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해도 멍을 때리기 일쑤였다. 출장을 끝내고 집에 와 청소를 하면서도, 설겆이를 하면서도, 씻으면서도 툭툭 물건을 흘리기 일쑤였으며 머리 속에는 계속해서 대문 앞에서의 장면만이 반복재생되었다.
"미쳤어...진짜 미쳤어..."
내 머리를 툭툭 치며 자책했지만 그의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덧 가까워진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마찬가지였다. 배게에 얼굴을 묻고는 시트를 팡팡 때렸다. 온통 그의 생각 뿐이었다.
혹시나 김종대에게 연락이 올까 계속해서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핸드폰이었지만 김종대에게서 연락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보내볼까, 카톡 창을 몇번이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그 때 반짝거리는 액정에 혼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홀드를 풀었다.
"아..."
그런데 연락이 온 상대는, 김종대가 아니라 엄마였다.
유치한 김팀장 10
"아, 응. 엄마 왜?"
-요즘에 전화는 왜 이렇게 자주 안하고 그래, 응?
"아...미안, 일이 좀 바빠서...
-회사 일은 괜찮고?
"응, 괜찮아!
-여주야, 엄마 내일 한국간다.
"ㅇ,어? 한국? 한국을 왜?
-그냥 오랜만에 너 얼굴도 보고,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하게
"근데 당장 내일이잖아, 말 좀 하고 오지.
-엄마도 알아서 할 수 있어. 집 주소나 알려줘.
"아 진짜...내가 엄마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 몇시에 도착해?
-오후 다섯시에, 인천공항. 회사에서 나올 수 있어?
"갈게, 내가."
엄마는 왜 뜬끔없이 연락도 없이 내일 오겠다고 하는건지. 그치않아도 김종대 때문에 아픈 머리가 더 아파졌다. 그러다 이것저것 널부러져있는 집에 다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잔소리할게 뻔하다. 아까 출장을 갔다와서 청소를 했는데도 다시 더러워진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
출근을 해 내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김종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맨날 회사에서 눈만 마주치면 째려보던 애가 나를 보더니 눈웃음을 살살치며 웃는 것이었다. 그에 깜짝놀라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작게 웃는 김종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씨, 출장은 잘 갔다오셨어요?"
"아, 네! 괜찮았어요!"
옆자리의 백현씨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본인의 출장을 대신 갔다오는게 미안했나보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괜찮았다고 하자 백현씨가 표정을 풀며 다행이다...하고 말했다. 이내 백현씨는 목소리를 낮춰 작게 내게 물어왔다.
"팀장님이랑은 어떻게 됐어요?"
"네?"
"화해했어요? 싸웠었잖아요."
"아..."
"...아직 안했어요?"
"ㅇ,애초부터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여주씨 또 부끄러워하네~"
백현씨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나는 그저 조용히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원래는 백현씨의 이런 말을 들으면 아니라고 부정하기 바빴는데 어제 이후로는...막 부끄럽고 그랬다. 그 때 누군가 나를 뒤에서 툭툭 쳤다.
"여주씨, 안 피곤해요?"
김종대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백현씨는 또다시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 ㄱ,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피했다. 텅 빈 사무실에 우리 둘만 남자 다시 정적이 돌았다.
"칠칠맞게, 얼굴에는 뭘 또 뭍이고 다니는거야."
김종대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얼굴을 만지작 거렸다. 눈만 굴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보고서는 김종대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너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러긴 왜 이래."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던 김종대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급하게 손을 뗐다. 아 맞다, 김종대한테 오늘 퇴근 일찍한다고 말해야 되는데, 김종대의 팔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까이 하자 김종대가 좋아하는 표정을 주체하지 못하는게 보였다.
"왜애~ 여주야?"
"오늘 나-,"
마침 사무실에는 다른 사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고 김종대를 서둘러 밀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됐고, 조금 이따가 휴게실에서 얘기해."
***
김종대에게 휴게실로 오라는 문자를 보내놓고는 문을 열고 휴게실에 들어왔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루만에 달라진 김종대의 태도에 당황스러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 설레고 그러는건, 내가 아직 김종대를 못 잊은걸까...
이렇게 한참을 김종대 생각만 하고 있는데 뒤에서 김종대의 향수 냄새가 훅 풍기며 내 허리를 안아왔다. 고개를 휙 돌리니 역시 김종대가 내 어깨에 고개를 올리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ㅁ,미쳤어? 왜 이래 진짜-"
"왜 불렀어, 응?"
