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5
" … …."
조용한 공기만이 맴도는 카페 안에서 호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마 태형은 그 여자에게 간단하게 지민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와 같은 짧은 질문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겠냐는 여자의 말은 이렇게 당황스러움을 안은 채 앉아있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 커피가 참 맛있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자도 막상 앉아서는 입을 열기 힘든지, 호석이 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앉아 정적을 이룬지 10분 남짓,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제가 그 쪽을 부른 이유는요."
" 저…죄송한데, 혹시 지민이랑 무슨 관계인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 …네? "
태형은 본인이 하려던 질문을 여자가 대신 물어보자 당황한듯 '네?'라며 반문했지만, 여자는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문 채 태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던 태형은 곧 당황했던 티를 감추고는 입을 열었다.
" 제 친구 남자친구에요. "
" …아, 지민이가요? "
네. 조용히 대답을 읊조린 태형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탄소의 친구라고 본인을 소개하는건 언제나 씁쓸하구나. 라고 태형은 잠시 생각했다. 예전부터 탄소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본인을 소개할 때면 '탄소의 남자친구에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태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친구에요.'도 아니고 '제 친구는 다른 남자의 여자친구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꼴이었다. 왠지 한없이 비참해지는 태형이었다.
" 그럼 그 때 같이 계셨던 분이 여자친구인거죠…? "
" …네."
" …그럼 죄송한데, 그 여자친구분 전화번호… 여쭤봐도 될까요? "
" 그건 왜요? "
탄소의 전화번호를 묻는 여자의 말에 태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아마 혹시 탄소에게 해코지를 하지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일테였다. 그전까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호석 또한 그 말에 눈길을 여자에게로 옮겼다. 여자는 갑자기 공격적인 어투로 바뀐 태형 때문에 당황했는지 말을 살짝 더듬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 …제가 꼭 부탁 드릴게 있어서 그래요."
" 무슨 부탁이요? "
" …지민이 좀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요. 제 연락은 잘 안받거든요."
" … …."
태형은 너무나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여자의 말에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박지민도 그렇고, 이 여자도 그렇고 요새 뻔뻔한게 트렌드라니? 방금 탄소가 지민이의 여자친구라고 말했는데도 이런 부탁을 하는 여자가 태형은 어이 없을 따름이었다. 한 마디 해줘야겠다ㅡ 생각하던 태형은 곧 들려오는 여자의 말에 헙, 하고 숨을 멈추었다.
" 아, 맞아. 이런 얘기하기 전에 제 소개가 늦었죠? 전 지민이 누나에요."
" … …."
" 친누나요.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친누나였구나. 그럼 그 자식은 왜 오해하게 행동했대. 처음부터 친누나라고 말하지. 태형은 아차 싶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친누나랑 같이 있는 지민을 보고는 혼자 욱해서 행동해버린 꼴이었다. 그렇게 당황한 채 앉아있던 태형은 곧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탄소와 지민이었다.
* * *
" 왠일이야, 데리러오기까지 하고."
" 그냥 보고싶길래 왔지. "
" 오, 뭐야. 태형이가 어떻게 자극이 좀 됐나봐? "
" 뭐, 그럴수도 있고? "
김태형이 말한게 이런 효과였을까? 강의가 끝나자 강의실 앞에 환하게 웃고 있는 지민이의 모습에 나도 기분이 함께 좋아져버렸다. 이번 팀플 조 완전 꽝인것 같아서 짜증났었는데…. 역시 내 기분은 늘 박지민이 컨트롤한다니까. 지민이의 팔짱을 꼭 낀 채 언덕을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뭔가 방식은 이상했지만, 지민이가 이번 기회로 내게 이렇게 늘 잘해주게된다면 태형이에게 밥이나 한 턱 쏴야겠다구.
" 저녁이나 먹으러갈까? 조금 이르려나? "
" …음, 나 아까 과 애들이랑 군것질 조금 해서 배 별로 안고프긴한데."
" 영화라도 보고 밥먹으러갈까? "
" 영화? 오늘 왠지 영화의 기분이 아닌데…."
" 영화의 기분은 또 뭐야, 귀여워."
귀엽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지민이를 바라보다가 씩 웃어주었다. 지가 더 씹덕으로 생겼으면서. 귀여운 애가 귀엽다고 말하니 더 귀엽다고 해야하나? …말이 이상한데, 어쨌든 무진장 귀여운 지민이를 바라보다가 문뜩 호석이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꽤 오래 사귀면서 김태형이야 죽어도 만나기 싫다고 워낙 난리를 쳐놔서 안보여줬지만, 호석이한테도 지민이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긴, 사실 호석이에게 보여줄 생각은 예전에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지민이 때문에 속상했던 얘기를 해버린 탓에 민망해서 못보여준 적이 많았었지.
" 그럼 우리 시간도 애매한데 내 친구네 카페 갈래? "
" 너 친구? "
" 응, 꽤 오래된 친군데, 아마 지금 퇴근 시간 지나기는 했는데 걔 끝나고도 거기 자주 있어서 아마 있을거야."
