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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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겠습니다~"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화음으로 들려오는 가족들의 대답을 뒤로한 채 현관문을 소리 나게 닫고 아파트 복도로 어기적어기적 나온 성열이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였다. 흐…흐아으어아암~~
잔뜩 늘어진 하품을 하며 바깥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 들어왔는지 재빨리 입을 닫고는 복도 난간에 찰싹 달라붙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쭉 빼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우~와!', '오호~' 등 알고 있는 감탄사란 모든 감탄사를 생각나는 대로 마구 뱉어냈다. 이른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오물조물 움직이는 그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민중의 지팡이 일과로 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던지고는 다음날 있을 출근을 기약하며 그가 스르륵 잠든 사이에,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아마도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와 함께 인간 세상을 구경하다가, 밋밋한 지상의 풍경에 꽤나 지루하셨는지 하얀 물감을 거침없이 쭉쭉 짜놓은 것 같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라는 호기심이 들 정도로 하룻밤 사이에 눈이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주차된 승용차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건너편에 위치한 상가 옥상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있는 게 보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사는 동네에 백색의 고요함이 살포시 내려앉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걸 보니 출근은 뒷전이고 마냥 기분이 좋다. '눈'이라는 건 삶에 찌든 어른들의 마음까지 잠시나마 설렘으로 들었다 놨다하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인 것 같다.
이따가 저녁에 퇴근하면 대열이랑 대열이 동네 친구들 불러내서 눈싸움이나 한 판 뜰까? 혹시…, 나이 많다고 다구리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럼 나도 내 친구들 불러 모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두툼한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저게 '스테이크'였으면 싶다. 하얀 접시 위에 놓여있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칼로 한 조각 싹싹싹 썰어서 입에 쏙 넣는 생각을 하니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간다. 쩝…. 그러고 보니 고기의 육질을 맛본지도 참 오래됐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찬 공기에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만 같은 코를 찡긋거리면서 빨간색 야상에 달려있는 큼지막한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반쯤 돌리고 새초롬하게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아니, 엄마는 착실하게 월급 관리해준다고 하더니 대체 그 돈으로 뭐하는 거야? 이럴 때 안 쓰고?
"나는 고기가 고프단 말이다!!!"
매달 일정한 수입으로 꼬박꼬박 돈을 벌어 와도 입에 고기칠을 할 수 없다는 서러움이 순간적으로 최고치까지 치밀어 오르자, 씩씩하게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불만을 표시할 심산으로 슬쩍 걷어찼다. 퉁!!
헉…. 근데 생각보다 너무 세게 찼다…!
[야이!!!!!! 고기 먹고 싶다면서 현관문을 걷어차고 난리야!!!!!!!!! 미쳤어?????]
언성을 높이며 신경질적으로 바락바락 소리치는 대열이의 목소리가 현관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대열아, 그냥 내버려둬. 형이 원래 그러잖니….'라는 엄마의 우려 깊은 목소리도 덤으로 들려왔다. 어쩌다보니 졸지에 '원래 그러는 애'가 되어버렸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땡깡부리면서 현관문을 발로 차는, 조금 모자란 그런 아이…. 지금 눈에서 땀이 흐르는 것만 같은 건 기분 탓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저 정도의 흥분상태라면 동생이 식탁에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쫓아 나올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을 끝내기가 무섭게 젓가락을 식탁 위로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오메…. 저놈한테 붙잡히면 출근도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겠다!
"시…신발끈 묶다가 넘어져서 그랬어!!!"
마치 엄마와 한바탕 싸운 후에 기분이 내키는 대로 방문을 쾅 닫았다가, 행여나 쫓아올까봐 눈치를 슬쩍 보면서 '에이씨, 바람 때문에 문이 세게 닫겼네….'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치졸한 변명을 내뱉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부지런히 뜀박질을 시작하는 성열이었다. 뛰는 도중에 뒤를 힐끔힐끔 돌아본 건, 저승사자와 같은 동생이 현관문을 열고 튀어나올까봐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절!대!
*
눈 덮인 건물, 눈 덮인 가게 간판 등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여유롭게 걷는 호원의 시선 끝에 헐거벗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여러 갈래로 어지러이 나뉘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은 밤새도록 눈이 내린 덕분인지 제법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북쪽 얼굴이라는 브랜드의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만한 자연산 패딩이 따로 없었다. 따뜻해 보이네….
때마침 불어온 찬바람에 호원은 고개를 숙여, 한껏 칭칭 두른 짙은 보라색 목도리에다가 코를 파묻었다. 이러고 다니면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어느 정도 얼굴을 비껴갈 뿐만 아니라 마스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거추장한 걸 싫어하는 그에게는 꽤나 편리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검은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상태로 땅바닥을 바라보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재촉했다.
