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그 누구보다 힘겹게 살아왔다 싶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따위 삶을 이 정도 살았으면 그 죄가 무엇이든 얼마나 중대한 죄이든, 이제 그만 이 삶을 끝내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시린 겨울 차가운 물 속에 빠져서도, 난 단 한 번도 괴롭다 생각하질 못했다. 점차 어두워져 가는 심해 속에 몸을 담그면서도, 내 삶에 단 하나 주어진 숨을 빼앗겨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단 하나 두려웠던 게 있다면, 이 심해를 자유롭게 유영한 뒤, 다시 한번 세상 속에 버려질까 봐. 그 지독한 곳에서 다시 한번 눈을 뜨게 될까 봐, 난 그게 두려웠지, 그 외의 것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 그래서 안타깝게도 내가 세상에서 다시 한 번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 보는 사내의 검은 옷자락을 붙들고 그리 서글프게 울음을 터뜨렸다. 왜 나를 살려낸 거냐고, 알지도 못하는 사내를 탓하고 또 탓했다. 그래서 보질 못했다. 나를 보고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남자의 차림새가, 내가 지금껏 봐왔던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나를 에워싸던 그 지독한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외향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지금 내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을 참 늦게야 깨달았다.
溺愛
그대의 옷깃에 다른 향이 스쳐 지나간다.
그대의 입가에 다른 미소가 걸려있고, 그대의 눈 속에 다른 여인이 들어있다.
괜찮다. 스스로 다독이는 마음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온다.
그대가 만든 그 차디찬 바람이 결국 내 마음을 굳게 얼려버리고,
그 굳은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작은 틈을 만들어낸다.
틈 속에 들어온 약한 마음 하나가 마음 전체를 망가뜨려 버린다.
그대가 만든 나는 이리도 약하고 여리다.
이전의 내가 허락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모두 내 것이었으면 했다.
처음 느껴보는 시샘이 살갗 하나하나를 파고들었고, 결국 나는 잠식 되어버리고 만다.
나를 더욱 연모해달라고, 나를 더욱 품에 꽉 안아달라고.
여인으로서 하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차마 하지 못할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대를 연모했고,
또 죽을 만큼 사모했으니.
수국(水國) 황녀 曰
깨질 듯 저린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부드럽게 흘러들어오는 꽃 향이었다. 독하지도, 그렇다고 옅지도 않은 향. 바다를 닮은 것 같다가도 하늘이 떠오르고 하늘이 떠오르다가도 채 피지 못한 여린 꽃이 생각나는 향. 꽃을 좋아했기에 많은 꽃을 겪어봤음에도 처음 맡아보는 향이 은은하게 방 주위를 돌자. 온몸이 나른하게 풀려왔다.
점차 옅어진 고통의 세기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봤을 땐,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소재의 기다란 옷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고, 순백의 하얀 이불보가 가슴 위까지 반듯하게 덮여있었다. 수많은 장신구가 머리며, 팔, 손을 장식하고 있었음에도 무겁고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차라리, 죽지 그랬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고,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뒤집혀버렸다. 공기의 흐름이 변한 건 여인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여인의 등장 이후, 곁을 맴돌던 부드러운 꽃향이 언제 있었냐는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순간, 괜찮아졌던 머리가 다시 고통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주변을 돌아보자, 내 주위를 감싸주던 꽃향이 진정 거짓이었다는 듯. 꽃잎 하나도 없이 싸늘한 방 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긁힌 듯 아려오는 목으로 소리를 내려 노력했으나 물속에 잠긴 듯 갑갑한 소리만이 튀어나올 뿐, 제대로 된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런 나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여인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와, 길게 뻗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죽는시늉을 낼 거면 제대로 할 것이지.
수국(水國)의 공주가 물속에서 자살이라.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니."
"관심은 받고 싶고, 죽긴 무서웠나 봐?
그래도 그렇지. 수국(水國)에선 도대체 무슨 죄로, 이런 개망신을 당해야하니. 안 그래?"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자 분을 바른 하얀 얼굴 위로 띤 분홍빛 홍조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입을 가리려 치켜든 손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반지가 유난히 눈에 띠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 안에는 은은하게 붉은빛이 도는 맑은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고, 끝이 둥글게 말린 코는 오뚝하게 쏟아있었으며, 붉게 바른 입술은 끝이 올라가 아름다운 형색을 띠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누구냐 묻고 싶은데 막혀버린 목소리는 도움이 되질 못했다. 무거운 팔을 들어내 뜻을 알아달란 의미로 이리저리 휘젓자, 여인의 얼굴 위로 떠오르던 가소롭단 웃음이 더욱 박차를 더하더니 순식간에 싸늘히 식어버렸다.
"그런 추잡한 꼴을 보이면 안쓰러워서라도 다시 널 연모해줄 줄 알았니?"
"멍청하긴. 왜 너만 끝까지 알지를 못해.
내 지아비는 죽는 한이 있어도, 너를 연모할 리 없대도."
여인의 눈 위에 추악한 질투의 꽃이 피어났다. 그녀의 지아비가 누구인지, 갑자기 무슨 은애를 말하는 건지, 난 하나도 아는 게 없는데 여성의 목소리는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나오질 않고, 앞에선 여인은 내 뜻을 알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고. 답답해서 가슴을 툭툭- 치는데,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라졌던 꽃향이 다시 방 안을 부드럽게 맴돌았다. 포근한 향에, 긴장 되어 있던 몸에서 하아- 하고 옅은 한숨 소리가 튀어나왔다. 짙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와 순백의 옷을 입은 사내. 주위를 맴도는 꽃향이 점점 짙어지는 걸 보니, 둘 중 누군가가 이 향을 몰고 온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발소리의 끝이 내 곁을 향하고, 내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그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더니 흑색 옷을 입은 사내의 품에 폭-하니 안겨버렸다. 사내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나, 여인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사내의 손이 퍽 다정했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금세 내 앞으로 다가온 백색 옷의 사내가 그 앞을 막아서고 섰다.
