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후 적막한 시간이 흘러갔다. 김성규가 내 말을 듣긴 들은 걸까- 우현은 제가 업고 있는 성규가 정말 성규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평소의 김성규라면 이 미친놈이 뭐라구하는거야-라면서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을 솜주먹으로 여기저기 맛사지를 해줬을텐데.
혹, 아파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건가? 그래, 아파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조금 더 빨리 걷기로 했다. 수업진도 못따라갈까봐 아픈 것도 참는 애를 데리고 나왔으니까, 일단은 김성규를 양호실에 데려다놓는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게 성규를 생각하는 남우현 최대의 배려였다. 게다가 업어주기까지 했잖아? 그도 그렇지만, 충동적이긴 했어도 나름 큰맘먹고 했던 고백을 어쩐지 흐지부지하게 넘겨버린 것같아 우현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김성규가 아프니까, 나중에 다시하자. 고백. …그리고 열 걸음은 내딛었을까? “억…!” 우현의 고개가 탁-하고 젖혀지자 입에서도 별안간 턱 막히는 외마디가 삐져나왔다. 난데없이 우현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성규때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머리채를 잡힌 남우현은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고 왜, 왜, 왜, 뭐가 불만이야! 우현이 성규에게 다급하게 묻자 한층 지루하고 텁텁해진 성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도라라는 게임이있어….” …넌 모르지-? 한껏 잠긴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게임얘기다. 잠시나마 제 고백에 대한 성규의 대답을 기대해던 우현은 제 자신을 속으로 애써 다독였다. “무 머리채를 이렇게 잡고, …뽑는 게임이거든?” 성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우현의 입에선 하이톤의 비명이 절로 질러졌다. 아니, 아픈 사람 맞아?
“……????”
“그 무가 너를 닮아서, 맨날 내가 미친듯이 뽑고 그랬는데…….” 말꼬리가 맥아리없이 늘어진다. 듣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딱 그만큼.
“…… 나― 지금은 무말고 니 머리채 뽑고 싶어….”
우현은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지금 뭐가 잘못된거야? 왜 내 머리채를 뽑고 싶다는거지? 혹시 내가 방금 한 고백때문에? 단순한 우현의 머리로는 이 의문에 대한 결론이 고작 이정도. 김성규가 나를 싫어한다. 그래서 차는거다.-
…… 에휴. 아-, 알았어 미안해, 근데 일단 내 머리 좀 놓지? 빈정상한 목소리의 남우현은 기어코 성규의 손을 머리에서 떨어트려놓고나서야 양호실로 향할 수 있었다.
양호실에 도착하고서는 성규가 약을 받아먹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없었다. 성규는 기운없이 축 처진 얼굴이었고 우현은 그걸 불만스럽게 지켜봤다. 장담하건데, 성규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남우현은 평소처럼 내키는대로 성규를 괴롭혔을거다. 자신의 고백이 김성규로 인해 고작 무 뽑는 게임 따위로 끝나버렸으니까.
성규는 누워 있었고 바로 옆 의자에는 남우현이 걸터앉아 있었다. 말없이 견디기 힘겨운 시간이었는데 마침 양호 선생님이 잠깐 나가셨다. 하얀 커튼 밖에서 마지막으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김성규와 남우현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너 왜….”
“근데 진짜.” 서로의 말이 겹치자마자 둘은 그저 입만 뻥긋거리게 됐다.
너 먼저 해- 우현이 선심쓰는듯한 어투로 던진 말에 성규의 눈썹이 팔자모양을 하고선 꿈실댔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통에 성규의 이마에 곧잘 매달려있던 식은땀이 흘러내리는듯하자 남우현의 손이 기습적으로 성규의 이마에 닿았다. 땀 닦아줄게-
우현의 손끝으로 성규가 움찔거리는 느낌이 전달되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성규의 입이 열렸다.
“왜 나한테 고백했어?”
잠시나마 창밖으로 머물러 있던 우현의 시선이 성규에게로 향하자 어김없이 성규의 입술이 떨어졌다.
왜 나한테 장난쳐?
옹졸한 자존심에 우현의 고백을 고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순전히 성규의 탓이었지만 성규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저를 괴롭히던 남우현이 저를 좋아한다니, 어떻게 그래? 설령 좋아할 수 있다고 쳐, 그럼 고백받은나는? 김성규는 어떻게 받아쳐야하지?
넌 내 고백을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데-? 한숨이 비집고 나오던 남우현의 입이 한참을 뜸들이다 뱉어낸 말에 성규도 잠시 동안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왜 남우현고백을 고백으로 못받아들이나- 속으로 곱씹던 말은 끝끝내 입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굳어버린 우현의 얼굴을 길게 마주하지 못하고 성규는 그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규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마구 요동쳤다. 왜-? 왜 저는 남우현 표정하나에 이토록 반응하는걸까.
성규가 아예 등을 돌려버린 통에 우현은 그 원망스런 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이나 터트려야했다.
“내가 너 좋다는데, 고백 좀 하면 안돼?”
“…….”
“…….”
“…….”
“그래- 미안하다. 고백해서.”
우현은 대답없는 성규에 대고 더는 뭐라 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못참고 고백한게 잘못이었지. 우현이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저 의자가 바닥에 끌려서 나는 소리인데도 성규는 그게 또 우현이 짜증내는 소리인것같아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현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배짱이 없었다. 고백한것도 보기좋게 차였는데- 그런식으로 제 뒷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양호실을 나섰다.
