溺愛
후에 누군가 제게 네가 이 세상에서 보았던 삼절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첫째, 나를 사랑한다 했었던 당신의 눈.
둘째, 내 품에 안겼던 작고 가느다란 몸.
셋째. 내 이름을 불렀던 그대의 목소리.
그저 벌을 받아야 할 건 내 마음뿐이라고.
풍국(風國) 황태자 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을 때, 더는 물의 비릿한 냄새는 나지 않았고, 불에 타는 듯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가 뚜렷해진 후 눈에 가득 들어찬 건 기억을 잃기 전 잠시 눈앞을 스쳤던 붉은 머리의 사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알 수 없는 것들만 가득한 곳이었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붉은 머리의 사내가 들고 있던 부채로 내 몸을 꾹- 눌러 침대 위로 눕혀버렸다. 점점 스며드는 불안한 기분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기억도 없고,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상태에서 처음보는 사내라.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 불안한 눈길로 사내를 바라보자,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나를 보고 있던 사내가 들고 있던 부채를 촥- 하고 펼치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내게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 되게 약해졌더라-?"
"아무리 급했다곤 해도, 조절해서 뿜은 건데.
수국(水國)의 공주라는 게 화상이나 입고."
차갑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눌했다. 얼굴이나 허벅지 등 몸이 좀 따갑다 했더니, 여린 살들에 화상을 입었나 보다. 기절하기 전 느꼈던 뜨겁게 타는 듯한 느낌이 정말 불에 타는 거였다니. 사내가 화국(火國) 사람인 걸로 보아, 아마 이 사내가 그 불길을 이용해 나를 우물속에서 구해준 듯했다. 따끔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키자, 더이상 사내는 나를 막지 않았고, 그저 심드렁한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한 부채질만 계속 이어나갔다.
"전엔 안 그랬잖아.
너 설국(雪國)저하랑 행차했을 때."
익숙한 단어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사내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쳤다. 나를 알고 있는 자였나? 설국(雪國)저하와의 행차라니, 그럼 민윤기라는 그자도 알고 있는 건가? 쉴 새 없이 머리를 파고드는 질문에 옅게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자, 머리를 한번 긁적인 그가 나와 같이 인상을 찌푸렸고, 부채질하던 손까지 멈춘 그가 나를 노려봤다.
"와- 이건 진짜 자존심 상했다.
너 설마 나 기억 못 하는 거야?"
"나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해놓고?"
어이없다는 듯 황당함을 가득 담은 얼굴을 보고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자, 허- 하고 헛웃음을 친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천한 것이 아닌 것처럼 굴어야 천하지 않다 여겨주는 것이고,
더럽지 않게 굴어야 더럽지 않다 여겨주는 것입니다.
착하게 구세요. 예쁨을 받고 싶은 것이라면."
"내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때 네가 했던 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어.
그 때 받은 충격이 여간 센 게 아니라서."
사내의 말에 따르면, 설국(雪國)저하와 내가 행차를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일어난 그 행차에 많은 백성이 장사를 할 수 없는 등 많은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장사하는 백성은 모두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급급했을테니, 하루 장사가 되지 않는다면 많은 불이익이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장사를 하지 못해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본 이 사내는 이 갑작스러운 행차를 멈춰야 한다고 결심했고, 길이 더럽혀진다면 행차가 멈출 거라 믿었기 때문에, 저잣거리에 있던 음식들을 나와 민윤기가 걸어가던 길 앞으로 모두 집어다고 했다. 그가 생각했던 고귀한 왕족 사람들은 더러운 걸 무척이나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더러운 길을 밟을 수 없어 돌아갈 줄 알았던 이 몸의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신을 벗어 손에 든 채, 그 더러운 길을 맨발로 걸어 사내의 앞으로 다가섰고, 그 후 저런 대사를 뱉었다고 한다. 예쁨을 받고 싶다면 착하게 굴라고.
"그때 너 진짜 싸가지 없었는데,
지금은 뭔가-"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조금 더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사내의 말에 괜스레 찔려 몸을 움찔 떨었다. 이 몸의 주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약한 여인이 아니었나 보다. 사내의 말을 들어보면 약하긴 보단 강한 쪽의 여성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자살을 했던 걸까, 이 여자는. 그럴 만큼 민윤기를 사랑했던 걸까?
괜히 심란해진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자 나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뭔가 위험하지는 않아 보이는 상황에, 몸에 힘을 푼 채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대자,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화상을 입은 자리에 다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거 설국(雪國) 저하 때문인가?"
