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다정한 손길로 손끝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낸 설화는 그의 손을 두루마기자락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던 쑨양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는 설화때문에
흠흠..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먼곳에 두었다.
그 모습에 설화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오른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겝니까..."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어오는 설화의 목소리에 쑨양은 그제서야 뭔가 생각이 난 듯 약초와 함께 탁자 위에 올려둔 무언가를 챙겨 들었다.
부시럭거리는 종이 봉투를 챙겨들고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얼른 눈앞에 내미는 그의 행동에 설화는 그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어..이건..."
봉투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윤기가 반지르르한 약과에 설화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장에 갔다가 보이길래... 여인들은 단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 쑨양은 손끝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황한듯한 그의 모습에 설화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아보려 애쓴다.
"요즘 꽃 모양만 보면 자꾸만 눈이 가서...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자기가 해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헙..하고 입을 다무는 모습에 설화는 그만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뺨에 난 생채기에 통증이 밀려온다.
벌어진 상처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리는 여인의 표정에 쑨양이 더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하얀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어..어! 웃으시면 안됩니다...!"
다시 피가 베어나오려는 상처를 매만지며 그가 입꼬리를 잔뜩 내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차마 호호~불어주지는 못하고 상처만 살피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설화는 뺨에 닿아있는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나으리께서 이리도 걱정을 해주시니 금방 나을겝니다."
손등에 닿아오는 따스한 온기.
자신의 손을 붙들고 여린 미소를 지어보이는 설화의 모습에 쑨양은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이리도 가까이 앉아있는데...혹,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 쑨양은 마른 침만 간신히 삼켰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설화가 그의 손을 풀어주고는 종이 봉투에 담긴 약과 하나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리 귀한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께서도 하나 드셔요."
밀과 꿀이 귀해 평민들은 감히 맛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간식인데 자신을 주겠다고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온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여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펑펑 울어 화장은 엉망인데다..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 때문에...그가 앞에 있어서 설화는 웃을수 있었다.
쑥쓰럽게 웃으며 여인의 손에서 약과 하나를 받아든 쑨양은 정성스럽게 반을 갈라 한쪽을 다시 설화에게 내어주었다.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이 있지요."
사이좋게 반씩 나눠들고 마주 웃어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 아슬아슬 위태롭던 시간이 지나고 평온함이 찾아든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약과 한입을 베어 문 두 사람은 입안에 퍼지는 달달함에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으리가 저를 웃게 하십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저를 짓이길때 그 따스한 미소가 떠올라 한없이 견디게 합니다.
자꾸만 생각이 나는데... 자꾸만 눈이 가는데...
저는 이 마음을... 놓아두어야만 합니다.]
쾅-!
주안상 위에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그의 행동에 옆에서 시중을 들던 기생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물들었다.
상을 들여온 후, 쉼없이 술만 마시며 무엇에 그리 분을 삭힐수 없는지 이를 바드득 갈아대는 살기 띈 모습에
흥겨워야할 술자리가 무거워져만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는 힐끔 힐끔 그의 눈치를 보다가 비어버린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부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자네. 뭐 그리 마음에 담아 두는가. 그깟 하찮은 계집따위..."
".....하찮다라...그래...그래서 더욱 내가 이러는 것이다."
술잔을 채워주는 남자의 얼굴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가 입술을 꽉 깨물어보였다.
"자네 성격대로 하면 되지 않는가! 천하의 김재호가 무엇을 그리 고민하시는겐가."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 치켜세우는 남자의 말에도 김재호는 여전히 술잔만 기울인채 대답이 없었다.
남자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기전까진.....
"계집들은 그리 싫다하다가도 돈 몇푼 찔러주고 자빠트리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보이지 않는가~ 예전 '초연'이도..."
남자의 말에 섞인 이름 하나에 김재호의 미간이 구겨지며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작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힘이 잔뜩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들린 술잔이 힘껏 들리며 그대로 남자의 머리에 꽂혔다.
"으.......윽.."
남자의 머리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에 시중을 들던 기생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화를 삭이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재호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진 남자를 바라보며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두번 다시 그 이름은..... 듣고 싶지 않으니.."
가슴에 묻어 둔 이름 하나가 떠오르자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인 김재호는 잊으려..잊어보려 몸부림치던
지나간 그 밤의 기억이 떠올라 피가 베어나오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잊으려 했으나 잊을 수 없는 그 밤..
