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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시린 겨울이었다. 너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눈이 펑펑 내려 내 어깨를 적시던, 바로 그 때였지.
"토끼 좋아해?"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텅 빈 학교 운동장에 앉아있을 때
너는 마치 눈처럼 내게 다가왔고 뜬금없이 토끼를 좋아하냐며 물었어.
"토끼..?"
너는 눈꽃처럼 내 옆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아주 사뿐히.
"응- 너 토끼같아."
눈꽃같이 하얗고 토끼마냥 보드라웠던.. 너와 나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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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2일
"무슨 생각해?"
"응, 고등학교 때..."
"...넌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니, 참.."
"그래도.. 그냥.. 이상하게 이렇게 가끔가다 기억이 나네.."
앞에 놓인 따뜻한 머그잔을 꼭 쥔다.
네가 내 손을 잡아주던 그 때 처럼.
"그렇게 그리우면, 찾아가면 되잖아. 그 사람 조금만 노력하면 연락할 수 있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나같은 이기적인 사람이 어떻게 다시 찾아가겠어 그 애를..
이미 나 같은 건 잊어버렸을거야.
친구녀석은 그런 나를 보며 또 한숨을 푹 쉰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 혼자만의 추억일까봐.. 그걸 깨달아버릴까봐 무서워.
"니가 말했던 느티나무.. 가보긴 했어?"
"느티나무..."
느티나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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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이것 봐. 엄청 큰 나무야!"
"이걸 이제야 본거야? 난 입학식부터 벌써 봤었는데- 하여간 주위안보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피- 이제라도 봤음 된거지! 나 여기서 사진찍을래! 찍어줘!"
너는 늘 사진찍기를 좋아했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녔지.
나의 모습을 한 장 한 장 담아낼 때마다 너는 내게 항상
"토끼야, 이것 봐. 진짜 토끼같다-" 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
나는 볼이 붉어진 채로 그저 멀뚱멀뚱 널 올려다 보았지.
"토끼야. 이 나무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여기 있었대. 100년도 넘게 말이야."
"오 완전 할아버지네~ 아니다, 할머니인가?"
"이 나무처럼, 나는 항상 네 옆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있어주면 되지!!"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어떤 이유로 잠시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되도, 내가 너무 보고 싶으면 이 나무를 찾아와. 이 나무를 나라고 생각하고 예쁘게 보살펴 줘야해?"
"우리가 왜 오랫동안 보지 못해? 그럴 일 없어."
"맞아. 맞는데.. 아주 만약에라면 말야-"
"그래 알았어! 이 나무는 앞으로 다니엘이야!"
"맞아- 다니엘나무."
우리는 항상 느티나무 아래 앉아 하루를 얘기했어.
늘 그 자리에서.
내가 너의 곁을 떠나던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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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가 보고 싶었어.
그 자리에 아직도 있을 그 나무가 정말 너인것 같아서.
하지만 갈 수 없었어. 나는 너에게 너무 미안한게 많아서.
기억 나? 1학년 겨울 방학식날. 널 앞에 두고 내가 펑펑 울며 했던 말.
너는 내 울음섞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해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봤었지.
울먹이며 힘들게 한 글자씩 말을 꺼내던 내 모습에 결국 너도 눈물을 흘렸잖아.
그게 내가 본 너의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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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니엘..미안해...흐아앙.."
사실 캐나다로 떠나는 건, 너에게 말하기 아주 한참 전에 결정된 일이었어.
하지만 너에게 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니가 먼저 나를 떠나갈까봐 걱정됐던 어렸던 나의 걱정때문이었어.
내 마음이 편하려고 너를 아프게 한거야. 난 그렇게 못된 아이었어.
"..언제 다시 와..?"
너는 아주 차분하게 날 안아 토닥여주었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아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
나는 너의 물음에 그저 더 큰 소리로 울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는 네가 영원히 나를 잊지 않고 기다려 주기를 바랐어.
하지만 머지않아 깨달았어. 아-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그렇게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약속 하나 하지 못한 채,
우리의 느티나무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나눠가진 후 그렇게 헤어진거야.
너의 집 번호를 분명 적어갔지만, 나는 너에게 연락할 수 없었어.
네 목소리를 들으면 그저 당장이라도 이 곳을 떠나 너에게 가고 싶을까봐.
다니엘, 니 토끼 참 못됐지?