"네가 이렇게 약해지고,
자꾸 숨을 끊으려 하는 이유."
"물속에서 내가 구해주기 전까지, 넌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잖아."
사내의 목소리에, 그저 천장만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말 설국(雪國) 저하 탓인 건가? 이 여자가 이렇게 약해지고, 자살을 시도했던 게. 설국(雪國) 저하라는 사람은 더이상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처음 깨어났던 날, 그 화국(火國)의 여자나 설국(雪國) 저하가 하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여자는 아직도 설국(雪國) 저하를 사랑하는 것 같고. 그럼 그랬기에 이 여자가 그토록 아파했던 걸까?
"죽으려 하지 마."
생각의 끝, 갑작스레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천장만을 향해있던 시선이 사내를 향했고, 낮게 깔린 목소리완 달리 무덤덤한, 아니 무덤덤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얼굴을 한 사내가 순간 부채를 들고 있지 않던 손가락을 들어 쿡-하고 내 볼을 찔러왔다.
"너, 어여뻐."
"원래 어여쁜 애들은 아파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넌, 안 아파도 될 만큼 충분히 어여쁘니까,
그러니까 자꾸 자기 갉아먹지 마."
맥락에 맞지 않게 툭- 튀어나온 말을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볼을 찌른 사내의 검지손가락도 그러했고. 말을 하지 못해 어버버-하며 당황감이 잔뜩 물든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는데, 내 볼에 찔렀던 손을 빼낸 사내가 침대에 턱을 괴고는 나를 바라봤다.
"설국(雪國) 황태자한테 당한 게 너무 분해서,
복수를 끝내기 전엔 눈을 감을 수 없다든지."
"내일 조식(朝食)이 너무나도 기대되어 죽을 수 없다든지."
"그것도 아님, 이 잘생긴 나와 벗을 하고 싶어서,
벗이 되기 전까진 절대 죽을 수 없다든지."
"핑곗거리는 많잖아."
푸스스- 옅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슬프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무척이나 슬펐다. 어쩌면 내게 말하는 이 핑곗거리들이 모두 이 남자가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이유가 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내가 그 핑계거리 해줄게."
"뭐, 설령 나는 절대 너와 벗이 되어주지 않는다든지.
아님, 내가 너와 함께 설국(雪國) 저하에게 복수를 해준다든지."
"내가 꽤 무료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장난스러운 척 배시시- 웃는 얼굴 속이 약간 찡그려졌다. 무슨 사연을 가진 사내일까, 이 사내는. 분명 내게 죽지 못할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이 남자는, 그로 인해 자신에게도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겠지. 나와 절대 벗이 될 수 없어 죽을 수 없다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설국(雪國) 저하에게 복수를 해주어야 하므로 죽을 수 없다든지. 무슨 사연일지는 몰라도 그 사연이 깊은 사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 매번 핑곗거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사내의 눈을 바라보다, 결국 나 또한 그 사내에게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기로 다짐했고,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 편인 듯 느껴지는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아채, 손 위로 글자를 끄적였다.
'너도, 예뻐.'
'원래 어여쁜 애들은 아파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과 마주 잡은 손에 놀란 듯 한참을 굳어있던 사내가, 자신의 대사를 따라 적는 나를 보곤 결국 푸스스-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 좋은 웃음의 끝, 조금은 달아오른 얼굴의 그가 내게 잡혀있던 손을 움직여 반대로 내 손을 꽉- 붙잡아왔다.
"너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 애네."
"난, 김태형. 넌?"
해맑게 웃는 얼굴이 나를 마주했고, 그 얼굴에 나도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사내의 손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넣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국(花國)의 상징색은 홍색이고, 황태자는 김남준, 황자는 김태형.'
'황자는 김태형.'
이 사내가 바로 화국(火國)의 황자라는 걸.
*
처음 태형의 품에 안겼을 때와 달리,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에 마주 닿는 바람과, 태형의 뜨거운 몸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의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한참이 지나, 태형이 품에서 나를 내려줬을 때는, 오히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걸 내가 아쉬워할 정도였다. 다음에 또 놀자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태형의 얼굴에 나 또한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자, 붉은 불빛과 함께 금세 태형이 사라져버렸다.
