溺愛
아가, 꽃은 꺾으라고 있는 거란다.
가만히 그 꽃을 길들이다 보면, 그 하찮은 꽃조차 너를 무시하곤
그날카로운 가시로 널 해치려 들겠지.
아가, 절대 만만한 상대가 되지 말아라, 그 누구에게든.
처음, 아버지의 단호한 말씀에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를 떠올렸다.
아, 나 당신을 꺾어야겠구나.
부질없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자신이 나를 비웃는다.
감히 네가. 감히 내가 너를 꺾을 수 있을까.
감히 나 따위가 네 그 미소를 망가뜨리고, 너의 그 가녀린 목을 거세게 쥐어 비틀 수 있을까.
그 순간 너는 내게 두려움의 상대가 되고 만다.
결국 너는, 또한 내게 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 국(四國)을 쥐고 흔드는 것,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는 것, 백성을 행복하게 거느리는 것.
항상 나를 괴롭혔던 그것들 사이에 너 또한 결국 발을 들이고 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너는 가장 아름답고 또 황홀하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에게 나는 결국 패배를 선사한다.
내가 졌다고. 나는 꽃을 꺾을 자신이 없다고. 나는 당신들을 거느릴 힘이 없다고.
나는 결국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황태자일 뿐이었다고.
나는 그저, 무능한 패배를 선사한 뒤 피로 물든 발자국을 네 마음속에 새긴다.
이번 단 한 번만, 꽃이 아닌, 그보다 황홀한 너의 가시에 찔리기 위해 스스로 발을 디딘다.
내가 어찌해야 네가 내게 올 것인가.
내 발자국이 네 마음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나면,
그제서야,
너는 비로소 내 것이 될 것인가.
풍 국(風國) 황태자曰
닷새를 이곳에서 먹고 자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중, 나는 점점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파악하려 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첫째, 내가 이상한 세계 또한 이상한 몸속에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 이상한 곳에서 벗어날 방도를 모른다는 것. 누워서 지낸 지 사흘이 되던 날, 처음 봤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배척하게 마른 하얀 몸과, 품에 큰 옷을 억지로 끼워놓은 듯 헐렁하게 내려오던 푸른색 옷. 허리 너머까지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와, 그 위에 얹어진 수많은 장신구. 처음 보는 여인의 얼굴이 거울 속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형태가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일은 아직 내게 어렵게 다가왔다.
그리고 둘째는,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목을 긁는 아픔과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쇳소리. 처음엔 그저 일시적인 건 줄 알았던 그 현상은, 내가 물에 뛰어들었을 당시에 온 일시적 쇼크의 현상이라는데, 이 증상이 나을지, 아니면 영영 목소리를 잃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했다.
마지막으로 셋째, 내가 수국(水國)의 공주라는 것.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주요 핵심의 나라, 설국(雪國), 화국(火國), 풍국(風國), 수국(水國).
이 근래, 모든 나라를 섭렵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강국이 된 운사(雲師)를 기리는 설국(雪國). 그리고 그런 설국과의 우호관계로 인해 급속도로 강국이 되어버린 주작(朱雀)을 기리는 화국(火國), (火國). 예부터 겨우 터를 잡아 옅은 생명을 유지해오고 있는 약국 풍백(風伯)을 기리는 풍국(風國), 마지막으로 예전엔 강국이었으나 설국(雪國)의 배신으로 인한 급격한 몰락으로 약국이 되어버린 우사(雨師)를 기리는 수국(水國). 그리고 그런 수국(水國)의 공주로 태어났다는 나.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두렵진 않았-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 맞지?"
멍하니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던 중, 갑작스레 귓가를 파고드는 미성의 목소리에 놀라 파드득- 떨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옅게 한숨을 내쉰 지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그럼 설국(雪國)의 황태자는?"
"...저, 전정국?"
입술을 꾹 깨물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그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떼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지민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 위로 힘없이 엎어졌다.