하지만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인해 인도가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길바닥이 생각보다 많이 미끄러워서 빙판이 없는 곳만 쏙쏙 골라 다녀야 하니 참으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보니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마음이 불안해진 호원은 코트 속에 넣었던 손을 슬쩍 빼고는 종종걸음으로 최대한 조심히 걷기 시작했다.
어휴…. 대체 이래가지고는 제 시간에 무사히 출근도장을 찍을 수 있으려나 싶다. 오늘은 김경위에게 꼼짝없이 한 소리 듣게 생겼는 걸…. 근무지에 도착은 커녕 아직 출발도 못했는데 스트레스가 벌써부터 스멀스멀 엄습해온다. 혼나기는 싫고 출근길은 험난해서 한숨을 푹 쉬니 입에서 한가득 나온 하얀 입김이 공중에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의 입김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는 2인 1조로 팀을 이룬 아저씨들이 딱딱하게 얼은 길바닥에 제설용 염화칼슘 가루를 열심히 뿌리고 있었다. 한 분은 수레에서 한 움큼 파다가 손으로 뿌리고, 다른 한 분은 작은 통에 담아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솔솔솔 뿌리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다 뿌렸는지, 통에 남아있는 가루를 한꺼번에 들이붓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마침 수레 옆으로 지나가던 호원이 얼른 상체를 숙여서 통을 주워드렸다.
"추우신데 고생 많으시네요."
"돈 벌려면 뭔들 못하겠나요…. 고맙습니다, 그려."
그럼 수고하세요! 겸연쩍게 웃는 아저씨께 가벼운 미소로 목례를 하고는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호원이었다.
*
"호원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거야…."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동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까치발을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2호선인 무한역은 출퇴근하는 이용객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노선으로 환승하는 역이라서 그런지 하루 온종일 사람들로 끈이질 않았다. 특히 오늘은 폭설 때문에 부득이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한역의 지하철 플랫폼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지하철 덕분에 호원이와 함께 '지하철 이어타기'를 하지 못했다. 한참 전에 건대입구역을 지났다면서 호원이에게 연락이 왔었는데 지금은 어디쯤 왔으려나? 까딱하면 지각일 것 같은데….
걱정하고 있는 찰나, 휴대폰을 꼭 쥐고 있는 손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제 곧 내려!!!!!!」
확인을 하고 지하철 전광판을 바라보니, 무한역으로 지하철 한 대가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요란한 소리가 역내에 울려 퍼지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선순환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한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때, 다시 한 번 손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 보고 싶어 죽겠지?ㅋㅋ」
휴대폰 화면을 보는 동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실실 웃으면서 「보고 싶으니까 빨리와」라고 한 글자 한 글자 키패드를 치는 그에게, 일순간 강한 바람이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지하철이 역내에 진입하면서 몰고 오는 일시적인 강한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휘날렸다. 답장하던 손가락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니 지하철이 서서히 속력을 줄이면서 곧 멈췄다.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스크린도어가 열리는 동시에 지하철문도 활짝 열렸다. 그러자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편하게 낑겨있다가 툭 내팽개쳐지듯이 제일 먼저 튀어나온 호원이가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더니 이내 동우를 발견하고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처럼 함박웃음을 지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동우야!!!!!!!!!!!!!!"
이를 본 동우도 활짝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와다다 뛰어갔다.
*
"에라이, 팔 한 번 움직이기 힘들고 좋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야상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했으나, 팔이 접힌 부분이 찡하게 저려왔다. 32년 만에 내린, 이른 폭설 때문에 아주 단단히 작정하고 옷을 두껍게 껴입고 나왔는데 춥기는 커녕 오히려 포근하다. 기상청을 너무 맹신했나? 그럼 그렇지…. 기상청이 오늘도 멋진 똥을 한 건 선사했다. 덕분에 움직일 때 마다 펭귄처럼 뒤뚱뒤뚱 거리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뒤에서 남들이 보면 얼마나 웃길까….
이 생각이 들자, 한숨을 폭 쉬는 성규였다. 마음 같아서는 헐크처럼 쫙! 화끈하게 찢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또 추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슬퍼할까봐 꾹 참는다! (이건 아무래도 변명인 것 같다.)