너무 가까운 얼굴 거리에 김종대를 밀어내려했지만 힘을 꽉 주고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김종대였다. 결국 포기하고 한숨만 푹 쉬자 왜애-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야, 나 오늘 있잖아."
"으응."
갑자기 뒤에서 안은 채로 볼에 쪽 입을 맞추는 김종대에 깜짝 놀라 확 밀어냈다. 김종대가 입을 맞춘 볼에 손을 올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야,야, 너 진짜 미쳤, 아, 진짜."
"이게 어때서, 응? 어제는 더 진하게-,"
"ㄴ,너는 그래? 아무한테나 막, 그렇게 뽀뽀하고..."
"아무나야? 너가?"
"....그럼 뭔데?"
"그럼 우리 사귈까-, 악!!!"
나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갔다. 김종대 배를 퍽 때렸는데 생각보다 세개 때렸는지 김종대가 배를 쥐고 끙끙대며 윽, 우리 여주 힘도 세네-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걱정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안절부절 못하며 어떡해, 괜찮아? 하고 말하자 나를 꼭 끌어안고는 해맑게 웃으며 뻥인데! 하고 말하는 김종대였다.
"진짜, 맞고싶냐?"
"에이, 방금도 때렸으면서."
유치하게 구는 김종대를 밀어내고는 말을 꺼냈다.
"야, 나 오늘 일찍 퇴근하면 안돼?"
"왜?"
"오늘 엄마오신데."
"아, 장모님?"
"...미쳤냐, 진짜. 새로운 괴롭히는 방법이야?"
"괴롭힘이라니."
김종대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예뻐해주는 건데."
"됐고, 하여튼 오늘 일찍 퇴근하면 안돼? 엄마 마중나가야된단 말이야."
"몇시에 오시는데?"
"다섯시에 인천공항 도착하신대."
"...그래?"
김종대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다 박수를 짝 치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갈래.”
“응? 미쳤어?”
“나도 간다고!”
“야, 너가 왜 가.”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김종대 때문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쟤는 또 왜 저러지…우리 엄마 봐서 뭐하려고…그리고 혹시 우리 엄마랑 김종대랑 마주치면 김종대랑 옛날얘기하다가 막! 내가 거짓말 친거 들킬수도 있고, 하여튼 불안하단 말이다.
우리엄마는 김종대를 참 좋아했었다. 잘생긴 애가 싹싹하고 잘 웃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보고 종대는 언제 오냐, 집에 한번 좀 데려와라, 하는 말들을 많이 하고는 했다. 물론 김종대 보면 엄마가 좋아할 것 같기는 한데, 별로 반겨지지는 않았다.
“내가 공항까지 태워줄게”
“…”
“가자”
***
시간이 네시가 가까워지자 김종대는 [지금 나가자]하고 메신저를 보내왔다. 동시에 나가면 조금 의심스러울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김종대를 보자 김종대가 먼저 나가라는 듯 내게 손짓을 해보였다.
주차장에서 발장난을 치며 김종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십분쯤 지났을까, 김종대가 나와서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자, 여주야."
김종대는 차에 타서도 굳이 내 안전벨트를 자기가 매주겠다며 찡찡댔다. 그 핑계로 가까이 와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살살 웃는 김종대였다. 내가 저 눈웃음에 약한거는 어떻게 알고 저러는지. 얼굴을 점점 가까이 하는 김종대에 눈을 감았더니 김종대가 큭큭대며 웃었다.
눈을 슬쩍 뜨자 김종대는 여전히 내 코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뭐야, 싫다면서 하고 싶었어?"
"ㅎ,하고 싶은게 아니라...!"
"그럼 해줘야지."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을 맞추는 김종대에 다시금 얼굴이 빨개졌다. 시동을 걸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김종대는 얼굴은 왜 빨개졌어-? 하며 나를 놀려댔다.
"야, 너 한번만 더 뽀뽀하면,"
"응. 뽀뽀하면-"
"다시는 니 얼굴 안봐."
"ㅁ,뭐? 야! 그런게 어딨어!!"
김종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이 툭 튀어나와서는 중얼중얼대며 불만을 토해내는 김종대였다.
"지도 좋다고 눈 감았으면서,"
"...."
"그러면서 계속 나보고는 싫은척 하고..."
"...."
"너무해, 진짜..."
아씨, 이러면 안되는데, 미치게 귀엽다.
"ㄱ,그럼 하든가."
