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05
침묵은 금이라 누가 그랬던가?
다니엘은 3일째 정상의 피를 말리는 중이었다.
피곤한 월요일 오후
정상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오해를 풀겠다고 결심했다.
“야야, 너 진짜 끝났어?”
“뭐가?”
아까부터 계속 10분에 한 번씩 말을 거는 재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다니엘...”
“그만해, 몇 번을 얘기해”
정상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상하네...”
“자꾸 뭐가?”
정상은 여기가 회사라는 걸 기억해내고 최대한 짜증을 숨겼다.
“아니...”
자리로 돌아가려던 재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얼마 전에 다니엘 봤어”
“한 1주일 전에 너네집 근처에서 그 예전에 너네 살던 집 있잖아”
“근데”
“이사준비하고 있더라고”
정상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날이구나, 정상에게 빅엿을 투척한 다음날
정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수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이어 말했다.
“너희 이사 가냐고 물었더니 걔가 그랬어.”
“응, 우리 이사가. 정상이 회사 가까운 곳으로”
“그래서 난 너희 조만간 결혼이라도 하려나보다 생각했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네냐고 물었더니 우리라고 답했다고!”
“그리고 6개월도 전에 헤어졌다며 근데 왜 걔가 이 회사 근처로 이사를 와?”
그런 질문이라면 정상이 줄 수 있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또 한 번 다니엘 스눅스가 정상의 뇌를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있는 동안
다니엘 린데만이 자신이 다음 차례라는 듯 다가왔다.
“재수씨, 이거 사람 수만큼 복사 부탁드릴게요, 정상씨는 이거 정리 부탁드려요.”
긴장한 채로 받아든 종이뭉치는 맥 빠지게도 백지였다.
황당한 기분으로 종이뭉치를 뒤적이던 정상은
마지막 종이 귀퉁이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7시에 주차장에서 봐요.’
너무도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나
막상 부딪히자니 긴장이되는 정상이었다.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서 한참을 침묵하던 다니엘이 말했다.
“정상씨, 지금 애인 있어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다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요.”
“다행이다”
다니엘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눈길도 주지 않던 다니엘이 정상을 바라봤다.
“생각... 많이 했어요.”
“정상씨에게 물어보는 게 맞는 건데...”
“진짜 있다고 하면 어떡하나, 그 대답이 무서워 못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정상씨 피했어요. 미안해요.”
그의 시선이 다시 바닥을 향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 못하겠어요.”
자신에게 떨어진 시선이 아쉽다고 생각한순간 다시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정상씨가 애인이 있다고 대답했더라도 전 같은 말을 했을 거예요.”
크게 결심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쉬더니 말한다.
“좋아해요.”
“애인 있는 여자 건드는 거 정말 나쁜 짓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상대가 정상씨라면 저 나쁜사람 한번 해보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오늘에서야 물은 거예요.”
“근데 나쁜사람 만들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났어요.”
개운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다니엘을 보며 정상도 결심했다.
이 상황의 원인이자 다니엘이 지금 가장 궁금하지만 묻지 않고 있는 이야기
“3년 넘게 사귄 외국인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이름이 다니엘이었어요.”
“처음에 부장님 피했던 것도 그거 때문이었어요.
마주치면 생각날까봐, 끝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사실 아주 안좋았지만 그 말은 삼켰다.
“헤어진지는 거의 반년 됐고,
때가 되면 얘기해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제 얘기는 이게 끝이에요.”
지금 자신의 옆집에 그 다니엘이 살고있다는 사실도
“그 ‘때’ 라는거...”
다니엘의 입 꼬리는 계속 올라간 채였다.
“얼마 안 남았다고 저 생각해도 되는 거죠?”
정상은 모르는 척 웃었다.
부장님의 진심을 마주한 지금
정상은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 확신했다.
부장님의 솔직하고 당당한 고백을 안고 도착한 집 앞 현관
열쇠를 꺼내던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옆집 문에서 뛰어나오는 자신의 구남친과 마주쳤다.
“이제 와? 요새 자주 늦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맨발로 나오는 다니엘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거의 매일같이 오늘처럼 솔직하고 가슴이 벅찬 고백을 받았던적이 있었다.
3달 전
자주 가는 카페 알바생이 바뀌었다.
요란한 타투와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 외국인으로
카페에 가득 찬 고등학생들이 알바생의 외모에 대해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보며
정상은 근처에 다른 조용한 카페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공부는 실패라고 생각하며 북적이는 고등학생들 틈에서 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가면 안 되는데!!”
새로 온 알바생이 비명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노트북 선을 정리하던 정상의 움직임이 멈췄다.
“네?”