폭설이 내린 까닭에 겨울치고는 포근하긴 하다만 코랑 손끝이 빨개지지 않을 정도로 시린 날씨다. 눈이 적당히 내렸으면 집에서 차 끌고 나와서 출근하는 건데, 좀 많이 와야지…. 무한지구대에 발령받은 이래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첫출근이 믿기 싫은지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집에는 또 어떻게 가란 말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면서 간신히 출근한 거였는데 퇴근길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난 몰라…. 오늘 그냥 야근할래…."
노인네 마냥 무기력해진 그는 뒤뚱뒤뚱 걸으며 무한지구대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스친 한 가지 생각.
"굴러갈까?!"
볼썽사나울 정도로 옷을 두껍게 껴입었으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까짓것 편하게 데굴데굴 굴러가서 무한지구대 입구에 터치다운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참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 성규였다. 내 생각은 항상 옳아!
"어딜요? 무한지구대까지요?"
응?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잡으며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성규가 뒤뚱뒤뚱 뒤를 돌아보았다.
"악!!!!!!!!!!!!!! 남우현!!!!!!!!!!!!!!!!!!!!!!!!!!!"
오리 마냥 '꽥' 소리를 지른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발랑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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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부드러워 보이는 황갈색 코트를 걸친 단발머리 아가씨가 이제 막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아이처럼 아장아장 눈길을 걷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아장아장 걷는 폼이 뭔가 이상해서 신발을 보니, 새빨간 뾰족구두를 신고 있었다. 빙판길이 매우 미끄러운지 가끔가다 넘어질듯 말듯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멋 부리다가 죽겠네."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명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가 철퍼덕 미끄러졌다. 이를 본 동료들이 '어어? 부축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면서 술렁이고 있었다. 명수는 코를 들이키더니 턱 끝으로 여자를 가리키면서 부축해주러 가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동료 중 하나가 '너는?'이라고 물었다.
"저는 저런 여자한테 별로 관심 없어요."
*
한바탕 내린 눈 덕분에, 8시에 맞춰 제대로 출근한 사람은 의경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야근하던 동료들이 퇴근을 뒤로 미룬 채 초과 근무를 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출근도장을 찍고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었지만, 지옥의 출근길을 맛본 터라 하나같이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업무를 보는 척하면서 각자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특히 김경위가 그랬다.
아침 출근길부터 남우현을 만났더니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그였다. 게다가 보란 듯이 그 앞에서 뒤로 발랑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창피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원치 않은 몸개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누구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죽을 맛이었는데 누구는 배를 부여잡고 깔깔깔 웃어젖히기 바빴다. '와하하하~ 진짜 그러고 굴러가려고요?'라면서 말이다. 아마도 남씨의 눈에는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진 게 아니라 아예 근무지까지 굴러갈 심산으로 길바닥에 드러누운 걸로 보였나보다. 하아….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너무나도 창피한 나머지, 다부지게 주먹 쥔 손을 관자놀이에 갖다 대는 김경위였다. 으…. 멘붕….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정신없이 웃는 남우현의 웃음소리가 거슬려서, 집에 이제 들어가는 거냐고 물으니 그의 눈초리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마치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것처럼…. 방귀 뀐 놈이 성내듯, 술 취한 사람이 안취했다고 말하듯, '그런 사람=술주정뱅이=남우현'라는 공식이 들어맞는데 괜히 쓸데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랬다. 그러더니 시험 공부하러 학교 가다가 깜빡하고 놓고 온 게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아, 예…. 퍽이나 그러세요.'
건성으로 대충 대답하고 뒤뚱뒤뚱 제 갈 길을 가려는 성규의 등에 '차는 어디다가 뒀길래 아침부터 굴러다녀요?'라는 질문을 아주 그냥 내다꽂는 우현이었다. 그 바람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성규는 '눈이 많이 와thㅓ 대중교통 이용했thㅓ요!!!!!'라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꽥 질러대고는 근무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흥분을 했더니 괜히 시옷 발음이 안 되고 난리였다. 주인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까지 창피하게시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 그의 번데기 발음에 또 한바탕 자지러진 우현은, 씩씩거리며 뒤뚱뒤뚱 멀어져가는 성규를 향해 외쳤다.
'퇴근할 때 데려다 줄게요!'라며….
맙소사…!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조기퇴근이다, 김성규!!!!!!!
*
요즘 갑작스럽게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코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치 숨이 코딱지를 스치면서 내는 소리와 흡사했다. 코를 파야하나?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성열 순경의 코에서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의경이 무심하게 한 마디 했다.
"저기요, 콧구멍에 누구 살아요?"
똑똑. 노크하는 행동까지 친절하게 해 보인다. 그 바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무한지구대 식구들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성열은 굉장히 민망했는지 목과 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화장실로 도망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휴지를 한 장 잽싸게 뽑아서 건네는 김의경이었다.