"진짜 김여주 미워 죽겠-...응?"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김종대가 내 말에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더니 차를 길가에 세웠다.
"ㅈ,진짜?"
"뭐가!"
"뽀뽀해도 돼?"
"....한번 말하면 알아 먹어라, 좀."
"헤-, 나 그럼 지금 할래!"
내 볼을 감싸잡으며 쪽쪽거리다 혀로 내 입술을 톡톡 치며 깊게 파고드려는 김종대를 밀어냈다.
"뽀뽀만 허락했지 키스는 허락한적 없다."
"너무해..."
"뭐가 너무해."
힝, 하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김종대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만에 갭차이가...조금 무서울 정도이긴 한데, 학생 때 이런 김종대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낯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
역시 예상대로 엄마는 김종대를 무척이나 반가워 했다. 바로 앞의 딸은 보이지도 않는지 엄마는 게이트로 나오자 마자 김종대를 보며 어머, 종대 아니니? 하고 말했고, 김종대는 엄마를 향해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이 상황이 불편해 죽겠는데, 둘은 신이나서 저녁까지 같이 먹자며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럼, 우리 종대는 여주 10년동안 기다린거야?”
엄마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며 김종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김종대는 기다리기는 커녕 나를 생각하면서 이를 브득브득 갈았을 것이다. 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김종대도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던 김종대는 묘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네,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제 둘도 슬슬 결혼 생각할 시기도 된 것 같은데…딱 결혼 적령기잖아-“
“아, 엄마!”
“여주 너는 가만히 있어, 종대야, 재촉하는건 아니지만, 여주랑 결혼 할거지? 10년을 넘게 만났는데”
엄마의 말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김종대는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네, 해야죠”
“할거에요, 여주랑 결혼”
(BGM틀어주세요!)
김종대는 자가용으로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김종대의 잠시 산책하자는 얘기에 엄마와 나까지 같이 산책을 하게 되었다. 김종대는 내 손을 잡더니 본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실, 아까 김종대의 그 결혼 발언 다음부터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김종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안 추워?"
"...괜찮아."
다정하게 물어보는 김종대를 보며 엄마는 또 우리 종대는 착하기도 하지!! 하며 호들갑이었다. 엄마는 우리 사이에 어떤 전쟁같은 일들이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마침내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엄마를 먼저 집으로 들여보냈다. 김종대가 왜 이러는지는 정말 알아야겠다. 이해할 수가 없다.
“야, 미쳤어?”
“뭐가?”
“…엄마한테 왜 그런식으로 말한건데.”
“…”
“아 진짜…”
“…너 못 도망하게하려고”
“…응?”
김종대의 갑작스러운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너 도망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한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
“나 지금 너 꼬시고 있는건데,”
“…”
“원래는 긴가민가했는데, 이젠 확실해졌어”
“…”
“나 너한테 작업걸고 있는거야”
“…”
“그러니까, 넌 그냥 나한테 모른척 넘어와 주면 돼”
“…뭐래, 헛소리 하지마.”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손까지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애써 김종대의 시선을 피하고는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김종대가 내 어깨를 잡고는 나를 자기 방향으로 휙 돌렸다.
"...솔직히, 나 너 아직 못 잊었어."
"...."
"한번은 놓쳤지만, 두 번은 안 놓칠거야."
"너는 내가 밉지도 않아?"
"미웠었는데..."
"...."
"이제는 안 미워. 그냥, 너라면 다 좋아."
"...."
"너가 나를 갖고 노는거여도 좋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네 옆에 있고싶어."
"....미쳤어, 김종대 진짜...."
“그리고, 솔직히 자신있어."
"뭐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대던 김종대가 갑자기 고개를 확 들고는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자신있다는거야?
"너 결국 나한테 넘어올거야, 여주야."
“...절대, 도망갈거야”
“괜찮아. 도망가도 돼”
"...."
“너가 나한테서 한발짝 멀어지면”
"...."
“내가 먼저 너한테 두발짝 다가갈게”
김종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김종대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김종대는 정말 내가 밉지도 않은지, 혹시 이것도 다 꿍꿍이가 아닌지.
“너한테 안 넘어갈거거든, 절대?”
“그럼 내기할래?”
“…”
“나는 너가 나한테 넘어온다에 걸게.”
“…”
“나는 자신 있거든.”
그 말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뭔가 위험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하자."
솔직히 말하면, 이길 자신은 하나도 없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이 동한데, 애초에 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주야, 이만 가볼게. 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김종대는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