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부턴 김명수랑 이성열 오기전엔 냉장고에 자물쇠라도 걸어놓든가 해야지..."
김명수가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우현이 고개를 저으며 물병의 입구를 꼭 닫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아기처럼 자고 있는 성규의 볼에 쪽쪽, 그리고 마지막에 입술에 쪽쪽 뽀뽀를 한 우현이 벌렁 까진 성규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내려주고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병을 위 쪽에 얹어놓고 문을 닫으려는데 문득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하늘색 비약이 눈에 들어왔다.
" ...... "
한숨을 쉬며 문을 닫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닫기를 한 번, 다시 열었다가 닫기를 또 한 번.그러기를 반복하던 끝에 결국 냉장고 문을 확 열어재낀 우현이 비약을 덥석 집어들었다.
" ...... "
이게 만약 없으면...
" ....... "
우현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비약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게 없어도 아마 성규는 천상으로 돌아가겠지...삼신할매인가 뭔가하는 할매가 또 구해줄 테니깐. 한숨을 쉬며 침대위에 곤히 자고있는 성규를 쳐다본 뒤 비약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중얼거렸다.
" 단단히 미쳤네."
냉장고를 열어 비약을 있던 자리에 다시 올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벌써 토요일이다. 내일이면 성규가 가는데 막상 오늘 무얼해야할지 감이 잡히지않는다.
*
" 성열아."
" 엉 ? "
오늘은 병원가지말자.
집안을 둥둥 떠다니던 성열이 명수의 말에 '왜?'하고 물어왔다. 거기가면 먹을 것도 많아서 좋은데...
"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남우현이랑 성규형 단 둘이 있게 해주자."
" ...그러던가. 그럼 우리는 뭐해 ? "
" 기다려봐."
명수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서랍여기저기를 뒤적뒤적거렸다.
" 찾았다."
폴라로이드 사진기.
몇 달전 여자친구와 신나게 찍어댔던 사진들과 아직 남아있는 필름들이 서랍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성열이 볼까 싶어 얼른 사진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휙 넣은 명수가 가물가물한 조작법에 꾸물거리고 있자 곁으로 성열이 둥둥 날아왔다.
" 뭐해 ? "
" 이게...이렇게 켜는 거였나...버튼이 이건가."
" ...우왁 ! "
갑자기 플래쉬가 번쩍하더니 우이이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을 잡아뺀 명수가 키득키득거리며 사진을 잡아흔들었고 곧 서서히 성열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사진이네 ? "
" 응.즉석 사진기. 오 ! 귀엽게 나왔어."
이건 내가 가져야지하며 책상위에 올려놓은 명수가 아직 뜯지않은 필름들과 카메라를 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 어디가는데 ? "
" 내가 말했었지.남우현은 성규형이랑 몇 백장이나 찍었는데 우린 사진 한 장 없다고."
성열의 손을 잡은 채 막상 밖에 나오긴 나왔는데 갈데가 없다.
" 일단 아파트 앞에서 한 컷. 빨랑 웃어."
" 이,이렇게 ? "
명수가 성열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의 얼굴옆에 붙힌 다음 셔터를 눌렀다. 성열의 표정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이것 역시 귀엽게 나왔다.
" 흠...날씨 좋으니까 공원가자."
" 공원은 맨날 갔잖아."
" 몰라.가자."
그래도 배경은 공원이 그나마 제일 예뻤다.
공원으로 가는 와중에도 계속 성열과 함께,또는 성열이 독사진을 찍어대다보니 어느새 필름이 반이나 줄어있었다.
" ...너무 찍어댔나."
막상 공원에서는 몇 장 찍을 수 없는 양이 될 것 같아 명수는 서둘러 근처 마트에 들렀다. 열 장에 만원씩이나 하는 필름을 넉넉히 사고 푸드코트에 들려 수제 소시지바와 아이스크림을 성열의 손에 들려준 뒤 시끌벅적한 마트를 빠져나왔다.
" 어라 ? 오늘은 분수 켰네. "
가득 껴있던 이끼를 다 닦아내고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우와 ! 우리 사진찍으라고 켜줬나봐 ! "
성열이 시원하게 뿜어져나오는 물줄기를 손으로 툭툭 만져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걸 놓칠리 없는 명수가 셔터를 눌러댔다.
" 여기 앉아봐."
" 왜 ? "
분수대를 배경으로 앉은 명수가 성열을 끌어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아까처럼 성열의 목을 끌어안고 셔터를 누른 명수가 사진을 보며 '뭔가 심심한 포즈인데'하고 중얼거렸다.
" 이성열."
" 응 ? "
" 나 보고 있어봐."
" 이렇게 ? "
" 어."
그리고 사진기를 쭈욱 앞으로 뻗은 뒤 성열의 입술에 뽀뽀를 하며 셔터를 눌렀다. 사진기에서 뽑아져나오는 사진을 확인한 명수가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 이거 봐봐."