"여기서 해결하셔도 되잖아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빙글빙글 띠면서 말이다. 아오…. 얄미워라, 얄미워!!!!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을 만큼 얄밉게 느껴지지만 보는 눈들이 많아서 때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따가 점심시간에 몰래 때려주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거의 빼앗다시피 휴지를 낚아챈 성열은 '고맙다, 이 자식아.'라며 마음에도 없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김의경은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를 본 성열은 당당하게 보란 듯이 콧구멍에 손가락을 푹 넣었다.
덕분에 무한지구대 식구들은 개코 원숭이가 코를 판다며 배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지구대가 떠나갈 정도로 왁자지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리에서 웃지 못하고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건 무표정의 김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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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 허겁지겁 전투식량을 먹는 것처럼 의욕적으로 수육국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성열 순경은 '잘 먹었습니다!'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숟가락질을 하다가 깜짝 놀란 동료들은 칫솔통을 달그락 거리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눈을 껌뻑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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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이순경은 책상 위에 칫솔통을 내려놓더니 2층으로 다다다 올라갔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여유롭게 오를 필요도 없이 껑충껑충 두 칸씩 올라가니, 점심을 먹고 팔팔해진 의경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 마냥 미친 듯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옳거니! 그 모습을 보며 냅다 소리 지르는 이순경이었다.
"여기가 너네들 집이냐!!!!!"
갖가지 난장판을 피우고 있던 의경들은 불꽃같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서 취하고 있던 행동들을 일시 정지하였다. 부엉이처럼 눈이 댕그랗게 변한 그들의 모습을 보니, 이순경은 자신이 마치 김경위가 된 것만 같은 황홀한 느낌에 사로잡혀 버렸다. 아, 이래서 이 양반이 툭하면 윽박을 지르는구나!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어깨가 저절로 으쓱으쓱 거린다. 그러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싶었는지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까닭을 몰라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의경들 사이에서 김의경의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헤, 벌리면서 자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이순경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는 1층에서 민중을 위해 일하는데, 누구는 2층에서 태평하게 낮잠이나 자?"
잘됐다 싶어서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니, 마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의경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자리를 터줬다. 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어서 김의경 앞에 우뚝 멈춘 이순경은 그의 다리를 툭툭 걷어찼다. 그러자 눈을 부스스 뜨더니 고개만 똑바로 해서 쳐다보는 김의경이었다. 입은 헤벌레 벌린 채로 말이다. 그런 그에게 가소롭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준 이순경은 턱 끝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너, 나.와."
대결 신청이다!!!!!!!!
*
이리하여 막간의 점심시간을 틈타, 옥상에서 열리게 된 '제 1회 울림경찰서배 눈싸움'!
심판은 무한지구대 먹이사슬의 최상위권에 군림하고 있는 김경위였고, 대결 구도는 365일 애증으로 가득찬(아마도 성열과 명수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다.) 경찰과 의경이었다. 경기 시작 5분 전, 각 팀에게 작전을 모의하는 시간이 짧게나마 주어졌다. 동네 아저씨들 마냥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는 경찰들과는 달리, 20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혈기왕성한 의경들은 김의경을 주축으로 둥글게 모여서 작전을 짜고 있었다.
"뭐야, 쟤들은 전쟁 나가? 그냥 대충 눈 한 움큼 뭉쳐서 마구 던지면 되지."
눈엣가시 같은 김의경이 상대팀 주장으로 파악되자, 가타부타할 것 없이 일단 무조건 까고 보는 이성열 순경이었다. 한쪽에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고 있던 이호원 순경이 그 말을 듣고는 승부욕에 불타올라 경찰팀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구석에서 뜀뛰기를 하고 있던 장경장은 흐트러진 방울 모자를 매만지며 경찰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남들보다 작은 키 때문에 까치발을 들고 그 사이에 간신히 낀 그는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호원이 중심이 되어 작전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4-3-4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근데 눈싸움에서 수비수는 뭐하라고 이런 포메이션을 짜?"
호원의 말에 토를 단 건 성열이었다. 축구도 아니고 눈싸움에서 왜 수비수를 필요로 하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동우가 한 마디 거들었다.
"뒤에서 눈 만들어야지!!!"
아~하! 동우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작전 회의 종료!! 경기 준비!!!"
