해서 기절한 척이라도 해야겠다.
눈을 감고 슬며시 떴을 때는
그토록 바라던 김민규가 서있었다.
**
"잠깐만!!"
몇 년 사이에 다리가 길어져버려 내가 따라잡기도 힘들어졌다.
빠르게 따라가 앞을 막는데 성공한 기쁨도 잠시 숨이 차서 말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할 말이 많아, 내가! 근데 잠깐만 숨 좀 쉬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고 있는 모습 보니 첫사랑이고, 뭐고 환상이 다 깨졌겠지?
민망함에 호통 치며 말해서 그런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빨게진 얼굴을 뒤로하고 숨을 고르느라 굽힌 허리를 펴서 김민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 김민규!!! 너 어디 살았어!? 왜 연락 한 번 없었어?! 이제 와서 나타나면 누가 반겨줄 것 같아!?"
"니 누군데"
굳은 표정과 낮은 목소리.
내가 낮은 목소리 별로라고 했을 때부터 기지배같이 한 톤씩 높여서 말해줬는데 이제 그런 모습조차 기대할 수 없어져버렸다.
"나, 나는.."
"왜 갑자기 아는 척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시하더니."
"뭐?"
"우리 그냥 평소처럼 지내자. 나도 이제 지친다."
날 지나쳐 가는 민규의 뒷모습을 보자니 착잡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멀리 바닥에 뒹굴고 있는 우유를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걸어갔다.
우유를 주워 담고 번쩍 드는데 누군가 가져갔다.
김민규인줄 알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석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넘어졌다며? 어디 까졌어? 아프지는 않고?"
"꺼져. 너 때문이야."
"미안해.."
"가자. 지각하겠다."
우리는 운명이 맞는 걸까?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너를 보니 운명인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자리에 앉자마자 엎드리는 김민규의 정수리를 질리게도 쳐다보았다.
얼굴 못 보니까 정수리라도 질리도록 쳐다보자.
또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어? 너 남자친구 왔다."
내 남자친구..? 내 앞에 앉은 애가 나에게 빅엿을 먹이려는지 이석민이 들어오는 순간 얘기했고 난 급정색을 했다.
"짠! 종류별로 가져왔어."
대일밴드 장사하는 건가? 모든 대일밴드를 털어온 건지 많기도 하다.
내 책상에 널브러져있는 대일밴드를 보다가 하나 집어 들어 팔꿈치에 붙이려는데 잘 안보여 포기하고 대일밴드를 내려놓았다.
"붙여줘?"
"그럼 고맙지."
"둘이 진짜 언제 사귀냐?"
전에는 안 엮였는데.
이렇게 엮이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어색해 표정이 억지미소밖에 지어지지 않는다.
"안 붙여줘도 돼! 종쳤으니까 얼른 가 봐. 벌점 하나 더 쌓이면 교내청소한다몈ㅋㅋㅋㅋ"
"내빼지마. 이렇게 엮이는 거 한두 번이냐?"
대일밴드를 뜯어 조심스럽게 호호 불어가며 내 팔꿈치에 붙여주는 석민이의 모습에
전에 무릎 까졌을 때 조심스럽게 붙여주던 민규가 떠올랐다.
모든 일은 민규로 연관되는 구나. 거의 김민규 마인드맵이네.
"고마워."
"흉지지 않게 약 꼭 발라줘."
"응.."
"약은 대일밴드 상자 안에 있어."
"약도 구해왔어?"
"수업 잘 듣고 졸지마라."
"응."
그렇게 나가버린 석민이를 보다가 대일밴드 상자를 열어보는데 하나의 쪽지가 들어있었다.
[다치지 마]
짧지만 강력한 쪽지네.
"존나 춥네."
분명 방금까지 엎드려있었는데 언제 일어난 건지 춥다며 오만상을 구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나까지 추워지는 느낌이다.
대체 무슨 생활을 보냈으면 저렇게 나쁘게 자란 걸까?
**
"짝피구 할 거니까 자기 교실 짝이랑 나란히 서서 줄맞춰."
하느님, 부처님 모든 신들께 감사드립니다.
짝피구가 시작됐고 열심히 막아줄 김민규를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악! 제발! 저 공 겁나 아프단 말이야!"
내가 남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내가 가는 길에 맞춰 그냥 따라올 뿐이다.
앞에서 존나 느긋하게 따라와서 차라리 내가 앞에 서서 김민규를 보호하는 게 빠를 것 같다.
"짝 좀 바꿔주세요."
와 김민규 섹도시발.
짝을 바꿔달라니.
"뭐? 야."
"왜 서로 사이 안 좋니?"
"네."
"그렇구나.."
마침 옆에 있던 한 짝이 선생님의 꼬드김으로 양보해줬고 난 안 친한 애와 짝피구를 같이 하게 됐다.
근데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저런 얼굴은 중학교 때 없었는데..
기억력이 좋아서 애들은 잘 기억하는 편인데 내 기억속에서 저런 빛나는 얼굴은 존재하질 않았다.
"유치하게 이걸 왜 하는 걸까?"