그렇게 혼자 수화기를 들었다 내려놨다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결국 용기를 내어 건 번호는 더 이상 없는 번호더라.
너는 언제까지나 내 전화를 기다렸을까..
너는 얼마나 내가 미웠을까..
너는 아직 날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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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등학교 졸업 후 캐나다로 떠난 뒤 10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너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이기적이었던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으니.
그런데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와 함께 했던 그 곳을 찾으려고 해.
아마 네 곁에선 예쁜 아내와 아이들이 너의 생일을 축하 해 주고 있겠지.
혹은 여자친구나, 친구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나는 그런 오늘, 다니엘을 찾아가려고 해. 우리의 추억속의 다니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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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변함이 없구나.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너는 늘 이자리였구나.
"큼..흠..!! 다니엘- 안녕?"
바람이 대답한다. 안녕 토끼-
"그 동안 잘 지냈어?"
"...."
"나는.. 엄청 잘 지냈다?"
캐나다에서 대학원도 다니고.. 한국에서 취업도 했어.
나 되게 열심히 살았어. 엄청 바쁘고 또 바빠.
근데 항상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아.
"...나는 있지, 네가 그리워. 하지만 널 찾을 수 없어. 그게 제일 힘들어 다니엘.."
또, 결국 눈물이 난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 해 놓고서는.
조심스레 우리가 늘 앉던 그 곳에 앉아 너에게 말을 건다.
항상 우리가 장난스레 모래장난을 하던 그 자리.
늘 둘이었는데 오늘은 나 혼자 모래성을 쌓는구나-
사악-
모래성을 쌓기 위해 모래를 모으는데, 내 손이 차가운 무언가를 스쳐 지난다.
"알류미늄 통? 요즘 애들이 묻어 놓은 타임캡슐인가.."
모래를 슥슥 털어 형체를 확인하는 데 쓰여있는 글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그 네 글자에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뛴다.
'토끼에게'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그 통에는 몇 개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의 쪽지들이 가득했다.
'토끼야 왜 전화 안해? 이사하느라 바빠? 2002년 2월 9일'
'토끼야 언제 전화해줄래? 나 목 빠지겠어! 2002년 2월 28일'
'토끼야 거긴 어때? 이젠 전화 안해줘도 괜찮아. 그래도 꿈에는 자주 나와주면 안돼? 2002년 3월 13일'
'토끼야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너 보고싶어. 정말 많이.. 2002년 4월 19일'
삐뚤빼뚤 글씨로 나를 추억하던 너.
읽어내려가는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떨어져 시야를 가린다.
너는 나를 추억 해 주었구나. 정말 고맙게도..
'안녕 토끼! 나 대학교 입학했다. 행복한 거 맞지? 보고싶어. 2004년 2월 18일'
'토끼야 나 군대가. 군대 가 있는 동안에 니가 날 찾을까봐 그게 제일 겁나.. 하지만 나 씩씩하게 다녀올게 좋아해.. 2005년 4월 24일'
'충성! 토끼야 나 전역했다! 그 동안 네가 날 찾지 않았다고 해서 다행이야. 사실 불행인가? 여전히 예쁠 니가 오늘 정말 보고싶다. 2007년 6월 26일'
'토끼야! 오빠 취업했어! 이제 돈도 버는 어엿한 사회인이야. 이제 너만 있으면 돼. 너 책임질 수 있다 이 오빠가! 이제서야 말할게 사랑해! 2010년 5월 2일'
'토끼야, 너 한국 왔다는 얘기 들었어. 하지만 모두가 너를 찾아가지 말라고 해. 너를 위해서.. 나 너 기다려도 되니? 2011년 3월 21일'
'행복하게 지낸다니 다행이야. 2012년 4월 30일'
'생일 축하해. 2013년'
내 얼굴을 다 덮어버린 눈물에 그저 꺽꺽대기만 하다
마지막 남은 쪽지를 펴 보았다.
'보고싶어. 내 사랑 토끼. 2013년 2월 12일'
오늘.. 오늘이다...
너무 놀라 풀린 다리를 겨우 일으켜 주위를 두리번 거리지만 네가 있을리 없다.
그렇게 한 참을 쪽지들을 끌어안고 펑펑 울다가 하나의 쪽지만을 통에 남겨둔 채 운동장을 빠져 나온다.
나 이제는 용기내려 해. 다니엘.
' 01012345678 2013년 2월 12일 너의 토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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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망한 듯..ㅎ
참고로 독일 다니엘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