지민은 나와 같은 수국(水國)의 사람으로서 어렸을 땐 벗, 지금에선 나를 보필해주고 있는 사람이라 했다. 선하게 생긴 얼굴 탓인지, 아니면 친근하게 구는 말투 때문인지, 이 곳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편히 대했던 사람이 지민이었고,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또한 나의 오라비와 지민뿐이었다. 물론, 남들과 함께 있을 땐 벗이라기보단 보필의 의무를 더욱 열심히 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만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들어- 지민이 특유의 버릇으로 말꼬리를 질질 늘이며 다시 책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일단, 수국(水國). 수국(水國)의 황태자는 바로 너의 오라비. 김석진.
수국(水國)의 황녀는 너, 김탄. 그리고 수국(水國)의 색은 푸른색. 이건 알겠지-?"
지민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국(水國)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외운 듯했다. 지겹도록 들어서이기도 하고, 실제로 몇 번 대화를 나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김석진. 나의 오라비라는 사람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게 끊임없이 잘 해주려 노력하는 이 같았고, 나를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며, 나를 아가-라는 낯부끄러운 단어로 칭하며 나의 모든 투정을 해결해줄 듯 나를 대했다.
그는 수국(水國)의 상징인 푸른색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과거의 나를 잊게 할 만큼 눈부셨으며,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걸 기대게 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 자꾸만 헛된 기대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혹여나, 내 삶을 불쌍히 여겨준 어느 한 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건 아닐까, 이제야 내게 조그마한 선물이라는 것을 쥐여준 것이 아닐까, 하고.
"그다음은, 설국(雪國). 설국(雪國)의 상징색은 흑색이고, 황태자는 민윤기, 왕자는 정호석. 둘은 서로 배다른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아.
아마 설국(雪國)의 황자가 황태자의 자리엔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 황자의 성격이 유명할 정도로 활발하고 착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또, 설국(雪國)의 황태자는, 음- 너와 설국(雪國)저하의 이야기를 꺼내자면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자면 설국(雪國)저하는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싫어하는 사람 중 한명?"
"너랑 그렇게 깊은 연정을 나눠놓고, 수국(水國)이 몰락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너를 버렸거든."
"...깊은 연정?"
"응. 이 때문에 사실 난 처음에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다행이다. 싶기도 했어.
네가 설국(雪國)저하를 여전히 연모한다는 게, 난 죽어라 싫었으니까."
"..."
"이것도 다 네가 기억을 잃었으니 해주는 말이야.
다시는 그 설국(雪國)저하를 연모하지 말라고."
한순간 단호해진 지민의 눈빛에 얼떨결에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상징색이 흑색이라면, 아마 민윤기라는 자는 전에 봤던 그 흑색 옷의 사내일 텐데. 서로 연정을 나눴다니. 그렇게 차가운 눈빛을 가진 사람과 내가? 아- 그래서 그날 그렇게 눈물이 났던 건가. 기억 속엔 없는데 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연정.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흘러내리던 눈물. 지금도 갑작스레 가슴 속에 뻐근하게 저린 듯해 가슴을 한 두 번 두드렸다.
'그래도 옛정이라는 게 있으니.'
사내가 뱉었던 이해 가지 않았던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 옛정이라는 게 정말 연정을 말하는 것이었다니.
"그 다음 화국(火國). 화국(火國)의 상징색은 홍색이고, 황태자는 김남준, 황자는 김태형. 둘은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유명해. 서로 겸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유명하고. 그 이유는, 황태자 자리에 대한 싸움이라기보단 그저 성격차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화국(火國)의 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건 분명하니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저잣거리를 떠도는 걸 즐기며, 황실에 얽매여 살 수 없는 사람. 그게 바로 화국(火國)의 황자 김태형이거든.
