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w. 채셔
#Prologue
내가 아주 어릴 때였을 거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아빠를 기어이 따라나섰고, 그 자리에서 겨우 열 살이 된 남자 애를 만났다. 남자 치고는 예쁘장한 얼굴에, 꽤나 성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표정에 괜한 무게감이 실려 있던 터라 나는 남자 애의 집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 애는 성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집에 인공 연못도 있었고, 사람들도 엄청 많았고, 정원도 있었고, 또 아빠가 좋아하는 골프 연습장도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 애는 이 집의 왕자 같았다. 아빠들끼리 얘기를 한다며 집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남자 애와 나만이 연못 앞에 남게 되었었는데, 그 때 남자 애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넌 나랑 결혼하게 될 거야.
-싫어, 난 왕자님이랑 결혼할 거야!
-내가 너네 집 백마 탄 왕자님이 될 걸.
남자 애는 내 말을 비웃으며 염세적인 말투로 내게 대답했다. 왠지 나를 깔보는 듯한 말투에 괜히 남자 애가 싫어져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가만히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괸 채로 나는 한참동안이나 연못 안의 잉어를 관찰했다. 남자 애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거였다. 아직 아빠에게 업힐 정도의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내용이었으니까. 이내 아빠와 아저씨가 웃으며 집에서 나왔다. 둘은 악수를 했고, 나는 계속 잉어에다 시선을 뒀다. 아무리 헤엄쳐도 이곳은 연못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마냥 돌에 제 머리를 연신 찍어대는 잉어를 조용히 지켜보던 내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인사하렴.
-……으응?
-네가 커서 결혼할 정국이다. 전정국.
아빠는 이내 나를 일으키고 인사를 시켰다. 남자 애가 웃고 있었다, 마치 마트에서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애처럼. 그리고 번뜩이는 남자 애의 얼굴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이 성 안에서 얼른 도망 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유리구두를 두고 온 신데렐라일 뿐이었다. 유리구두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신부
갑작스러운 상대 후보의 언론 공격은 아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졌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아빠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여론을 얻었다. 그런 아빠를 구한 것이 전 가(家)의 회사와의 결탁이었다. 그러므로 제가 백마 탄 왕자가 될 것이라던 터무니 없는 말은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 말이었다. 아빠는 순식간에 긍정적인 여론으로 갈아탔고, 장애우 입양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로 상승곡선을 탄 아빠는 지금껏 승승장구하며 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탄탄한 의원이 되었다. 또한 아버님이 회사에서 명예회장 직으로 물러난 만큼, 전정국이 젊은 나이에 사장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전정국은 백마 탄 왕자의 정도가 아니었다. 전정국이 양 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황제의 위치나 다를 바 없었다.
"제가 안 그랬어요."
"아아, 네가 안 그랬어?"
"네, 언니…."
"누가 언니라고 하래."
나는 무릎을 꿇고 있던 연희의 머리채를 잡아올렸다. 아악, 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전정국은 도대체 연희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며칠, 그러니까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 며칠이 지나면 전의 여자들처럼 연희도 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은 커녕, 연희는 삼일 전에 이 집으로 짐을 들고 들어왔다. …겁도 없이. 전정국은 내게 연희가 제 애인이라고 했다. 그 특유의 얼음장 같던 표정이, -나는 절대 볼 수 없던- 따뜻한 눈웃음과 함께 살살 풀어져 있었다. 나는 그 생각에 머리칼을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이톤의 비명이 내 귀를 찔러온다.
"그만하지 그래."
"………."
"이리 와."
내 손을 멈춘 것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전정국이었다. 머리채를 주욱 잡아당기던 손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연희는 하아, 하고 숨을 밭아냈고, 정국은 그런 연희에게 손짓했다. 연희는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정국의 옆에 붙었고. 열이 뻗쳐서 나는 길게 호흡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전정국을 바라보자, 전정국은 '연희 씨, 내 방에 가 있어.'하고 연희를 제 방으로 보냈다. 이따금씩 연희가 정국의 방으로 갈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추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전정국이 방안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혀를 쯧 차며 들어가려는 전정국의 손을 잡았다.
