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경찰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새까만 상복을 차려입은 소녀의 어머니가 양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훔쳐내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들이켰다. 그러자 그 앞에 일제히 서있던 경찰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허둥지둥 휴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문객들을 위해 마련된 식탁 위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찾은 이성열 순경은 서너 번 정도 왼손에 돌돌돌 감더니 휴지를 끊고 소녀의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고맙다면서 감사히 받아든 그녀는 오른눈에 한 번, 왼눈에 한 번 차례대로 휴지를 찍더니 양쪽 뺨도 쓱쓱 닦고 마지막으로 코를 흥, 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성열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휴지를 한 번 더 돌돌 감아서 뜯은 뒤 그녀에게 다시 건넸다. 얼마나 마음이 저밀까…. 아직 결혼의 문턱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총각이라곤 하지만, 물웅덩이에 돌멩이를 던진 듯 어머니의 그 슬픔이 자신에게까지 고스란히 다가와 마음속 깊게 애잔히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에게 건네받은 휴지에다가 코를 시원하게 풀더니 반으로 접고 접고 또 접어 손에 꼬옥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의 눈에는 그저 한낱 더러운 휴지로 밖에 비춰지지 않겠지만, 사실 알고 보면 어린 나이에 눈을 감게 된 딸에 대한 온갖 잡다한 감정이, 그녀의 손에 쥐여진 휴지에 모두 스며들어 있었다. 휴지를 쥐고 있는 그 연약한 손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호원 순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녀에게 따사로이 손을 내밀었다.
"어머님, 제가 버릴 테니 휴지 이리주세요."
그러자 화들짝 놀라더니 더러울 텐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은 정말 괜찮다고 그의 호의를 한사코 거부하는, 엄마라는 이름의 연약한 여인이었다.
"괜찮아요, 이리주세요."
'괜찮다'와 '아니다'로 엇갈린 채 계속되는 실랑이 끝에 소녀의 어머니는 굉장히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휴지들을 살포시 얹었다. 가볍게 주먹을 쥔 호원은 휴지통에 버리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구두를 신기 위해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마주오던 상대방과 그만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툭.
막상 부딪혀보니 자신은 그다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대방 쪽에서 '아야!'라고 짧게 내뱉으며 아픔을 표시했다. 아이고, 미안해서 이걸 어쩌나…. 어깨를 움켜잡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죽을죄를 지은 것 마냥 미안함을 느낀 그는 상체를 살짝 숙이고는 타인의 어깨를 요모조모 살피면서 물었다.
"부딪힌 곳은 괜찮으세요?"
그러자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괜찮아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상대방은 그쪽도 괜찮은 거냐며 오히려 되묻더니 그의 어깨를 이리저리 살폈다. 분명히 머리를 부딪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사람이 왜이리 실실 웃는 건가 싶은 호원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무척이나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목례를 꾸벅, 하더니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소녀의 어머니를 향해 총총총 짧은 보폭으로 차츰 멀어져가는 여자였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대체 무슨 상황이었던가 싶어 머릿속으로 잠시 곰곰이 따져보던 호원은 이내 그녀를 '낙천적인 사람'으로 판단하고는 휴지를 버리러 빈소 밖으로 나갔다.
*
"안녕하세요, 백아혼양 어머니 되시죠? 저는 이번 사건을 맡은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소속 송수윤 검사입니다."
건너편에 놓여있는 딸의 영정사진을 앉은 자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더니 명함을 건네고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당돌한 여검사의 행동에 모두들 하나같이 떡하니 벌어진 입을 쉽사리 다물 수 없었다. 영정사진에 머무르고 있던 시선을 떼고 엉겁결에 명함을 받아든 소녀의 어머니는 이 여검사와 악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갈팡질팡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저 여자가 미쳤나…! 이런 애매한 상황을 보다 못한 구경위가 피해자 어머니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강압적으로 끌고 나가려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리 없는 여검사는 발꿈치에 온 힘을 실어 그의 발등을 지그시, 아주 지그시 꾸욱 눌렀다. 끄…끄악…!
