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엉터리 언약식!
22
***
"나 떨려서 못 나가겠어."
마을의 작은 정원을 개조해 만든 파티장이었다. 나는 하객들에게 향해 가기 전, 사람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얇은 천을 살짝 열어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수였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의 날을 축복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더 벅차오는 떨림에 그의 팔뚝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나 떨려서 못 나가겠다고. 그러자 그는 제 팔을 부여잡은 내 두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제 손과 단단히 마주 잡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답했다.
"행복해질 시간이야."
"...아는데 그래도 떨려."
"나도."
"...넘어지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
"나도 같이 넘어져야지."
"...치."
"가자."
"..."
"되도록 넘어지지 말고."
호석이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각자 몸을 돌려 뒤에서부터 걸어오는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반응으로 우리를 응원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장난스레 우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이슨은 제 눈을 가리며 눈이 부셔 못 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덕분에 풀린 긴장이었다.
하지만 하객들에 정신이 팔린 탓일까. 식 전부터 조금 컸던 흰 색 단화가 벗겨지고 말았다. 맨 발 아래로 잔디가 닿았다. 순간 멈칫한 나를 따라 멈춘 그가 내 발을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자 동시에 하객들도 나의 발을 보고는 웃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신부의 신발이 벗겨지는 일이 흔한 건 아니니까. 나는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못 살겠다는 듯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부딪히고는 내 앞에 제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제 신발을 벗어 내 발에 신겨주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제 신발을 내게 신기고는 내 신발을 가지런히 들어 내 손을 잡지 않는 반대편 손에 들었다.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들의 신발을 벗어 의자 밑에 두기 시작했다. 내 무안을 덜어주기 위한 행도이었다. 뒤이어 마을 아이들조차 꺄르르 웃으며 작은 신발을 벗었다. 신부만 신발을 신은 언약식이라니.
**
"어쩌다 보니 신부만 신발을 신게 됐네요."
단상 위에서 꽤 능숙해진 스페인어로 말을 늘어놓는 그였다. 알게 모르게 열심히 공부하더니, 제법이었다. 호석이의 짖궃은 말에 장난스럽게 그를 옆으로 밀었다. 하객들이 그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그녀를 위해 이렇게 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위해 이렇게 살겠다 말한 그는 제 맨발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 어떤 말로 꾸며진 문장도 아니었지만, 모든 걸 담고 있는 문장이었다. 그는 제 말을 끝으로 내게 마이크를 넘겼다.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큼.
"원래 결혼식에는 신부가 제일 아름답다는데, 다들 신발을 벗어주셔서 신발을 신은 제가 제일 아름다워졌네요. 고마워요."
사람들 사이에서 옅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열심히 살게요. 자기 신발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남자를 만났으니까"
"..."
"다시 한 번, 엉터리인 언약식에 와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 내 말을 끝으로 하객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하객들은 박수를 치며 우리를 축복해주었다. 동시에 사람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나왔다. 동네 아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 싶어 미간을 찌푸려 자세히 살폈다. 이윽고 아이들의 존재를 알아챈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지금껏 구조활동을 하며 인연이 닿은 아이들이었다. 몰라 보게 성장한 아이들이었지만, 그 눈빛과 미소는 여전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잔잔한 울림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호석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역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동시에 내게 '앞에 봐.' 하며. 그의 말에 따라 앞을 바라보자, 아이들이 준비한 각자의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꽃다발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아이들의 꽃다발을 차례대로 받아들었다. 한 명씩 품에 안으며. 아이들은 그때마다 내게 자신들의 말을 속삭였다.
축하해요. 마이 앤젤.
언니 덕분에 맨발로 꽃다발 건네주는 경험도 하네요. 고마워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쭉, 내 삶의 모토였어요. 누나는. 꼭 행복해야 해요.
살려줘서 고마워요.
좋은 사람 만날 줄 알았어요. 온 마음 다해서 축하해요. 정말로.
언니를 알게 된 날부터 내 소원과 기도에는 언니가 늘 빠지지 않았던거 모르죠? 별똥별이 내 소원 들어줬나봐요. 행복하게 살아요. 언니.
호석이는 아이들이 내게 잔뜩 건네준 꽃다발을 대신 들어주었다. 어느새 아이들 때문에 눈물로 범벅이 된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가 언약식이랑 결혼식이 처음이라 그런데, 원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고 그러나요?"
마이크 너머로 들여오는 호석이의 물음에 고개를 들자, 나보다 더욱 눈물을 쏟아낸 것 같은 하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진 그들은 제 눈가를 닦아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이상한 언약식이었다. 우리의 언약식은.
**
"서류들은 한국에서 남준이가 도와줬어."
과거 변호사 일을 했던 남준씨가 법적처리와 우리의 가족 서류 및 혼인 자료를 마쳐주었다.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이것저것 문서 가져가더니. 별 문제 없이 해결 됐나보네. 나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하며. 호석이는 여전히 자신과 내가 같은 서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종이만을 바라봤다. 집 옥상에서 호석이와 함께 바라보는 밤하늘은 더욱 가까웠다.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옆에 있는 그는 당장 신기루처럼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나는 호석이가 보고 있던 서류를 접어 옆에 두고는, 그의 어깨에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묻었다.