"지금 들어가면 이연희 죽일 거야."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이따위의 말이었다. 아무렴 좋았다, 전정국을 잡을 수 있다면. 막무가내의 말로 제 발걸음을 잡는 내 행동에 전정국은 어이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잡혀있던 손목을 가볍게 힘을 줘 빼낸 전정국은 내 어깨를 꽉 잡아왔다. 그 악력에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나는 입술 새의 연한 살을 꾹 물며 가까스로 신음을 참아냈다. 살짝 올려다본 눈은 무표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 번 죽여 보든가, 그럼."
"……."
"그 때도 내가 네 백마 탄 왕자님일 것 같아?"
"……."
"까불지 마."
전정국은 곧 허리를 숙여 내게 눈높이를 맞추고는 뚫어져라 내 얼굴을 살폈다. 정국의 얼굴이 시야 안을 채운다. 언뜻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비틀리고날선 그 비소를 보고 있자면,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죄일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이내 정국은 '잘 생각해.'하고 내 머리를 툭툭 손가락으로 밀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전정국은 한 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사랑을 구걸하는 표정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얼굴처럼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에 나른함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신부
"나가, 연희 씨랑 할 거 있으니까."
전정국은 퍽 부드러운 손길로 연희의 머리칼을 쓸다, 그 여린 어깨 선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연희의 방에서 내쫓겼다. 닫힌 방문 안에서 정국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고개를 내렸다가 뒤돌았다. 황량한 집 안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은 왜 이렇게 또 커서. …가끔은 불필요하게 넓은 이 공간이 무더기로 내 목을 죄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연희의 방 앞에 자리한 -웃기지만- 전정국과 내가 예비 부부로서 함께 쓰고 있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혼자서는 이 공간을 이겨낼 재간이 도저히 없다. 곧 나는 핸드폰을 구원의 손길처럼 부여잡고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가씨…?"
"지민아, 우리 집 좀 와. 빨리……."
방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즐거운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얼른 지민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입양아로 우리 집에 들어온 지민과 태형은, 아버지의 홍보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집 밖에서는 아버지가 마음으로 길러낸 자식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태형은 사고로 얻게 된 장애가 있어 더욱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태형의 밤은 하루도 온전한 적이 없었다. 폭력과 욕이 난무하는 밤, 그것이 태형의 밤이었다. 그럴 때마다 귀를 틀어막고 있던 내게 지민은 어떤 동요를 불러주었었다.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지민의 노래만 들으면 덜덜 떨리던 몸이 멎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학교 잘 다녀오셨어요?'
'…헤헤, 아가씨다.'
태형과 지민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아버지는 의원님, 어머니는 사모님, 나는 아가씨로 불려왔다. 그래야지만 우리 집에서 태형과 지민이 살 수 있었다. 높고 새된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자 나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 베였는지 주먹을 쥐자 손이 한 번 따끔거렸다. 멍하니 다시 벌어져 피를 뿜어내는 상처를 보다, 침대 시트에 아무렇게나 닦아버렸다. 이 집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금 내 목을 죄는 것 같아 나는 이불을 더 위로 끌어올렸다. 성인의 나이가 되면서 합방이라도 하듯 전정국의 집에 들어오게 된 나는 7년동안 이 집에 갇혀 있듯 살았고, 어쩔 수 없이 전정국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정국은 내게 어떤 애정의 형태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정국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내게 필연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온 걸까. 어디서부터 핀트가 나가버린 걸까.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시트로 그대로 흡수되어 지저분해졌다. 손이 한 번 더 따끔, 하고 아파왔다. 그저 운명처럼 전정국을 사랑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돌아본 나는 미쳐있었다.
신부
"아가씨, 저 왔어요."
전화가 끊긴지 얼마 되지 않아 지민이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지민은 건너방에서 들려오는 전정국의 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이불을 들춰내고 나를 일으켰다. 언젠가 정국의 눈에 들어보겠다는 당찬 포부로 그 입술을 훔친 적이 있었다. 방심한 틈을 타 키스를 했지만, 전정국은 아주 쉽게 나를 밀쳐냈었다. 제 입술에 묻은 타액을 소매로 닦아내던 정국은 나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은 안쓰럽거나, 한심하거나, 애처롭거나, 혹은 모멸스럽거나. 그 표정을 설명하는 단어 중에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민은 나를 차마 안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로 어깨를 헐겁게 잡아주었다. 이내 내 볼을 쓸어주는 손길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민의 뺨을 힘껏 올려쳤다. …이런 동정은 정말 싫었다. 특히 지민과 태형에게의 동정은 더더욱.
