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3
다니엘은 눈앞이 아득했다.
방금 정상의 말을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눈앞이 도는 느낌에 자신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지난 반년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집에서 보자는 말을 하고 떠난 후 다니엘은 집에 가면 정상에게 변명할 생각이었다.
왜 그랬는지 또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자신은 여전히 정상을 사랑한다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돌아간 집에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 마냥 다니엘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텅 빈 정상의 옷장을 확인하고 다니엘은 2년간 함께한 소중한 공간을 너무 쉽게 털고 나가버린 정상에게 화가 났다.
물론 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로 정상을 찾아갈 때마다 다니엘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다니엘은 그런 정상을 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지금은 화가난거라고 정상의 화만 풀리면 곧 돌아올 거라 자신했다.
처음으로 그녀가 욕을 하고 화를 냈을 때 다니엘은 순수하게 기뻤다.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며 욕을 내뱉고는 엉엉 우는 정상의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그 눈물이 자신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거라 믿었다.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다니엘은 망연자실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정상을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순히 생각했다, 전략을 수정하기로
정상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니엘에겐 정상이 필요했다.
“나 카페 알바 그만뒀어”
아직까지 집에 있는 모습에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정상의 눈을 피한 채 말했다.
“다니엘! 너 진짜...”
정상이 마시던 물 컵을 내려놓고 쿵쾅거리며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정상, 정상! 알겠어. 무슨 말인지”
다니엘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정상을 들어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왜 그래, 진짜”
정상은 다니엘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자주 부딪혔다.
그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이거였다.
계획없는 인생
전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될 대로 되라 식의 마인드 하지만 다니엘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억울했다.
“정상, 잔소리 그만~ 다니엘 힘들어어~”
“다니엘! 내가 더 힘들어어~ 왜 아무것도 안하려고 하는데”
다니엘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애교를 부리자 정상은 똑같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늘렸다.
“네가 아무것도 안하는 거 싫어. 22살이잖아 언제까지 아무 계획도 없이 이렇게 살 거야”
다니엘에겐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정상처럼 당장 뭐할지 무슨 직장을 가질지 어떤 집을 살 건지 따위의 목표는 없었지만
10년 뒤에도 정상과 한집에 살며 정상을 닮은 예쁜 딸 하나를 키워야지 라는 목표 아닌 목표가 있었다.
“정상~ 내가 왜 계획이 없어?”
찌푸린 정상이 입이 열리려 하자 재빨리 정상을 고쳐 안으며 다니엘이 말했다.
“들어봐! 3년 후에 우린 결혼을 하는 거야!”
“...그러고?”
“그러고 아기를 낳는 거야! 난 딸이 좋아. 정상은?”
다니엘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 한참 생략된 자신의 인생설계를 고백했다.
나름대로 진지한 고백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상의 인상은 더 험악해졌다.
정상의 눈치를 살피던 다니엘은 정상이 입을 열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쪽
그 소리가 딱 적당했다.
부드럽게 맞닿은 소리가 아닌 크고 과장된 소리
놀란 정상이 다시 입을 열려하자 다니엘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쪽 쪽 쪽 쪽
할 말을 잃은 정상의 표정은 다니엘을 따라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보였다.
그래 3년 후에 결혼하기로 했다.
약속 같은걸 한건 아니었지만 조심스레 내보인 진지한 고백이었고 지금도 변함없었다.
결혼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실 결혼같은거 필요 없다 생각했다.
중요한건 함께하는 거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살아갈 정상을 애 딸린 미혼녀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결혼은 다니엘에게 오직 정상만을 위한 계획이었다.
“네 잘못도 없진 않아”
한참을 초점 없이 서있던 다니엘의 입에서 나온 말에 기가 막혔다.
“뭐...?”
정상은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내기위해 애썼다.
네 잘못도 없진 않아 라니 내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대답이 나올 수가 있는걸까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이 내 탓이라니 대체 내가 뭘?
정상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내가 다른 여자 만난 거 정상 잘못이야”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정상은 침묵했다.
“정상도 질려했잖아 매일 하는 비슷한 질문 비슷한 대답 대화도 비슷한 주제로만 데이트고 거기가 거기고”
“정확히 따지면 정상이 먼저였어.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킨 건”
“나 멀리하고 나랑 있는 시간을 지루해하는걸 보면서 불안했어. 뭔가 변화가 필요했어.”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 하냐고 쏘아붙일수가 없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기분이었다.
정상은 머리가 복잡해져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맞아. 내 잘못이야. 미안해”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정상은 다니엘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천천히 빼냈다.
다니엘은 자신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는 정상을 잡지 않았다.
정상이 동요했다.
다니엘은 정상의 뒷모습을 보며 말갛게 웃었다.
수정된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good night.”
다니엘은 정상이 오늘 밤 쉽게 잠들지 못할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