워낙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한 채 아픔에 겨운 흥을 깽깽이로 풀어내며 음소거로 실컷 울부짖는 구경위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엄청 고소하다는 표정을 얇실하게 짓는 여검사였다.
*
"……따라서 죄를 무겁게 다룰 듯합니다. 처벌 문제를 다루느라 정신없이 바쁘지만, 밑으로 통보하여 연락을 취하는 건 피해자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이 말을 직접 전해주려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그러자 소녀의 어머니는 남은 힘을 쥐어짜서 있는 힘껏 송검사의 양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출장을 제쳐둔 채 급하게 귀국한 그녀는 남편과 번갈아가면서 뜬눈으로 꼬박 삼일장을 치르느라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윤기가 없어 푸석푸석해지고 잔뜩 초췌해진 얼굴은 낡은 책의 종잇장처럼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너덜너덜해졌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녀는 맞은편에 있는 송검사의 손을 꼬옥 잡은 채 허리를 깊이 숙이는 걸로 감사하는 마음을 최대한 표현했다. 그러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송검사와 이러지 말라면서 피해자 어머니의 팔뚝을 부여잡고 한사코 말리는 구경위였다.
"어머님, 이러지 마세요. 저희는 범죄를 다루는 사람들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 말에 울컥하여 감정이 슬슬 북받쳐 오른 소녀의 어머니는 눈가가 빨개진 채 힘없이 송검사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빈소 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정적동안 갓난아기 시절부터 열아홉 숙녀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성장해 온 딸의 수많은 모습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주마등처럼 재빠르게 스쳐지나가자, 눈물이 글썽글썽 차오른 소녀의 어머니는 굵은 눈물방울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더니 이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경위 곁에 서있던 울림경찰서 형사들과 무한지구대 경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튀어나가 그녀의 양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울지마세요.' 또는 '정말 죄송합니다.' 등으로 각자 마음 한 켠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말들을 한 마디씩 하면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심스레 자리에 앉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경위는 입을 굳게 다물어 최대한 말을 아낀 채 주변 동료들이 그녀를 앉히는 걸 옆에서 묵묵히 거들고 있을 뿐이었다.
새삼 신기할 정도로 본인과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쏙 빼다 박은,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구슬픈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
오늘따라 밤공기가 유난히 차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알 수 없는 답답함에 휴지를 버리고 아예 바깥으로 나온 호원은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거닐다가 대학병원 바로 옆에 있는 하얀 건물의 의과대학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의과대학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목에 들어서자 서로 마주보고 있는 히포크라테스 동상과 나이팅게일 동상이 보였다. 그렇게 동상에 적혀있는 선언문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데 어둑어둑한 밤이라서 그런지 어째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지리겠네…."
양팔을 교차하여 팔뚝을 싹싹 문지른 그의 시선 끝에, 히포크라테스 동상 옆에 마련되어 있는 2인용 벤치가 보였다. 잘됐다 싶어 엉덩이를 깔고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원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동우는 어디쯤 오고 있으려나? 온다고는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늦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호원은 정장 단추를 모두 풀고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해제하고 배경화면에 나와 있는 모바일 메신저 아이콘을 누른 그는 채팅목록에서 동우를 찾아 그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동우야, 어디쯤 오고 있어?」
지웠다 썼다가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망설임 끝에 어렵사리 전송을 누른 호원은 화면을 끄더니 안주머니에 휴대폰을 쏙 넣었다. 덕분에 재킷 왼쪽이 무거워졌다. 사실 동우의 마음이 바뀌어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왠지 모르게 자신이 부담을 주거나 닦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더니 손을 넥타이에 가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너무 경솔했어….