태형이 나를 내려준 곳은, 내가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화원이었다. 아무래도 화국(火國)의 사람인지라, 수국(水國)의 깊숙한 곳에 내려주기에는 태형 또한 무리였던 듯싶었다. 처음보는 꽃길을 따라 걷는데, 바람이 조금 쌀쌀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활짝- 핀 꽃들이 길게 줄지어져 있었고, 순간 코 끝에 익숙한 꽃향이 스쳤다. 바다와 하늘의 푸른 향이 깃든 꽃향. 처음, 그 전정국이라는 사내의 향이었다.
순간 걸음을 멈춰서고 그 사내를 찾기 위해 주변을 훑어보는데, 어딜 보아도 그 사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를 찾기위해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순간 뒤에서 다다다다- 뛰어오는 걸음소리가 들렸고, 뒤를 돌아보자, 나를 향해 뛰어오는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김탄!"
순해 보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걸 보니,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잘못한 게 있었던지라, 괜히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민의 눈치를 보자, 입술을 꾹- 깨문 지민이 나를 노려봤다.
'화, 많이 났어?'
"아니."
몸과는 달리 살이 오른손을 부여잡고 글자를 써넣었더니, 두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으면서도, 심통이 난 목소리로 잘도 아니라고 말한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불안스레 손끝을 매만지자, 한숨을 푹- 내쉰 지민이 정원의 끝으로 나를 이끌었다.
"화 말고, 걱정 많이 했어."
"..."
"별일 없었지?"
지민의 걱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일,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태형 덕에 잘 해결 되었으니까. 이상하게도, 정원의 끝을 향하는 내내 지민과 나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맴돌았다. 항상 옅은 웃음기를 담고 있던 지민의 얼굴에, 고민의 흔적이 가득 찬 표정이 드러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지민의 얼굴을 바라만 보다 지민을 건들기 위해 손을 들었고, 그 순간 지민이 멈춰서는 바람에 그의 등에 콩- 하고 머리를 박고 말았다.
"으으-"
지민의 얼굴만 보고 걷던 게 화근이었던 건지, 박은 머리가 생각보다 아려 박은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괜히 지민을 노려보자, 그 순간 머리를 매만지던 손 위로 사내의 손 하나가 툭- 올라오더니 부드럽게 그 부분을 매만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띤 오라버니가 괜찮느냐? 하고 자상한 물음을 던졌다. 아마 지민이 갑작스레 멈춰 섰던 것 또한, 앞에 석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가- 오라비가 걱정했잖니."
'아, 머리는 이제 괜찮-'
"아니, 그게 아니라.
저잣거리에 혼자 나갔다더구나."
나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변명을 하자,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석진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높낮이 없이 일정한 톤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혼을 내는 듯한 목소리에, 석진을 바라보던 시선을 휙-하고 돌려 지민을 바라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지민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변명을 하는 건지, 입모양으로 뭐라 뭐라 말하긴 하는데, 뭐라고 하는 건진 도통 모르겠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오라버니를 바라보자,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두어번 부드럽게 쓸어내린 그가 언제 흐트러진 건지, 살짝 헝클어진 내 옷무새를 정리해주었다.
"호기심이 많은 건, 어렸을 때부터 알았으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금 조심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다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으니 말이다."
진지한 표정의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날 걱정해줄 이가 없어서 그런가, 그저 빨리 나갔다 오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 판단이 여러 사람을 걱정시켰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그냥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오묘했다.
다시는 걱정 끼치지 않을게요. 하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입을 움직이자, 그래. 하며 밝게 웃어보인 오라버니께서 그럼, 좋은 꿈 꾸렴, 아가. 하며 멍하니 선 나를 지나쳐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5살이나 차이가 나서 그런지, 오라버니에게선 자꾸만 어른의 짙은 향이났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듯도 하고, 항상 일정한 그의 감정선이 왠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갑작스런 권력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던 화국(火國)의 황태자처럼, 갑작스레 권력을 잃었던 나의 오라비 또한 아주 힘든 세월을 겪었을 지도 몰랐다. 갑작스레 원치도 않던 무언가를 얻게 된 쪽, 갑작스레 무언가를 잃게 된 쪽. 그 누가 더 힘들었다 칭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오라비 또한 힘들었을 건, 누가봐도 분명한 사실일테다.
"가자."