"동정하지 마."
"아가씨, 손이 왜 이래요…."
"…네가 알아서 뭐해."
"왜 아픈 것도 모르고 항상 이렇게 다치기만 해요…."
지민의 하얀 뺨이 곧 부어올랐다. 그러나 지민은 이런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되려 내 손을 잡아왔다. 이내 '약 발라야겠다….'하고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리던 지민은 유심히 내 손의 상처를 살폈다. 나는 그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다시 누워버렸고. 지민은 한숨을 쉬다, 의자를 끌어와 침대 곁에 앉곤 흘러내린 내 머릿결을 정리해주었다. 이내 익숙하게 노래가 들려왔다. 즐겨 부르던 그 동요였다. 지민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연희의 소리와 지민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자 괜히 웃음이 났다. 웃음보다는 헛웃음에 가까웠다.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물이 흘러있었다. 지민은 멈칫거리며 어색한 자세로 다시 헐겁게 나를 안았다. 평소 같았다면 금방 밀쳤을 지민을, 이상하게 밀어낼 수 없었다. 지민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허리에 닿았다. 싫지만, 정말 싫지만 지민의 동정이 지금은 필요했다.
"아가씨, 잘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집에 가지 말고 있어."
"네, 아가씨가 잠들 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게요."
언제나와 같이 확고한 말투와 따뜻한 목소리였다. 지민의 향을 맡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온순한……. 어쩜 향도 지민은 지민 같을까. 아무도 없는 정국의 집에서 따스한 온기는 사실상 지민 밖에 없었다. 물론 지민은 호적상 형제니 이 집에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고보면 언제나 무너지지 않게 나를 밑에서 받아준 것은 지민이었다. 괜히 비참해져 입술을 꾹 물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지켜보며 지민과 태형을 호강시켜주겠다 다짐했었는데, 지금은 지민의 동정이나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지민의 손을 잡았고, 지민은 그런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기분 나쁜 꿈에 한참을 시달린 채로 일어나야 했다. 내 옆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민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전정국이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전정국은 신문을 보다가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전정국은 또 그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해 지어주던, 모멸감을 잘생긴 얼굴에 꾹꾹 눌러담은 그 표정. 아까 곁에 있었던 지민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를 두고 어디에 간 걸까. 손을 꽉 쥐자 뭔가 까칠한 것이 닿아 손을 쳐다보았다. 반창고였다. …하지만 약속은 지키지 않았는걸. 결국 나는 또 이 집에서 혼자가 되었다.
"지랄 발광 그만 떨어."
"………."
"연희 씨는 좀 그만 괴롭히고."
의자에 기대어 찬찬히 신문을 살피던 전정국은 툭 내뱉듯이 말해왔다. 정국은 유년시절부터 귀하게 자라와서인지 정말 황제같이 굴 때가 많았다. 정국에게 애인의 개념은 그저 여러 명 소유할 수 있는 장난감 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정국의 아버지가 딱 그랬다. 회장 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시어머님은 안중에도 없이 여느 젊은 여성과 함께 있는 사진이 기자들에게 뿌려지기도 했다. 전정국은 그런 제 아버지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또 그만큼 존경했다. 아빠를 등 뒤로 놓고 정계의 지원을 듬뿍 받으며 이제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시장을 노리는 1등 기업으로 다져놓은 것이 제 아버지였으므로. 전정국은 때때로 시아버님의 사업 수단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야말로 뱀 같은 사람이었다.
"얼마나 갈 건데, 이번엔."
"연희 씨? 안 내쫓을 거야."
"전정국."
"우리 품격 좀 지키자. 너 아가씨잖아, 안 그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전정국이 웃음을 띄며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상상하고 꿈꿔 왔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정국은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이 숨을 떼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