동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후회하면서 넥타이를 잡아 아래로 살짝 내리고 좌우로 두어 번 흔드니, 목을 옥죄고 있는 것만 같던 검은 넥타이가 느슨해졌다. 이왕 넥타이를 푼 김에 셔츠 단추도 하나 풀고 나니 가슴을 짓누르던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때마침 쌀쌀하게 불어오는 밤공기에 실려 저 멀리 날아가는 것 같다.
"아…, 살 것 같다."
한참동안 그 기분을 만끽하다가 불현듯 다시 동우가 떠오른 호원은 쫙 벌리고 있던 다리를 한쪽으로 꼬았다. 범인이 잡혔다고 좀 전에 저녁 뉴스로 보도가 됐을 텐데도 하루 종일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도저히 이곳에 올 자신이 없나보다. 어떡하지?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메시지 보낼걸…. 의기소침해진 그는 두 손을 모아 엄지손톱끼리 일정한 박자로 부딪혀 틱, 틱, 소리가 나도록 하면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때였다. 왼편 가슴팍에서 진동을 느낀 건.
내심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호원은 부랴부랴 휴대폰을 꺼내어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동우야?"
[…….]
"장동우!!!"
[뭐래…. 나 성종인데.]
………….
쟤…쟤야말로 뭐래…. 그럴 리가 없어. 뿅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자 보란 듯이 화면에 떡하니 떠있는 그 이름 네 글자. '야이성종'…. 상대가 누구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하고 좌절감을 맛본 호원은 정말이지 땅이 푹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통화를 이어가기 위해 휴대폰을 귓가에 댔다.
"왜 전화했어."
[장동우가 누구길래 이 밤에 그리 애타게 찾으시나?]
"임마, 넌 몰라도 돼."
[꿀단지처럼 몰래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되시나봐요~]
뭐…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화들짝 놀란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와 반대로 전화 건너편에서는 무척이나 재밌는지 깔깔대며 웃어젖히는 성종이 특유의 예쁘장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이야, 농담~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 말에 놀란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리는 호원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놀랬는지 심장이 정신없이 팔딱팔딱팔딱팔딱거리며 경박하게 뛰고 있는 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그나저나 아까 뉴스로 봤어. 드디어 살인사건 범인들 잡았더라? 축하해.]
"내가 잡았나…. 다 구형ㅅ-"
[물론 그건 형사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흐흐흥…!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형사 분들께 잘 말씀드려줘. 한 건하셔서 축하한다고. 알았지?]
이 말을 귓구멍으로 고스란히 전해 듣는 호원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너 이 자식….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년에 학비 안 대줄거니까 그런 줄 알아."
그 말에 '에이, 우리 형이 왜 이러실까~?'라며 능청스레 말하는 성종이 때문에 소리 없이 슬쩍 웃고야 마는 호원이었다. 어휴…. 마냥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 같은데 곧 있으면 대학교 3학년이라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믿을 수가 없고, 그 시간 한 번 참 빠르다.
"하여튼 이놈의 등골브레이커…. 너 때문에 형 허리가 아주 휘겠다, 휘겠어. 개강하니까 집이 그리워 죽겠지?"
[응, 진심 죽을 것 같아…. 방학동안 집에만 있다가 기숙사 들어오니까 죽을 맛이야. 형이 나 좀 꺼내주라…!]
이놈이 뭐래…. 큰일 날 소리하고 앉아있네. 퉁명스레 대답하는 그의 말에 또 한 번 꺄르륵 웃어젖힌 성종이는 다 장난이라고 했다.
"이제 조금만 더 다니면 되니까 완전 좋은데? 나 사실 엄청 신나!!! 빨리 경찰되고 싶다…!"