생각에 잠겨 멍하니 오라버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톡톡- 친 지민이 가자며 먼저 발걸음을 떼었고, 그를 따라 나 또한 정원의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생각을 정리할 게 있으니 금방 돌아오겠다고, 겨우겨우 지민에게 허락을 받고 밤 공기가 쌀쌀한 정원으로 향했다. 밝을 땐 느끼지 못했던 밤 공기만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나를 휘감았고, 조금 쌀쌀한 기분에 걸치고 있던 옷을 더더욱 감싸안았다. 조금 피곤하다 싶은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온 건, 여전히 내 근처를 맴돌고 있는 꽃향 때문이었다. 태형을 만났을 때, 이 향이 사라졌던 걸 보면, 그 사내가 가까이 있을 때만 이 향이 내 근처를 맴도는 것 같은데, 정원에 홀로 들어섰던 때에도, 한참이 지나 나온 지금도, 자꾸만 그 꽃향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게 이상했다.
꽃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정원 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나를 위로해주듯 주변에 흩뿌려지는 꽃향이 좋았다. 정원에 있는 수 많은 꽃들은 절대 낼 수 없는, 그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향이라 더욱 마음이 동했다. 그 사내가 진정 나를 위해 이 꽃향들을 흩뿌려주고 있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직접 묻고싶었다. 이 꽃향이, 당신이 내는 게 맞느냐고.
사내에 대한 호기심과 주변을 맴도는 꽃향이 짙어질 수록, 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박차를 가했고, 그 순간 쌀쌀하던 공기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사고를 쳤다 하던데,
왜 또 혼자 다니는 것이냐?"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설국(雪國) 저하와 화국(火國)의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아름답게 웃고있는 여인의 얼굴과, 그런 여인의 어깨를 가득 끌어안은 저하의 품. 또 다시 가슴이 저려왔고, 몰랐을 땐 왜 이러지, 하고 끝냈을 일이, 상황을 다 알고나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전히 저하를 사랑하는 몸과, 그런 이 몸을 밀어내려하는 저하. 내가 그들의 사랑을, 아니 이 몸 주인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주제넘은 짓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자꾸만 내 앞의 저 사내가 괘씸해졌다. 함께 연정을 나누었다면서, 나라를 위해, 아니 혹여나 이 몸을 사랑했던 것도 다 권력을 위해서였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 보면, 이 여인은 그를 사랑했음이 틀림이 없는데, 어찌 저 사내는 이 여인을 저리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왜 대답이 없어. 혹여나 몸이-"
한참을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침묵을 깨기 위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고, 그 순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차갑게 등을 돌려버렸다. 나에게 대답을 요구한다는 건, 내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 내게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이 몸에게 조금의 미련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날 배려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긴,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다른 여인을 품에 안고 말을 거는 것부터, 전혀 배려심이라곤 느껴볼 수 없는 듯 했다.
항상 지고 당하기만 하며, 홀로 모든 것을 감싸 안으려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랬기에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든 말든 무시하고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더이상은 모든 고통을 혼자 감수하기 싫었다. 설령 그 것이 나의 고통이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일지라도.
"김탄. 잠깐-"
등 뒤로, 나를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계속해서 발을 놀리던 찰나, 순간 내 앞을 막아선 무언가 때문에 계속 이어지던 발걸음이 끊겼고, 눈 앞에 보이는 발을 타고 올라가 고개를 올리자, 백색의 옷 끝으로 찾고있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거 아는데,"
"혹여나, 정말 날 찾고 있는 건가 해서."
주변을 맴돌던 꽃향이, 코 끝을 찡하게 울렸다. 올곧이 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엔, 정말 오직 나만이 그 안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오직 나만 바라본다는 것. 또 나만을 걱정하고 나를 위해준다는 것.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물 밀듯 타고올라와, 숨을 쉬기 벅찰정도로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 괜찮아? 숨을 가쁘게 내쉬는 나를 보던 네가 얼굴에 걱정스러움을 잔뜩 묻힌 채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왔고, 더욱 짙어진 꽃 향에 기대어 너의 손을 잡자마자, 뒤에서 울리던 발걸음 소리가 멈춰 섰다.
"주제 넘었다면 미안해."
"그래도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길래-"
'응.'
향에 홀린 듯,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 더욱더 너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네가 했던 것 처럼 너만을 올곳이 눈에 담자,
네 두 눈이 커다래졌고,
'맞아.'
'널 찾고 있었어.'
뒤이어 입모양으로 네게 말을 전하자, 멍하니 굳어버린 네가 그저 나를 바라봤다. 주변을 맴돌던 공기가 순간 차갑게 내려앉았고, 한기에 몸이 옅게 떨려왔지만, 내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향 덕에 그리 춥다 느껴지진 않았다.
공기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