그리고 화국(火國)의 황태자 김남준. 화국(火國)저하는 어찌 보면 좀 안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어. 설국(雪國)이 우리 수국(水國)을 배신한 뒤 강국이 되었을 때, 얼떨결에 강국이 되어버린 화국(火國)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이라곤 화국(火國)저하밖에 없었고, 설국(雪國)에게 버림받는다면 금세 다시 약국이 될까 두려웠던 화국(火國)의 백성들은 그 모든 짐을 화국(火國)저하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고 해.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곤 화국(火國)저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지, 미련하게도. 그 부담 때문에 화국(火國)저하는 네 나라 중 가장 잔인한 군주가 되었다고 해. 뭐, 실제로 보진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김남준, 김태형.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화국(火國)의 상징색이 붉은색인 걸로 보아, 붉은 옷을 입고 있던 그 여인 또한 화국(火國)의 여인일 터. 그렇다면, 화국(火國)과 설국(雪國)의 우호 관계엔 그 여인과 설국(雪國)저하의 혼인이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풍국(風國). 풍국(風國)의 상징색은 백색이고 황태자는 전정국. 풍국(風國)은 알다시피 터도 좁고, 넷 중 가장 약국이라 할 수 있어. 그럼에도 풍국(風國)이 사국(四國) 안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풍국(風國)의 저하가 바로 풍국(風國)과 설국(雪國) 사이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설국(雪國)과 수국(水國)의 전쟁 후, 나라 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굳이 터의 구분은 두지 않지만, 절대 사국(四國)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거든. 그건 사국(四國)의 힘이 다른 만큼, 돌연변이가 나왔을 시, 그 힘을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사국(四國)에서 합의를 통해 만든 법인데, 그래서 풍국(風國) 저하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땐, 풍국(風國) 저하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많았대."
"물론, 풍국(風國) 전하의 완강한 반대로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풍국(風國) 저하는 강력한 힘을 쓰지 못한다고 들었어. 그 강력한 힘이 사국(四國)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질 시, 바로 사형에 처하겠다는 풍국(風國) 전하의 약조가 있었거든."
상징색이 백색. 순백의 색을 떠올리자마자, 진한 향을 몰고 왔던 그 사내가 머릿속을 잠식한 듯, 순간 그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보던 저린 눈동자, 여려 보이면서도 강인하던 얼굴. 나를 보던 젖은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아까와는 다른 아픔이 가슴 안을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고,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처음 느껴보는 그 가슴 저린 고통에,
인생을 내내 버텨내다 포기했던 내가,
미련하게도 다시 한번 주어진 생을 또, 버텨내려하고 있었다.
*
'절대 혼자 밖에 나가선 안 돼.'
'안 그래도 수국(水國)의 공주가 자살기도를 했다는 소문 때문에 위상이 많이 떨어져 있는데,
기억도 잃은 네가 혼자 길가에 돌아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혹여나 진정 밖에 나가고 싶다면, 꼭 나와 같이 나가야 해. 내 말 알겠지?'
지민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곧 지민의 목소리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에 더욱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선, 홀로 길을 걷는 것이 더욱 도움될 것이 당연했다.
저잣거리는 내가 살던 곳의 시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많은 사람이 붐비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며,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보다, 얼굴을 가린 천을 조금 더 꼼꼼하게 여미며 발걸음을 옮겼다.
홍색, 청색, 흑색, 백색.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색의 옷들이 금세 눈에 띠었다. 수국(水國)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 갑작스레 일어난 전쟁. 수국(水國)과 설국(雪國)의 전쟁으로 인해 모든 나라가 통합되었다던 지민의 말이 떠올랐다. 그 덕에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서로 다른 나라의 뒤에 서 있지만, 모두 같은 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고. 그게 독이 된 건지, 아니면 약이 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던 지민의 얼굴 또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가씨, 여기 이것 좀 보고 가."
"각 나라에서 다 힘들게 구해온 거라, 빛깔이 참 희귀해."
갑작스레 내 손을 부여잡는 할머니의 손길에 흠칫 놀라 손을 뿌리치며 뒷걸음질치다, 이내 아-하는 바보 같은 탄식과 함께 온기가 남아있는 손을 매만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나도 몰래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할머니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고, 그에 괜히 침착하자. 침착해. 하며 자신을 위로하곤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서자, 그런 나를 보던 할머니께서 금세 표정을 풀고는 고급지게 장식된 함을 들이밀었다.
"자, 이거 봐봐. 홍색은 화국(火國), 청색은 수국(水國), 흑색은 설국(雪國), 백색은 풍국(風國).
다른 장신구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나라의 원과 한이 담긴 물건이야, 이게."
"이것들 전부, 사국이 가장 혼란스럽 때 만들어진 보석으로,
만들 때 물 대신 황제의 눈물을 담아서 만들었단 이야기가 있지."