이렇게 해맑게 말하는 성종이는 현재 경찰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어렸을 적 온 동네를 여기 들쑤시고 저기 휘젓고 다니던 말썽꾸러기 호원과는 다르게 유난스레 몸이 연약했던 그는 집안에서 노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어디가 아픈 건 딱히 아니었다.) 하루 종일 혼자서 놀다보니 당연히 사교성도 없었고, 하는 행동은 여성스러운 면이 없잖아 꽤 있었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남자아이였지만 로보트를 갖고 놀기보다는 인형을 갖고 노는 게 더 어울렸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지구용사 벡터맨을 보는 것보다 세일러문을 보고 있는 게 더 어울리는 그런 아이었다.
음…. 아마도 쌀쌀했던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집안에서 혼자 꽁냥꽁냥거리며 노는 걸 보다 못한 호원이 하루는 중앙놀이터로 그를 데리고 나가서 동네친구들과 억지로 어울리게 했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느라 쭈뼛쭈뼛 거리면서 제대로 놀지 못하던 성종이는 형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뺑뺑이란 것도 타고 정글짐에 거꾸로 매달려보고 철봉싸움도 하고 얼음땡도 하면서 점차 개구쟁이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놀면서 문득문득 느낀 건데, 희한하게도 무슨 놀이를 할 때마다 그 중심에는 호원이가 있었다. 얼음땡을 하다가 '누가 움직였네.'로 의견이 분분하게 일어나면 호원이가 나서서 조율하는 모습이 어린 성종이의 눈에는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우와…. 우리 형이 대장이다…. 연신 감탄을 하면서 말이다.
옷소매에 콧물을 닦아가며 온종일 정신없이 놀다가 들어간 그 날 저녁, 집안으로 들어선 어린 형제의 눈앞에는 상아색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밥주걱을 든 채 잔뜩 화난 표정으로 서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해온 그 때 마침 잔병치레가 많은 성종이가 '에취!'하고 재채기를 하자 노란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종이는 코를 찡긋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들이켰고, 이를 본 엄마에게 호원이는 그 자리에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실컷 두들겨 맞았다.
팡팡 두들겨 맞은 엉덩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우는 형을 달래준 뒤 재밌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 성종이는 꿈을 꾸었다. 낮에 놀이터에서 했던 놀이 중 가장 재밌었던 '경찰과 도둑'이라는, 아주 기분 좋은 꿈이었다.
그리고 지금, 스물두 살이 된 성종이는 하룻밤 꿈으로 꾸었던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경찰대에 입학했다.
[아참,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겨울방학에 형이 근무하는 파출소로 실습 나갈 거야!]
………….
끙….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누군가 뒤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뿅망치로 정수리를 가격한 것처럼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호원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집게손으로 콧대를 잡았다. 아…, 미치겠다.
"되도 않는 농담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진짠데!!!!!]
"야, 이성종. 시끄러."
한참을 동생과 투닥투닥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타박타박 천천히 걸어오는 구두소리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집중하는 호원이었다. 이 밤에 누가 여기를 올라오나? 어떤 사람이 튀어나올지 괜스레 궁금하여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의과대학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동우였다.
이를 게슴츠레 바라보고 있던 호원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커다래졌다. 그는 정장을 입고 멀리서 걸어오는 동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휴대폰에 대고 중얼거렸다.
"성종아, 형이 바빠서 그런데 내일 다시 전화할게!"
*
조문을 위해 아혼이의 빈소를 찾은 경찰들은 이야기를 나눌 것 없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저마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밥을 뜨면서 그릇과 수저가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나 국그릇을 싹싹 긁는 소리가 간혹 가다 들렸다.
그 틈에서 김경위도 육개장을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더니 입안에 후루룩 넣었다. 그러고 나서 몇 번 대충 씹고 꿀꺽 삼키는데 육개장 속에 있던 무가 생각보다 굉장히 뜨거워서 목구멍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여차저차 어떻게든 다 삼키 고나니 무가 타고 내려간 자리가 뜨끈뜨끈한 게 느껴졌다. 불을 끄는 소방관이 된 심정으로 손을 뻗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뒤 그렇게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부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녀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경찰분이신가요?"