정상의 앞에 안절부절한채로 선 그가 말했다.
“왜 벌써??”
의미를 파악하기위해 머리를 굴리던 정상은 곧 왜 벌써 짐을 챙기냐는 뜻이라는 걸 알아챘다.
자신이 오늘 카페에 들어 온지 20분 째
3달간 거의 매일 2시간동안 공부를 하다 갔으니
다른 날과는 다른 오늘에
일하던 알바생이 의아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커피머신을 닦다말고 행주를 손에 든 채로 뛰어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 저 그냥... 집 가려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갈 시간 안됐잖아.”
알바생이 빠르게 반문한다.
“아, 그런데 그냥 피곤해서...”
“안 돼 가지마. 조금 있으면 나 퇴근이야.”
알바생은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이 곧 퇴근이라 말했다.
“그래서요...?”
“나 이거 끝나면 같이 가”
제안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었다.
명백한 통보였다.
정상은 21살인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친구가 없었다.
개나 소나 다 있는 썸남마저 없었는데
그건 정상이 정말 답답할 정도로 눈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상의 행동은 남자들의 입장에선 거절으로 다가왔고,
정상은 자신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철벽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지금껏 은근슬쩍 호감을 표현해오던 동기, 선배 그리고 후배들은
모두 정상의 철벽을 넘지 못했다.
친구들은 그런 정상을 보며 답답하다며 질책했지만 정상은 억울했다.
밥 먹자, 영화 보자
누가 들어도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이었는데
무슨 수로 눈치를 챌 수 있냐고
카운터 옆 테이블에 자신의 가방을 옮기고는
의자를 빼놓고 얼른 오라며 손짓하는 남자에게 쭈뼛대며 다가갔다.
“정상, 여기서 기다려”
개구지게 웃는 얼굴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란 정상에게 다니엘은
“너 학생증, 그거 봤어.
you`re lovelier than your pictures.”
라고 말했다.
체크카드 기능이 있는 대학교 학생증을 말하나보다.
정상은 지갑 안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
자신의 얼굴과 학교가 나와 있는 그 카드를 주로 사용했다.
그때 친구들이 눈치 없어 답답해 죽는 정상도 느꼈다.
이 외국인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기다릴 거지? 묻는 다니엘을 보며
“그럴게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때 정상은 내 인생에도 봄이 오려나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다니엘이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
정상이 느낀점은 그가 제멋대로지만 귀엽다는거였다.
잡아오는 손에 당황해 쑥 빼버리자 뒷목을 긁적였고
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에 망설이는 정상에게
그럼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겠다며 폰을 가져가더니 번호를 누르고 재빨리 전화버튼을 눌렀다.
“저장해. 다니엘이야, 다니엘 스눅스”
짓궂게 웃는 얼굴로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다.
그런 행동은 밉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는 곳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몸에서 열도 나는 거 같았다.
매일같이 점심때가 지나면 정상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 항상 오늘은 카페 안 오냐는 다니엘의 질문이 날아왔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왜 안 오냐
와주면 안 되냐
그럼 오늘은 뭘 하냐는 질문을 덧붙였고,
가겠다고 하면
정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학교를 끝나고 카페를 가는 날이면
다니엘은 꼭 카운터 바로 옆의 테이블을 비워두고 정상을 기다렸다.
다니엘의 등장으로 점점 바쁘고 시끄러워지던 카페는
정상이 그 테이블을 차지하기 시작한 후 얼마안가 다시 한산하고 조용해졌다.
주문받은 음료가 다 나가면
다니엘은 정상의 맞은편에 앉아 공부하는 정상의 얼굴을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정상이, 코 귀엽다.”
“눈이 예뻐”
“손도 작아”
“왜 이렇게 예뻐”
도저히 낯 뜨거워 들어줄 수가 없어 힐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다니엘은 자신의 왼쪽가슴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으윽! 예쁘다”
총 맞은 척 연기를 했는데
정상은 그게 또 너무 부끄러워 다시 고개를 내려야했다.
거의 매일을 그런 직설적이고 당돌한 고백을 들으며 정상은 다니엘에게 더 깊게 빠져들었다.
그래 난 이 눈앞의 남자에게서
오늘 들었던 것보다 훨씬 두서없고 정리 안 된
하지만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훨씬 더 가슴 뛰게 만들던 고백을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신발도 안 신고 나온 다니엘의 발을 보며
이 남자는 어떻게 여전히 충동적이고 솔직한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지금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며
이 남자가 오늘 왠지 그때처럼 조금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늦든 말든”
괜히 날이 선 말을 던진 정상은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갔고
다니엘은 사라진 문에 대고 말했다.
“내일은 일찍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