서늘했던 눈빛이.. 울며 매달리던 여인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파고든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그런 원망 섞인 눈으로..나를 바라보지 마라...!
"나으리께선 저의 무엇을 얻으셔야 그 욕심을 버리시겠습니까."
얼음장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눈길 하나 던지지 않은채 물어오는 여인에게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찮은 계집따위에게 이리 휘둘리며 자존심까지 모두 던져버렸는데도...
여인은 단 한번도 내게 진심을 다해 웃어주지 않았다.
"나으리께서 원하는 건 모든 들어드렸습니다. 더이상 무엇을 더 바라시는겝니까."
"나는...! ..........너의 마음을 원한다."
'마음'이라는 한마디에 그제서야 여인이 내쪽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하지만...차디찬 그 눈빛에...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는 그 시선에... 가슴이 따끔거려온다.
"길가에 그저 그렇게 피어있는 이름 없는 꽃도...지조가 있는 법입니다. 어찌 마음없는 사내에게 그것을 내어주길 바라시는겝니까."
여인의 말에..나의 가슴이 한없이 무너져내렸다.
흔들림없이 꼿꼿이 앉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모습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놈 때문이냐...네가 지금 내게 이러는 이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찬 환도를 뽑아들어 여인의 가녀린 목에 들이대자 어두워진 두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처음으로 내게 던져온...눈빛이었다.
"그럼에도..나으리께서 원하시는건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목을 베어내신다해도...전..."
"아니.....난 너의 목을 베어내지 않을 것이다."
".................."
"그 놈의 목을 베어 네가 보이는 곳에 던져주마."
"..........!!!!!!.........."
"내가 너를 갖지 못한다면! ...너도 그자를 갖진 못할것이다."
".....나...나으리....."
"네가 내게 올때까지 그자를 괴롭혀주겠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주겠다."
환도를 거둬들이고 돌아서 나가려는 나의 다리를 여인이 붙잡아왔다.
좀 전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채 바지 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모습에 난 더욱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리도 지키고 싶은 것이냐...
왜 난 아닌 것이냐...왜...왜.......
여인의 애타는 손길을 애써 뿌리치고 돌아서 나가려는 나의 등뒤로 초연의 절규가 귓가에 파고든다.
그 울음에 가슴이 미어져서... 그 애절한 마음이 나에게 향하지 않아서...
환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선월..아니, 태환. 잠깐 나 좀 보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옷을 갈아 입으려던 태환은 잔뜩 흐려진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금옥에게 시선을 던졌다.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금옥은 한숨을 크게 내어쉬고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태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여기 오지 마시오. 오늘 일도 그렇고...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오."
".................."
"아까 하는 말 들었소? 어휴... 다음에 오면 또 무슨 짓을 할지... 자네가 남자라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힘차게 고개를 내젓고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던 금옥은 돈이 담긴 주머니를 들어 태환의 앞에 놓아두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소. 나 때문에..이런 모진 고초를 겪고... 사내로서...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금옥은 여전히 두 눈만 꿈벅이는 태환의 손을 끌어 부드럽게 다독였다.
"내 걱정은 마시오. 난 별 일 없을거요."
"하지만...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분명.."
"그건 내가 알아서 하리다. 지금까지 도와주었는데 이런 곤란한 상황을 겪게 해 미안하오."
".............."
"자네가 하던 일은 내가 책임지고 구해주겠소~ 요즘 날씨가 추워져서 바느질거리가 많이 들어온다하니..
돈 걱정은 마시게~"
자신의 마음을 놓이게 하려는듯 애써 밝게 웃어보이는 금옥의 모습에 태환도 마주 웃어보이곤 금옥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쥐었다.
눈에 익은 모란실의 풍경을 돌아보며..이젠 끝이구나..싶은 홀가분함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섭섭함에 괜스레 가슴 한켠이 욱신거려온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얼굴 하나.
이곳을 떠나면 볼 수 없을 누군가의 모습에 태환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김재호도...사연 있는 남자였네요...
하나, 과거에도 그는 별반 다를것이 없어보입니다.
그래도 슬퍼보이는건 왜인지...흠.....불쌍하기도 하고...
뭔가 쑨과 환의 꽁냥꽁냥을 적고 싶어서 약과 에피소드를 적었는데!!
뭔가 아쉽네요ㅋㅋㅋ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 되니까요~ㅎ
오늘도 재밌게 읽으셨나요?
늘 댓글 달아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너무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