"그, 그러게.."
초라해지네.
김민규한테 까이고 나니 나랑 하기 싫은 건지 유치하다고 말하는 남자애의 말에 맴찢이 찾아왔다.
"아, 미안. 그냥 이런 거 안 좋아해서 그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냐.."
"진짜 미안해. 대신 이기자."
그거 좀 별로다..
말이 끝나마자마 시작된 게임에 그 아이는 미친 듯한 운동신경을 뽐냈다.
우연일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나한테만 공을 던지는 김민규 덕에 1년 동안 할 운동을 오늘 다 한 것 같다.
"힘들어?"
"괜찮아.."
"힘든 것 같네. 그냥 맞고 끝낼래?"
"아니..!"
"야 살짝 공 던져줘. 맞아서 아프다고 하면 두 배로 맞는다."
"응..? 응!"
말을 하자마자 던져지는 공에 난 살짝 공에 맞았고 수비 쪽으로 향하는 남자아이를 보다가 나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날 쳐다보는 김민규를 보니 왜 저러나 싶어 나도 쳐다보는데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대답대신 날 째려보는 김민규다.
"왜 저래.."
그렇게 인상 쓴 얼굴이 다른 애한테는 고데기 한 듯 쫙쫙 펴진다.
"꽉 잡아. 넘어지겠다."
날 보면서 말하는 김민규 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물 마시러 가자."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구 있는데?"
"아, 그래!
체육관 밖에 있는 급수대까지 온 남자이이와 난 물을 나란히 마시다 눈이 마주쳐 작게 웃었다.
물론 난 어색한 웃음이지만 그 아이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얘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아까 그 말 취소할게."
"응? 무슨 말?"
"짝피구 유치하다는 말."
"아.."
"야 최승철 너 선생님이 오래!"
"어, 금방 가."
이름이 최승철이구나..
김민규가 애정을 안주니까 안 친한 남자애가 애정을 주네..
**
"이거."
"뭐야?"
"춥다며. 친구한테 빌려왔어."
"필요 없어."
"싸매고 있어. 내가 불편해서 그래."
"니가 뭐가 불편한데? 니 앞가림이나 잘해."
".. 기껏 해서 구해왔는데 예의상이라도 고맙다는 말 못 해줘?"
"너가 어른한테 약해 우리 엄마가 한 말 때문에 억지로 나한테 잘해주나본데. 안 그래도 된다고."
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셨었나? 언제부터 꼬인 건지는 몰라도 단단히 꼬였다.
내가 현재로 돌아가는 것보단 이곳에서 적응하며 사는 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집 가서 꼭 부모님 사인 받아오세요."
가정통신문을 받고 김민규 눈치를 보는데 아무렇지 않게 뒤로 넘기는 김민규를 보자니 진짜 날 기억 못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쉽게 기억을 잃을 애가 아닌데.. 나 없는 동안 교통사고라도 나서 기억이라도 잃은 걸까?
"..저기 민규야."
"나한테 관심 좀 꺼주면 안 되냐?"
이제 관심 달라고 구걸을 해도 안준다.
**
"앞에서 발표해보자."
발표는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내가 한 걸 발표한다는 것도 힘든데 앞으로 나와서 발표를 하라니 죽을 맛이다.
"편하게 자기 생각 발표하는 시간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해 봐."
앞으로 나와 교탁 앞에 서니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자 애들이 떠들기 시작했고, 떠들지 말라며 한 소리 하려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하자."
그렇게 나의 발표가 시작됐다.
쓸데없이 떨리네.
"저, 저는.."
"잘하자. 더 크게."
마치 부모님 참관 수업을 할 때 자기애가 자신감 없이 작게 말하는 것을 본 부모가 힘을 주듯 승철이는 앞에서 엄마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찾은 난 또박또박 발표를 했다.
"여주 뒷사람 나와서 발표해보자."
자리에 앉아 다음 발표하는 아이를 집중하다 승철이를 보았다.
방금 날 보고 있었는데 다른 애가 발표할 차례가 되니 엎드려있다. 나에게 관심 써주는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가 고개를 젓고 입 꼬리를 애써 내렸다.
과거로 와서 너 아닌 다른 남자한테 기대게 되잖아.
엉엉어엉어ㅠㅠㅠㅠㅠㅠ밍구야ㅠㅠㅠㅠㅠㅠ
왜 이렇게 철벽치니ㅠㅠㅠㅠㅠㅠㅠㅠ 드릴이 필수품이 되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과연 어떻게 될지.. 막막하네여ㅠㅠㅠㅠㅠ
원우가 가고 석민이와 승철이의 등장이네요!!
승철이는 평소 이미지인 다정 말고 강렬한 이미지를 잡아봤어요!
이미지 변신이 최고죠ㅠㅠㅠㅠ
이쯤에서 빠지면 섭할
<다음편 예고(민규시점)>
"어? 승철아 왔어?"
친구랑 게임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ㅇ여주가 지나갔다.
존나 거슬리게 승철아, 승철아 거리네.
다음편에서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