툴툴거릴 땐 언제고, 출근길 교통 정리할 때나 쓰는 호루라기를 휙휙 불어대며 심판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성규였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는 의경팀에서 '경찰들을 꽂아버리자!!!'라는 강렬한 기합과 함께 힘차게 화이팅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꽂아버린다'는 거친 단어 선택에 내심 움찔거리는 경찰팀이었다. 무…무섭지만 질 수 없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곳으로 손을 모은 그들은 '어기야 디여라차!!!!'라고 우렁차게 외치며 만개한 꽃처럼 팔을 각자 하늘 위로 뻗었다.
이와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경찰과 의경의 자존심을 건 눈싸움이 시작되자, 동우는 수비수를 맡은 동료들과 함께 쭈그려 앉은 채 주변에 있는 눈을 한 데 모아 눈뭉치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끄앙!!!!"
경기를 시작한지 몇 초도 안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경이 던진 눈뭉치에 애꿎은 심판이 맞고야 말았다. 성규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누가 던졌는지 매의 눈으로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놈의 새끼들…. 그냥 확 경기를 중단해 버릴까보다!
미드필더 역할을 맡은 성열은 눈을 뭉쳐서 던지는 건지, 뿌리는 건지 모를 만큼 마구잡이식으로 하얀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그의 목표물은 오로지 단 한 명, 김명수였다. '나는 한 놈만 팬다.'라는 강한 신념으로 의경들 사이에서 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표물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급격하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눈뭉치를 만들기 위해 잠시 자리에 쭈그려 앉아 왼손 위에 눈을 한 무더기 얹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눈을 다지려다가 무언가 번뜩 생각이 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여기 어디 짱돌 없나?"
아무래도 눈싸움을 빙자한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
치열한 눈싸움이 시작된 지 어느덧 15분 가량 지났다. 옥상에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얀 눈 범벅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며칠 동안 감지 않아서 생긴 비듬처럼 머리카락 곳곳에는 하얀 눈가루가 묻어있었고, 그들이 입고 있는 두툼한 동복에도 눈이 묻어나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성열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종료 시간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럴 순 없어! 안되겠다 싶었는지 명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눈을 거하게 쓸어 모으는 그였다. 아주 그냥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눈으로 다 막아 줄 테다! 특히 콧구멍!!!!
같은 시각, 상체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던 명수도 본능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주섬주섬 눈을 뭉치기 시작하였다. 이번 눈싸움에서 유독 자신한테만 죽자 사자 달려들었던 이순경이 종료를 5분 남겨놓고 그저 가만히 있을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성열이란 사람은 5분 동안 최후의 일격을 가했으면 가했지, 넋 놓고 시간을 보낼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손을 바삐 하여 부지런히 서너 개 정도 만들었을 때쯤, 주변에 서있던 동료들이 이성열 순경의 등장을 알리더니 혼비백산하여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명수였다. 한 개만 더 만들게 잠깐이라도 방어 좀 해주지, 치사한 자식들….
할 수 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눈에 뜨거운 쌍심지를 켠 채 성난 투우처럼 달려오는 성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눈을 서너 개 던지는 걸로 그를 쉽게 제압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이야아아아!!!!!!!!!!!!!!!"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높이 도약한 성열은 그에게 달려들면서 팔꿈치로 복부를 가격했다. 그러자 '욱'하는 소리와 함께 맥없이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명수였다. 이때를 놓칠세라, 그의 위로 올라탄 성열은 주머니에서 눈뭉치를 꺼내 저항하는 그의 입에 되는대로 마구 쑤셔 넣었다.
"케케켘켘케케켘케케케ㅔ케케케케케!!!!!!!!!!!"
악마에게 홀린 듯한 사악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이다. 갑자기 입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 눈 때문에 켁켁거리던 명수는 온 힘을 다해 뒤집기를 시전하여 성열의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바닥에서 눈을 한 움큼 움켜쥐어, 바동바동 거리는 그의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눈가루 때문에 눈을 못 뜨는 성열이 두 눈을 꾸욱 감은 채 어푸어푸 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제게 자비란 없어요!"
밑에 깔려있는 성열이의 의견을 조용히 묵살한 명수는, 적군의 동복 주머니에 손을 넣어 눈뭉치를 꺼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뭉치가 뿅, 튀어나왔다. 그것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명수가 코웃음을 치는 사이, 주먹으로 그 눈을 격파하는 성열이었다. 빠샤!!!!!! 그러고는 뒤집기를 시도하였다. 행여나 뒤집혀서 자신이 밑으로 깔릴까봐 놀랜 명수가 그를 꽉 껴안았다. 그렇게 하나가 된 두 사람은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면서 계속 티격태격 거렸다.
한참동안 엎치락뒤치락하는 둘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동료들은 하나같이 혀를 끌끌 찼다.
"쟤네들은 영화 찍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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