명수가 사진을 성열의 눈앞에 내밀었고 성열이 쑥쓰러운듯 '됐어'하며 고개를 내뺐지만 눈길은 계속 사진에 가있었다.
" ...이거 내가 가질래."
그 사진이 꽤 맘에 든 건지 명수의 손에 들려있던 사진을 홱 낚아챘다.
" 야. 됐다고 할땐 언제고. 싫어,내가 가질꺼야."
" 아,그럼 또 찍어."
" ..응 ? "
" 또 찍으면 되잖아."
" 그,그래.그럼."
나야 좋지.
갑자기 과감해진 성열의 태도에 움찔하며 사진기를 다시 앞으로 쭈욱 뻗자 이번엔 성열이 먼저 입술을 꾸욱 갖다댔다. 잠시 벙쪄있던 명수가 뒤늦게 셔터를 눌렀고 공원 전체에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물줄기를 쏟아내던 분수대가 츄악 -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높이 뿜어져나왔다.
*
" 부모님은 ? "
" 원래 낮엔 없어요. 밤늦게 들어오시거나 아님 새벽에 들어오세요."
" 너 외동아들이야 ? "
" 네. 완전 귀한 몸이죠 ~ 얼른 들어와요."
오랜만에 호원이 동우의 집에 놀러왔다. 저번에 동우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때 책상을 치워줬건만 벌써 또 잔뜩 어지럽혀있었다.
" 고등학생이나 되가지고 ...책상 좀 깨끗히 써라."
" 에이. 어차피 또 어지럽혀질텐데 뭘 치워요. 나중에 몰아서 치우면 되요."
" ...참... "
" 잠깐 기다려요. 초코 아이스크림 완전 큰 거 사놨으니깐."
동우가 환히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가지러간다며 방을 나갔고 호원이 피식 웃으며 또 다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공책 여기저기에 낙서가 가득하다. 저번처럼 가득한 지우개 가루를 쓰레기통에 넣고 연필과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넣었다.
" 그냥 냅둬도 된다니깐..."
" 내가 못 봐주겠어서 그래."
" 결벽증있어요 ? "
" 이건 결벽증이 아니라 당연한거야."
" 난 그게 편하던데... "
동우와 호원이 나란히 침대에 마주보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호원은 생긴 외모와 다르게 의외로 달달한 초코칩 아이스크림이 입에 꼭 맞았다. 어린이 입맛인 동우도 역시 단 것을 좋아했기때문에 아이스크림을 고를때 크게 고민하지않아도 됐다.
" 너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 "
" 에엑 ? 갑자기 왜 공부얘기해요..."
" 너무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 ...그런가. "
" 대학교 어디 갈껀데 ? "
" 사관부에도 대학교 같은 거 있어요 ? "
" 아니. 사관부말고 생관부에 있어. 생관부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각자 선택해.사관부에서 일한 건지 아니면 생관부에서 일할건지. "
" 형은 왜 사관부를 선택했어요 ? 생관부는 천국이고 사관부는 지옥이잖아요. 생관부가 더 좋지않나..."
" 아냐. 지옥이랑 사관부는 달라. 사관부도 생관부처럼 살기좋은 곳인데 죽음을 관리한다고 해서 이름만 사관부야. 지옥은 또 따로 있어."
" 형은 공부 잘 했어요 ? "
수석으로 사관부에 붙은 정도 ?
호원이 숟가락을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 수석이면 되게 잘 했나보네요 ? "
" 나한텐 쉬웠는데 남들은 어려웠나봐."
" ...... "
" 왜 ? "
" 아,아니에요."
" 아무튼 앞으로 공부 열심히해.너무 놀지만 말고. "
" ......"
" 그리고 너 키작으니깐 편식하지말고 앞으로는 좀 골고루 먹어...아프지도 말고.애처럼 울지도 말고."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동우가 아무말도 없이 숟가락으로 퍽퍽 아이스크림만 쪼갰다.
" 꼭 오래오래 살다가 올라와라."
고개숙인 동우의 얼굴에서 눈물이 톡톡 떨어져 하늘색 침대시트를 짙은 파란색으로 만들었다.호원이 한숨을 쉬며 동우의 고개를 잡아올렸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는듯 입술을 또 꾹 깨물고 있었다.
" 피나겠다,피나겠어."
" 흐으엉...혀엉..."
" 왜 불러."
형이랑 헤어지기 싫어요.
결국 참아왔던 울음이 터졌다.
" 울지말라고 방금 얘기했는데 까먹었나보네."
" 흐읍..."
" 나 봐봐."
참 솔직하게 운다.
우는 모습이 꼭 열살 난 꼬마아이같아 동우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줘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오곤한다.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콸콸 쏟아져나오는 눈가를 닦아준 호원이 동우의 부들거리는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뒷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입안에서 달콤한 초코향이 섞여들어왔다.
*
" 어쭈. 이젠 혼자서도 잘 다닌다 ? "
" 흐흐."