" 나야 상관 없는데 친구한테 연락 안해봐도 돼? "
" 상관없을걸? 없으면 우리끼리 커피 먹고 가면 되고, 너 한번 데려오라고 한적도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물론 그 때 내가 속상하다고 너무 찡찡대서 '데려와, 죽여버리게.' 라는 식이긴 했는데 괜찮겠지, 허허. 태형이 같은 경우엔 워낙 욱하기도 했고, 지민이랑 마주했던 상황이나 내가 했던 이상한 부탁들 때문에 지민이와 좀 안좋은 관계가 형성되긴 했지만, 그래도 호석이랑은 친해졌으면 좋겠다. 태형이가 내게 남동생 같기도 하고, 가끔은 오빠 같기도 한 그런 친구라면, 호석이는 내게 엄마 같은 친구랄까. 늘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친구다. 그렇기에 이 기회에 지민이에게 호석이를 소개해줄 수 있겠다, 하는 기대감에 부푼 채 호석이가 있을 카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 보인 건….
" …김탄소? "
" 지민아! "
내가 원래 만나려고 했던 호석이 뿐만 아니라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김태형, 그리고 지민이를 부르며 예쁘게 웃는 저번 영화관에서 그 여자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곧 화난 발걸음으로 여자에게 걸어가는 지민이에 의해 나도 모르게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멈추었다. 보는 사람도 놀랄 정도로 화난 표정이었다. 그렇게 그 여자의 손목을 잡고는 일어나라며 거칠게 일으키던 지민이는 곧 태형이에게 차가운 실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 … …."
" 적당히 하셔야죠, 적당히."
그렇게 그 여자의 손목을 잡은 채 태형이를 지나친 지민이는 곧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내 옆을 지나 나가버렸다. 지민이가 나가고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한 카페 안에서 나는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민이랑 팔짱 끼고 기분 좋게 들어왔는데 진짜 한 순간에 이렇게 돼버리니 멍해지지 않는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 …미안."
" 사과보다 설명 먼저 해."
" 탄소야, 그게."
" …아냐, 내가 말할게."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내게 사과를 해오는 김태형이 왜 이리 미워보이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형이한테 밥이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사과하는 김태형도, 설명하려던 호석이를 막아서는 김태형도. 이 상황을 김태형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너무 밉다.
" …뭔 상황이냐고."
" 저 여자분이 이 앞을 지나가시더라고."
" …그래서."
" … …니 남자친구랑 무슨 사이인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저분ㅇ…."
" 그걸 니가 왜 물어봐? "
태형이의 말을 끊어버리자, 태형이는 약간 당황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미안' 이라는 말을 작게 읊조렸다. 사실 지금까지 태형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왠만한 일이 있어도 보통 태형이가 날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거의 화를 낸 일이 없었다. 하지만 …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이 날 위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필요없는 오지랖이고.
" 저 여자가 지민이의 뭐든간에, 그게 왜 니 알바냐고."
" … …."
" 그래, 늘 내 얘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근데 뭐."
" … …."
" 그게 니가 내 일에 뭐든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거냐? "
입술을 깨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김태형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겠다, 내가 지금 뭐에 화난건지. 사실 생각해보면 지민이가 태형이에게 뭐라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나 때문에 싫은 소리 듣는 김태형이 답답했던 것 같다. 이런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늘 나보다 먼저 화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혼나야하거나 불이익 받게 될 걸 본인이 욕먹으면서 해결해주곤 했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런 것들에 담겨왔던 복합한 감정들이 오늘 터진 것만 같았다.
" 그냥 앞으로 나도 너한테 내 얘기 안할테니까 너도 내 일에 그냥 신경 끄는 걸로 하자."
" …그건 싫어."
" …뭐? "
" 오늘은 나 때문에 너 기분 나빠졌을테니까 진짜 미안한데."
" … …."
" 너한테 신경 끄는건 싫어."
그 말에 김태형을 올려다보자, 김태형은 마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문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엉켜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설마 아니겠지, 하고 지나왔던 그 생각들이 다시끔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잠시 우리를 머물던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김태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김탄소."
" … …."
" 진짜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그냥 말할게."
" 아니, 하지마."
" … …."
" 하지말라고, 너가 지금 하려는 그 어떤 말도."
" …아니, 할거야."
역시 내 생각이 맞았나보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아닐거라고 내 자신을 속이고 속였던 그 생각이 너무 갑작스럽게 현실로 다가와버렸다. 하지만 그 얘기가 나오는 순간, 아마 지금과 같은 우리의 관계는 끝일게 보일듯 뻔해서. 그래서 지금 태형이가 말하려는 모든 이야기를 막아보려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바라보는 태형이의 눈빛은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시간들 중에서 가장 확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내가 널 어떻게 더 막겠니. 결국 고개를 숙여버린 나에게 태형이는 결국 그 말들을 꺼내버렸다.
" …좋아해."
" … …."
" 11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
안녕하세요(ㅠㅠ)!
와, 개강한데다가 이제 슬슬 졸업을 바라보는 학년이 되어가니 너무 바쁘네요, 훌쩍.
종강은 대체 언제 오는거죠..(까마득).
요새 꽃샘추위다 뭐다 해서 날씨 되게 쌀쌀하던데, 독자님들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그럼 다음 화에 뵈어요! ♡
(암호닉은 다음 편 쯤에 정리해서 올리겠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