"아, 네…."
귀에 익은 익숙한 목소리에, 입안에 있는 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뒤를 돌아보니 이호원 순경과 그 옆에 있는 장동우 경장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 피해자 부모 앞에 서있었다. 어…? 장동우다!!! 무한지구대 식구들이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동우가 조문을 위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삼일 만에 나타난 동우는 그동안 많이 앓았는지 부쩍 야윈 모습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어있었다. 대체 어디가 바뀌었는지 세세하게 집어낼 순 없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겉모습이 좀 바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다. 평소에는 눈썹을 가릴 정도로 내리고 다니던 앞머리를 위로 시원하게 올려서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뭔가 순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는데 앞머리를 올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이렇게 확 바뀌다니…. 장동우란 사람이 다시 보인다.
입구에서 조객록을 작성하고 들어온 동우는 소녀의 아버지와 나눈 짧은 대화를 마친 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영정사진을 향해 혼자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얼핏 본 사진 속 소녀는 교복을 입은 채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이 많이 깨진 걸로 보아 학생증 사진임이 분명했다. 일찍 눈을 감을 거라고 그 누가 알았을까…. 변변치 않은 영정사진을 보고 돌덩이처럼 마음이 무거워진 동우는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분향을 하기 위해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치면서 향을 하나 꺼내고 불을 붙였다. 얼마 되지 않아 가벼운 손바람으로 향불을 끄자, 실처럼 가느다란 연기가 공중에 아스라이 퍼졌다.
그는 향을 두 손으로 향로에 꽂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정사진 속 소녀에게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할 속앓이를 하면서 마음속에 하나 둘씩 담아둔 말들이 많았는지 남들보다 묵념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친 소녀의 사진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용서해주면서 '너무 죄책감 갖지 말아요.'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이와 동시에 마음을 꾸욱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쩍, 하고 갈라지더니 조각조각 나서 돌가루가 되어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동우는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널 잊지 않을게.
*
그렇게 동우는 모두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시간은 신비로운 요술을 부리듯이, 바람이 부쩍 차가워진 12월이라는 그 자리에 무한지구대 식구들을 휘리릭 옮겨다 놨다. 울림경찰서와 긴밀히 협조하여 한동안 전국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살인사건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들은 평화로웠던 일상을 다시 만끽하게 되었다. 수사종료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슬픔을 애써 뒤로 한 채 말이다.
기억에, 그리고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진 우울한 생채기를 떨쳐내기 위해 모두들 안간힘을 쓰는 것 마냥 업무에 집중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12월이 되어버렸다. 시간이란 것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과도 같았다.
전에는 '일상'이라는 것이 이리도 소중한지 몰랐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큰 사건을 하나 치르고나니, 누군가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수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삶일지언정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복될 수 없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한지구대에 한 가지 놀라운 변화가 생겼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아혼이처럼 제 2의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간단히 조사서를 작성한 뒤에 소녀를 귀가조치 시켰던 사소한 일이 이틀 후 그리 엄청나게 커지리라곤 대체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소녀의 발인식을 지켜보며 우리는 마음속으로 손을 흔들어 '안녕'이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잘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녀를 잊기 위해 애쓸 것이지만, 전체적인 우리들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동그랗게 이루어져 있는 '인생'이라는 케이크에서 '백아혼'이라는 한 조각을 접시에 덜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소녀는 우리들에게 작지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는 햇병아리 같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만들어줬다.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닌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열아홉 소녀가 저 하늘 어딘가에 자리한 별이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씨앗이 되었다는 점이다. 틈틈이 물을 주다보면, 이 씨앗은 언젠가 활짝 만개할 것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추워진 날씨 때문에 두툼한 동복을 차려입은 동우가, 코코아를 탄 따끈따끈한 종이컵을 자신의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다가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코코아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따뜻한 연기를 공중에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는 2009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재구성 및 창작 되었으므로 사실과 혼동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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