아침에 일어났을때 김성규가 없어져서 정말 식겁했다.
혹시 천상으로 일찍 가버린건 아닐까 싶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직 비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뒤늦게 집에 다녀오겠다는 김성규의 쪽지가 발등에 떨어져있었다.
" 집엔 왜 다녀온거야 ? "
" 가방때문에 다녀왔어."
하얀 가방을 들어 선반에 놓은 김성규가 샐쭉 웃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고 있는 김성규는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이 하얗고 투명했다.
" 잘 잤어 ? "
" 어어. 잘 잤지.그럼."
" 날씨 진짜 좋다."
장마도 끝나고 깨끗해진 파란 하늘에 온통 싱그런 초록세상이다. 이런 날엔 사진을 찍어야되는데 핸드폰이 부셔진 바람에 사진도 못 찍......
응 ? 핸드폰이 부셔졌어 ?
" 아!!!!!!!!!!안돼!!!!!!!!!!!! "
" 우,우현아 ! 왜 ?! 머리아파 ?! 의사선생님 부를까 ?! "
머리를 감싸쥐며 절규를 했다.
내 핸드폰에 들어있던 수백장의 사진들. 김성규와 찍었던 사진, 존나 예쁜 김성규 독사진...
침대에서 벌떡 내려와 서둘러 병실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
" 엄마!!!!엄마,큰일났어!!! "
[ 어머,또 무슨 일인데 ?! 또 어디 잘 못 된거야 ?! ]
" 내 핸드폰 !!!! 내 부셔진 핸드폰 어딨어!? "
[ 해,핸드폰 때문에 전화한거야 ? ]
" 어 !!!! 급해,얼른 !! "
[ 엄마 임신 중인거 까먹었니 !? 깜짝 놀랬잖아 ! "
" 아이씨,내 핸드폰 어딨냐고 !!! "
[ 너 사고났을때 입고 있던 교복이랑 같이 버리려고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릴려고 내놨지 ! 교복은 완전 찢어져서는 못 입게 됐더라...]
" 버렸다고 ?!? "
[ 아직 버리진 않았구 현관문에 내놨지... ]
" 그걸 왜 버려 !! "
[ 얘가 갑자기 왜 이래 ! 엄마가 새로 사준다니까는 ! ]
" 아우,몰라 ! 끊어 ! "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콧바람을 흥흥 뿜어댔다.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내 모습에 잔뜩 놀란 김성규가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 왜 화를 내고 그래,아주머니한테..."
" 핸드폰에 다 들었단 말이야 ! "
" 뭐가 ? "
" 너랑 찍었던 사진 ! 몇 백장이 핸드폰에 다 들어있었는데 싹 다 없어지게 생겼어..."
" 아...어떡해... "
김성규도 울상을 지어보이며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얼른 집에 가보고 싶지만 외출이 철저히 금지된 상태라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고 김명수놈한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야,김명수 ! "
[ 우하하학 ! 차가워 ! 꺄르르르.]
" 어디야,지금 ? "
[ 어 ? 나 지금 아,차거 ! 이성열 거기 안서 !? ]
" 야,꺼져. 끊어."
이성열의 꺄르르거리는 목소리와 좋아죽는 김명수의 목소리로 섞여서 들려온다. 아주 신명나게 놀고 있는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장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와중에 두 놈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내 머리에 스스로 감탄을 했다.
" 야,짱동 ! "
[ ...여보세...하아,혀엉 ! 간지러워요 ! 잠깐 우현이 전화 좀...흐으...]
" ...... "
[ 아윽...혀엉...흐응... ]
그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쌍으로 난리가 났구만.
몇 초 간 멍하니 전화기만 들고 있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대에 누워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 ...우현아 ? "
" ...... "
김성규가 떠나면 그거라도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삼으려 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버렸다.
너무 속상해서 괜히 화가 난다.
" 그 핸드폰 지금 어디있는데 ? "
" 엄마가 버릴려고 현관문에 내다놨대...분명 쓰레기차가 가져갔을꺼야...망할...슈발..."
" ...아침에 본 것 같기도 한대..."
" 지,진짜 ?! "
" 응 ! "
" ...그럼 뭐해.나가질 못 하는 걸... "
시도때도없이 간호사 누나가 들락날락거리며 출석체크하듯이 내 상태를 확인하고 가는 상황에서 무단 외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참 베게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문득 병실안이 굉장히 고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김성규 ? "
방금전까지 있던 김성규가 온데간데 사라졌다.
" 얜 또 어디간거야... "
아무튼 속상해죽겠다.
노래 몇 백곡과 손녀시대 뮤직비디오와 예능 출연 했을때 다운받았던 영상들(물론 이젠 손녀시대보다 김성규지만),그리고 수많은 어플들과 연락처는 없어져도 안 아쉬웠다. 그 사진들만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
꿀같던 수요일이 지나가네여 ㅠ
내일 뵈요 !
댓글필수!
신작알림필수!
에그몽은 매일 8~10시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