어? 나갈땐 둘이 나가더니 왜 남우현 혼자 와? 김성규는? 쉬는시간이라고 북적거리는 교실 틈을 비집고 자리에 무사히 착석한 남우현에게 명수가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아 몰라- 신경질적인 남우현의 목소리가 소음사이로 섞여들어가자 얘 왜 이러냐는듯한 얼굴로 성열이를 쳐다본다. 열이 입장에서도 그런 남우현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일주일 동안 쩔쩔매다가 간신히 화해했는데… 화해한줄 알았는데, 또 저렇게 되서 와버렸으니. 아, 그럼 또 두 덩어리가 되어서 다녀야하나 우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열이가 성난 목소리로 남우현에게 쏘아붙였다.
“아 진짜, 너네 또 싸웠냐?”
“어, 싸웠어.”
아나, 이 새끼가 진짜- 딱딱하고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우현의 대답에 성열은 화가 거의 머리꼭대기까지 차버린 기분이었다. 김성규랑 또 싸우고 온 주제에 이새낀 뭐가 이렇게 당당해? 명수는 옆에서 말리느라 진땀 빼는데 평소 욱하는 성질로 유명한 성열이가, 자제하란다고 자제할 턱이 있나.
뭐야? 또 싸우고왔대?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열이의 목소리를 용캐 알아들은 이호원이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뒤이어 따라온 동우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그래, 두 사람이 싸웠다는데 동우 마음이 편할리가.
“나랑 김성규가 싸운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 구경났냐?”
남우현의 꿍얼거리는 목소리에 천하의 이호원도 그 자리에서 할말을 잃고 바로 고개를 내젓는다. 불만 가득한 지금의 남우현을 감당해낼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차라리 김성규가 있었더라면? 평소의 김성규였으면 이새끼 저새끼 나쁜 새끼 나무새끼하면서 갖은 불쾌한티는 다 냈을텐데.
빨리 김성규나 데리고 오라며 저를 닦달하는말에도 남우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꾹 다물려있던 남우현의 입이 고집스럽게도 열렸다.
“이번엔 내가 잘못한거 아니니까 먼저 사과하는일 없어. 그러니까 니들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아- 또 뭐라 짖어싸는거야 개새끼가. 이성열이 짜증섞인 발길질로 책상을 툭- 차버리자 남우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곧장 열이에게로 날아든다. 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매섭게 마주치면 옆사람들만 더 애가 탈 뿐이었다.
성열아 신경 끄고 가자 그냥- 내내 옆에서 성열이를 어르던 명수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무작정 손목을 잡아 끌고가버린다. 호, 호원아 우리도 가자- 동우까지 호원이의 팔뚝을 붙든채 도망치듯 가버리면 남아있는 사람은 우현 혼자뿐. 말이 자꾸 울퉁불퉁하게 나가는건 저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작 돌아버릴 것 같은건 이성열이 아니라 남우현 자신이었다.
일단 책상에 엎드렸다. 정확히 뭐가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어? 김성규, 생각보다 빨리 왔네?”
“답답해서 그냥 손 따고 왔어. 체 한거 그냥 내려가더라.”
김성규-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삥 둘러보다가 거의 본능적으로 김성규를 발견해낸 우현의 눈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제법 성규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듯 심통난 얼굴로 책상에 확 엎드려버린다. 제 옆은 김성규 책상이라, 모든것이 성규를 양호실로 데려가기 직전 상태 그대로였다. 아까 전만해도 끙끙거리면서 울렁거리는걸 억지로 참아내던 김성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것같아 우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뭐- 갑자기 왜 생각나는건데 쓸데없이? 김성규 이제 안아프다잖아. 그러면서 저를 스스로 진정시키며 아른거리던 성규모습을 꺼트리자, 눈앞에 인영하나가 멀뚱히 서있는게 보였다. 보나마나 김성규겠지 뭐, 우현은 아까 성규가 양호실 침대에서 그랬던것처럼 대놓고 고개를 홱 돌려 누웠다. 제가봐도 유치한 짓이었지만 지금 우현에겐 김성규를 마주할 용기가 남아있질 않았다. 이렇게 애처럼 굴기라도해야 속이 편했다. 현재로썬 그랬다.
서걱서걱- 성규가 아까 못다했던 필기를 써내려가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수가 없었다. 우현은 귀를 후볐다. 서걱서걱, 더 잘들린다. 아, 이러려고 귀판게 아닌데- 우현은 성규를 등진채 오만상을 지었다. 아까 제가 성규가슴을 그렇게 후벼파고선 교실로 도망쳐왔는데, 자신은 김성규 앞에서 그렇게 쿨한척을 했는데…!!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계속 생각해봤거든?- 성규가 필기를 멈추곤 마치 남우현 들으라는듯 말을 꺼냈다.
“내가 아까 복도에서 그랬잖아, 나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고.”
쫑긋- 내심 기다려왔던 성규의 목소리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터져나오자 우현의 상체가 벌떡 일으켜졌다. 뭐야, 그래서? 더 말해봐! 우현은 성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속으로만 경박스레 외쳐대고 있었다. 아직까진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이 다음에 이어질 성규의 말은 아직 모르는거니까.
“그게 아마, 나도 너랑 똑같아서 그런걸지도 몰라.”
“……?”
여전히 필기공책에 시선을 두고 있는 김성규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이상한 뉘앙스가 강하게 풍겨왔다. 지금의 남우현도 저 말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었다. 맞아,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너도 날 좋아… 헐?
“그래도……, 너 닮은 무는 계속 뽑을거야. 너 새끼 미울 때마다.”
남우현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