"나랑도 놀아줘. 종이 그만 보고."
"애교야?"
"너가 애교라고 느끼면 애교지. 뭐."
내 말에 가볍게 웃은 그가 내 양볼을 조심스럽게 감싸, 저와 얼굴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여러 번 짧게 맞췄다. 온 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아까 어떤 남자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와 진득하게 눈을 맞추던 그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마도 아이들 중 한 명인 '존'을 말하는 듯 싶었다.
"왜? 뭐라고 했는데?"
"자기는 너 처음 봤을 때 천사인 줄 알았대."
"으으. 그게 뭐야!"
"...그치? 오글거리ㅈ"
"완전 로맨틱해. 존!"
평소 무뚝뚝한 성격의 존이 그런 말을 했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호석이는 존의 말이 느끼하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그치? 오글거리지?' 하며 제 말에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오글거리기는 무슨! 완전 로맨틱 하잖아. 나는 그의 말의 꼬리를 자르며 존의 로맨틱함을 칭찬했다. 그러자 그는 짐짓 제 인상을 구기며 제 옆에 앉아 있던 나를 자신의 무릎 위로 앉혀, 저와 마주보게 만들었다. 서로의 콧잔등이 스쳤다.
"로맨틱해?"
"응. 엄청!"
"...나 질투 많아. 저번에 봤지?"
나는 그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살짝 물고는, '어련하겠어.' 하고 답했다. 그러다가 그가 존에게 답한 내용이 궁금해져 물었다. 너는 뭐라고 했는데? 그러자 그는 제 어깨를 으쓱이며, '기억 안 나.' 하고는 내 목선을 제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나 역시 그의 장난에 맞춰, 그의 귓볼을 강하지 않게 물었다. 유독 귀에 민감한 그였기에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그는 내 어깨를 살짝 잡아 밀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귀는 안 돼요.' 하면서. 나는 그의 말에 더욱 장난을 치고 싶어져, 귀 언저리를 약하게 혀로 간질였다. 그는 그런 나에 결국은 내 목 근처에 제 얼굴을 묻고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번 장난은 나의 승리인 듯 싶었다. 나는 그를 꽉 끌어안으며, 그의 단정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그러자 그 상태로 나를 가볍게 안아 든 그가,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향했다.
"어디가?"
"들어가야지. 이제."
"왜에. 밤하늘 짱 예쁜데?"
"더 예쁜 거 보여줄게."
"...잠깐만."
"어어. 움직이지마. 고개 내 어깨에 묻고 있으세요. 앞에 계단 안 보여."
더 예쁜 걸 보여주겠다는 그의 답에, 안겨 있던 자세를 무너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는 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조심스레 제 어깨 쪽으로 밀고는 다시 나를 고쳐 안는다. 계단이 안 보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여서.
**
[호석 시점]
아이들이 한 명씩 그녀의 품에 안기고, 나는 한 발자국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봤다. 나한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놀랍도록 공평하게 따뜻한 여자였구나. 내 여자가. 잠시 뒤, 그녀와 인사를 마친 아이 중 한 남자 아이가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나는 내 허리께까지 오는 아이의 머리 위에 투박하게 손을 올려두고는 물었다. 뭐. 하고. 그러자 아이는 내게 '저는 누나 처음 봤을 때, 천사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을 건네온다. 제법 당돌한 태도였다. 마치 제 것을 뺏기기라도 한 듯, 날이 선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언약식 날까지도 좀처럼 줄지 않는 경쟁자에 아이의 머리를 헝클이며, 아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아이의 귀를 가리고는 속삭였다.
"내가 봤는데."
"...네."
"천사 맞아. 임마."
"...저 그렇게 안 어리거든요."
"나도 안 어려. 근데."
"..."
"진짜 천사야."
"...뭐래."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다고 생각해?"
아이는 내가 가리킨 손 끝에 머무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어쭈. 누가 그렇게 오래 보래."
"...보는 것도 안 돼요?"
"안 돼. 내꺼야."
"...치."
"너도 천사 만나고 싶으면, 이 형처럼 커라."
"...네."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오늘은 두 사람의 언약식 겸 결혼식 장면이 그려졌어요 :) 사랑스럽고 다정한 다정커플만의 결혼식이었죠? ㅎㅎ (혼자만의 생각) 암호닉은 더 이상 받지 않을게요 :) 밑에 분들 중에서 누락되신 분들은 꼭! 말씀 해주세요. 이제 정말 다정한 핀잔의 마지막 화만 남겨두고 있네요! 수험생 독자님들과 현생이 바쁜 독자님들은 제 작품 천천히 읽어주셔도 돼요! 저는 제 자리에서 부지런히 이야기하면서 응원하고 있을게요!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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