"그래서 절대 빛이 바래지 않고,
자신의 나라가 강해질 때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내."
할머니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하며 고개를 숙여 팔찌를 바라보자, 흑색이 가장 강한 빛을, 백색이 가장 약한 빛을 띠고 있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현재 설국(雪國)이 가장 강국이고 풍국(風國)이 가장 약국이니, 정말 할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하나 살 텐가-?"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오묘한 눈동자를 바라보다, 다시 장신구들로 눈을 돌렸다. 사국(四國)의 물건이라면, 그것도 진정 황제의 한이 깃든 물건이라면, 그 물건을 사는 것 뿐만 아닌 만지는 것조차 정말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지민이 안다면 분명 기겁할 문제이기도 했고.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눈에 띄는 팔찌를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부터 자꾸 눈에 띄는 게, 어렸을 때 부터 민감했던 촉이 자꾸만 말하는 듯했다. 저것은 반드시 사야 한다고.
"물건의 교환은 그걸로 하기로 하지.
아가씨 팔목에 끼워진 흑색 팔찌."
내가 돈이 없는 걸 알았던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소리인 건지. 할머니의 눈길이 푸른 옷에 가려진 나의 손목으로 향했고, 나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팔에 끼워진 흑색 팔찌가 눈에 띠었다. 처음부터 팔목에 끼워져 있었던 팔찌. 괜스레 엄지손가락으로 팔찌를 한 두 번 매만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민조차 이 팔찌의 행방을 몰랐던 걸로 보아, 이 팔찌는 수국(水國)과 별로 관련된 것이 아닐 터,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이 그저 저잣거리를 떠돌다 산 팔찌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기로 한 모양이군."
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할머니께서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쭈글쭈글하게 세월이 깃든 손가락이 내게 내밀어 졌고, 그에 내 팔에 끼워져있던 흑색의 팔찌를 꺼내 할머니께 건넸다. 햇빛에 비친 흑색의 팔찌가 왠지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던 팔찌를 바라봤다.
"그래, 그래서 무슨 색의 팔찌로 할 텐가?"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팔찌를 손가락에 끼운 채 햇빛 아래에 비추며 저잣거리를 걸었다. 햇빛에 따라 이리저리 돌려보면 신기하게도 자꾸 색이 바뀌는 것만 같아 신기했다. 어느 쪽으로 비추면 아주 밝은 색을 띠었다가, 또 반대쪽으로 비추면 참으로 어두운색을 내었다. 이 반지가 강국과 약국을 나타낸 다라- 그게 진짜일지 가짜일진 몰라도, 영롱한 빛깔로 보건대, 이 팔찌가 그저 평범한 팔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걷다 순간 물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자, 오른쪽 끝편으로 이어지는 우물이 보였다. 저잣거리의 끝자락에 있는 우물. 저게 바로 지민이 말했던, 내가 자살을 했다던 그 우물인듯했다. 나도 몰래 홀리듯 우물가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뚫린 우물의 속이 보였다. 저기에 내가 떨어졌다고-? 살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깊은 우물이었다. 지민이 달아줬던 머리핀을 하나 빼 우물 속으로 집어 던지자, 한참이 지나서야 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찔한 높이에 괜스레 겁을 먹어 우물가에서 멀리 떨어지려는데, 순간 팔을 이끄는 강한 힘이 느껴졌고, 아-!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맞네. 수국(水國)의 수치.
수국(水國) 공주."
내 팔을 이끈 사내는 나와 같은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고,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으며, 술에 취한 듯 술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몸이 비틀비틀- 쉼 없이 흔들렸다.
"으으-"
"내가!!!!"
"..."
"내가, 내가. 내가 너 때문에 이러고 살아. 알아?
내가, 무능하다 못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어 먹은 너희 때문에, 이러고 산다고."