"괜찮아?"
담담하게 뱉어내려 하는 목소리가 사내의 눈과 마찬가지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사내의 떨리는 목소리를 따라 꽃의 잔향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처음 눈을 뜨던 순간부터 내 주위를 맴도는 꽃 향의 주인은 바로 이 사내인 듯했다. 여려 보이는 둥근 눈 속엔 어울리지 않는 진득한 슬픔이 가득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과 마주한 사내가, 대답 없는 나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내는 그가 풍기는 향과 참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바다를 닮은 것 같다가도 하늘이 떠오르고 하늘이 떠오르다가도 채 피지 못한 여린 꽃이 생각나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고,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많이 했어."
"수국(水國)의 사람들은 절대 물에 빠져 죽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에 빠진 널 구한다고 물속에 들어갔고."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정신 잃은 너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형이야."
그러니까, 그런 표정 좀 하지 마. 제발.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고개를 푹- 숙여버린 사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주변을 맴돌던 꽃향이 점점 물에 젖은 듯 슬픈 냄새를 풍겼다. 사내의 슬픈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고, 그 아파 보이는 눈동자를 어루만지기 위해 나도 몰래 무거운 손을 사내의 눈가로 가져가는데, 여인을 품에 안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정국이 넌,
여전히 그 아이를 많이 아끼는구나."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짙은 검은색 머리 아래로 길게 뻗은 흑색의 옷이,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 발맞춤에 맞춰 부드럽게 흩날렸다. 터벅터벅- 일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다가선 남자가 백색 옷의 남자를 바라봤다. 지나치게 흰 피부가 입고 있는 검은 옷과 대비되어 그의 차가운 인상에 한 몫을 더하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돌려 흑색 옷의 남자를 바라보자, 왼쪽 팔목에 끼워져 있는 푸른색 팔찌를 느릿하게 매만지던 그가 나를 바라봤고, 순간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네가 한 일을 왜 내가 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내 마음이 그리 돌아가는 것도 아닐 텐데."
"안 그래?"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며 뱉은 사내의 말에, 백색 옷을 입은 사내의 시선 또한 그를 향했고, 그럼에도 흑색 옷의 남자는 끝까지 나를 바라봤다. 옷과 마찬가지로 검게 물든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게 물든 사람인 듯했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시선을 내렸고, 그 시선을 따라가자 아까 그가 매만졌던 푸른 팔찌가 눈에 가득 찼다.
"네가 진정 한 나라의 공주라면, 이젠 이리 철없는 짓,
그만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설령 설국(雪國)이 무너지고,
화국(火國)이 멸망하여, 수국(水國)의 세상이 돌아온다 하여도.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거."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누르며 뱉어지는 말들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려왔다. 나를 바라보는 흑색 눈동자는, 분명 내 기억 속에 없음에도 마치 있는 듯했고, 팔찌를 매만지는 기다란 손가락마저 어두운 기억 저편 속에 숨겨진 듯, 왠지 본듯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이 사내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인상을 찌푸리고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저 차가운 눈동자를, 저 흑색 옷을, 분명 나는 본 적이 있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외치고 있었다.
"수국(水國)을 무너지게 하는 게.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그래도 옛정이라는 게 있으니."
사내의 말이 끝난 뒤, 잠시동안 방 안에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고, 그 후 뜻 모를 눈물이 나도 몰래 볼을 타고 뚝- 하니 떨어져 내렸다. 베개보에 둥근 자국을 남긴 눈물이 시발점이 되어 쉼없는 눈물이 얼굴을 적셔왔고, 나도 이해 못 할 상황에 놀라 아무런 대처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떨어지는 눈물방울들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순간 코끝이 저릴 정도로 강한 꽃내음이 나를 덮쳐왔다. 분명 백색 옷을 입은 남자의 소행이었다. 끝없는 물이 차올라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붉어진 눈을 한 채 나보다 더 슬퍼 보이는 표정을 한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고,
'울지마.'
비록 입 모양일 뿐이었지만, 여린 얼굴과는 달리 단호한 그의 모습에 나도 몰래 울음을 그친 붉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주변을 맴돌던 지독한 향이 그제야 은은하게 가라앉았다.
서로를 마주한 붉은 눈동자와 그 사이에 놓인 차갑도록 시린 눈동자. 분명 처음 보는 사람임이 틀림없는데, 눈물을 담은 목이 쓰릴 정도로 나를 울게 하는 사내.
내가 떨어진 그 곳은 참 이상한 곳이었고, 또한 나를 미치도록 울게하는 곳이었으며, 내가 죽을만큼 사랑했던 이를 담은 곳이었다.
*
조금 더 늦게 찾아올 예정이었는데, 구독료 무료라는 말에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마네요ㅎㅎ
웨일리언 끝난 게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데 벌써 새글을 쓰고 있더라구요...
아직 구성만 마무리 했지 준비가 되지 않은 글이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싶긴 한데,
제가 참을성이 없는터라, 결국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어요...ㅎㅎ
웨일리언 번외편이나 메일링은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구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공지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세계관이 있는 글은 처음이라 많이 걱정되기도 하는데, 그래도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ㅎㅎ
부디 예쁘게 봐주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