술에 취한 붉은 얼굴이 순간에 화로 물들었고, 꽉 잡힌 팔목을 풀지 못해,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그 남자를 바라봤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누군가 나를 구해주러 올 텐데,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으니 앞이 컴컴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거라던 지민의 말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떠다녔다. 설국(雪國)에게 배신당한 수국(水國), 그리고 그런 설국(雪國)의 황태자에게 버림받아 놓고도 그 사내를 잊지 못해 목숨을 끊으려 했던 수국(水國)의 공주. 만약 내가 수국(水國)의 사람이었더라도, 좋지 않게 보였을 건 당연했다. 한 나라를 통찰하고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서서, 한 남자를 잊지 못해 백성을 버려둔, 비겁하고 철없는 공주. 그게 그들 눈에 비칠 수국(水國)공주의 모습일 거다.
"아아- 너, 이 우물에서 자살하려 했다 했지?"
도망갈 구석을 찾기 위해, 남자의 풀린 눈을 피해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순간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고,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흠칫- 놀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듯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한 남자의 얼굴에 어둡고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겁에 질려 도망치기 위해 손목을 비틀기도 전에 한 손을 더 보태 내 손목을 꽉 잡은 남성이 양손 가득 힘을 주어 나를 밀었고, 허우적대며 무언가를 잡기 위해 팔을 앞으로 쭉- 뻗었음에도, 우물 너머로 기울어버린 몸은 손쉽게 우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제발, 그냥 죽어버려."
'차라리, 죽지 그랬니?'
왠지 처절하게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가,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겹쳐져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속에 떨어진 몸은, 물속으로 차가운 물방울을 튀기며 깊숙이 빠져들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죽어버려.
너따위가 도대체 왜 사는 거야.
이전에도 많이 들었던 말들이 더욱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없어 괴롭게 막혀버린 코가 아프게 저렸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살려달란 의미로 이리저리 휘둘러봤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곳에서 누군가 내 손짓을 들을 리가 난무했다. 점점 더 밑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몸에 힘이 풀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 진짜 내 모습이나, 지금 여기에서 내 모습이나, 어디든 사람들은 전부 내가 죽길 바라고, 난 죽길 원했으면서 또 살고 싶어하고. 도대체 갑자기 또 왜 난 살려고 발버둥쳤을까. 내 근처에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내게 다정히 말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 새로운 환경에 들떠서?
어느 쪽이든 내가 바보 같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놓고 어떻게 또 살고 싶어해, 미련하게. 차라리 이대로 그냥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으로 온몸에 힘을 풀자,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졌고 복잡하던 머릿속 또한 깨끗하게 비어버렸다. 몸이 끝없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점점 나른해져 가는 몸에, 뜨고 있던 눈을 감곤 허우적대던 팔을 내려놓으려 하는데, 순간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목이 타는 듯 아려왔다.
"아으윽-"
물속에 갇혔음에도, 미칠 듯 아려오는 목에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꺽꺽거리며 뱉어내는데도 고통은 나아질 기밀 보이지 않아고, 뜨거워진 몸도 점점 불에 타는 듯 아파지기 시작했다. 마치 불구덩이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차가운 물속에 있음에도 온몸이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고통에 찬 몸부림으로 물을 휘저으며 잠긴 목소리를 뱉어내던 찰나,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물에 파묻혀가던 몸이 떠올랐고, 그렇게 우물의 물을 가로질러 우물 밖으로 벗어났을 때, 내 몸이 도착한 곳은 한 사내의 품속이었다.
"일국의 공주에게 이런 처사는 미안하다만-"
"상황이 너무 급해서 말이야."
처음보는 사내였다. 새빨갛게 붉은 머리를 보면 분명 화국(火國)의 사람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흑색의 옷을 입은 사내. 나를 품에 안은 사내가 나를 한번 내려다 본 뒤 더욱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고,
사내의 품 속이 매우 뜨겁다고 느끼기도 전에 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암호닉은 5회때 까지 받고 총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ㅎㅎ
쓰다보니 오글거리기도 하고 이게 맞나싶기도 한데...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ㅠㅠㅠㅠ
어제 밤을 샜더니 꼴도 말이 아니고 글도 이상하게 써지는 것 같고. 빨리 자야할 것 같아요ㅠㅠ
그럼 독자님들,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하셨고 좋은 꿈 꾸시길 바랄게요!!ㅎㅎㅎ
다음 회 때 봬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