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에게 듣는 사랑해란
w.서화
사람이 가장 감성적이라는 시각인 자정,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캔,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 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남자와 여자. 굳게 닫혀 있던 여자의 입술이 동그란 모양을 만들며 소리가 새어나오자 남자의 목젖이 크게 일렁였다. 꿀꺽. 여자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사.."
"응."
여자의 완성 되지 못한 부름에도 남자는 사탕보다 단 눈빛으로 답했다. 그리고 여자의 답은,
"사랑..ㅎ, 야, 나 시발 진짜 못 해먹겠다. 연기 전공 중에 너한테 오빠 사랑해요- 잘 하는 후배들 많잖아. 그냥 걔네한테 부탁하면 안 돼?"
이랬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직 꽤 남은 맥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 여자는 ㅁㅁ대 연영과 연출 전공인 ㅇㅇㅇ. 욕설을 내뱉는 여자를 못마땅하단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는 ㅁㅁ대 연영과 연기 전공인 옹성우였다. 이 둘의 교집합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중 딱 세 가지만 꼽자면. 둘은 현재 졸업을 앞둔 학생이며 졸업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25년 째 친구라는 점? 그 정도였다.
"이 시간에 누구한테 부탁을 해. 그리고 너가 쓴 대본인데 원하는 느낌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걸 알아야 내가 연기를 하지."
그는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굳혔다. 남들은 저 표정에 무섭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잘생겼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하지만, 나는 글쎄. 아무 감흥 없다, 메롱. 나는 음흉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너 굳이 연습 안 해도 잘 하는 거 알고, 원하는 느낌이야 뻔하지 뭐. 끈적끈적 알콩달콩 모르냐?"
"끈적끈적은 무슨, 아 빨리 다시 해 봐. 내일 촬영이잖아."
그는 혀를 내두르며 제 큰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는 제 손바닥에 속눈썹이 지나간 자리를 문지르며 떼어 내곤 곧바로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이에 나 또한 이미 들고 있던 캔을 한 번 더 입가에 갖다 댔다. 캬, 시원하다. 단말마의 감탄사를 내뱉곤 대본 한 번, 그 한 번. 시선을 옮겨냈다. 두 어 번의 스캔을 끝내자 머릿속에 맴돈 문장은 '못 해.'였고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맨 정신으론 못 해. 대사를 봐라, 야. 내가 너한테 칠 수 있는 대사야?"
"못 칠 건 또 뭐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캔을 빙빙 돌렸다. 찰랑찰랑 들리는 소리가 꽤 묵직한 것이 아직 많이 남았나보다. 난 거의 다 마셨는데. 나는 가벼워진 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곤 그의 양 볼을 부여잡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잠시 커지는 듯 했으나 이내 제자리를 찾아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맞았다. 차가운 손으로 만져서 그런가.
"저기요 아저씨, 저는 연출 전공이라 불알친구한테 오빠라느니 사랑한다느니 그런 대사를 읊는 연기는 불가능 하거든요?"
"저기요 아줌마, 난 가능하니까 빨리 좀 하시죠?"
"아 글쎄, 난 안 된다니까. 편의점 가서 맥주 좀 더 사오면 할 수도 있고-"
두 눈이 마주한 채 그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둘 사이의 정적은 꽤나 긴 시간 유지되었다. 사실상 몇 초도 안 지났겠지만 그냥 체감 상 그랬다. 이상하게도 묘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숨을 죄여오는 것인지. 잠시 그 나른한 파도에 휩싸이는 듯 했다. 파도가 크게 일렁이려던 찰나,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쥐어 내렸다. 차가운 캔을 쥐고 있었음에도 그저 미지근한 온도였다. 갑작스레 손을 감싼 것도 뿌리치지 못한 채 깊은 눈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맥주 사올게.
"...어."
삐리릭. 그가 나간 문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절로 닫히자 나는 그대로 무릎에 고개를 박고 말았다. 왠지 열이 확 오르는 게, 이상했다.
***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서..성우야, 넷 다음이 뭐여찌?"
테이블 위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앞에 놓인 빈 캔의 수를 셌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첫 번째로 나오는 행동이었으니. 그는 이런 내가 익숙하다는 듯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섯."
"...다서엇? 아니야, 우리 저거 연습해야지. 대본 갖고 와!"
내 손 끝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대본을 가리켰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감독님, 그 상태로 연습이 되세요?"
"고럼요, 고럼요. 얼른 대본 조."
그의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종이 뭉치가 내 손에 쥐여졌다. 어디 보자, 여기 씬 첫 대사가 오빠..그렇게 기억이 뚝.
소꿉친구에게 듣는 사랑해란
"나 한다?"
"하든지."
그녀는 꽤 비장한 표정으로 대본을 노려봤다. 제가 쓰면서 이미 수 천 번도 넘게 봤을 대본이면서 뭘 저렇게 보는지. 손가락으로 밑줄을 쳐가며 꼼꼼히 읽는 그녀의 모습에 괜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엽다. 잠시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미소는 나를 확 잡아당기는 그녀에 의해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가깝다. 분명 술이 많이 들어갔는데도 그녀에게선 알콜의 싸한 냄새보다 제 특유의 바디 워시 냄새가 강하게 밀려왔다.
"...사랑해."
그녀는 진짜 사랑에 빠진 소녀 마냥 두 볼을 붉히며 말했다. 술기운이 도는 지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살짝 풀린 눈, 립밤 이라도 바른 건 지 번들거리는 불그스름한 입술, 그리고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저런 상태로 사랑한다는 데 자극 안 받을 남자가 어디 있는 가. 아무 대답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
"아아, 빨리 다음 대사 쳐야지. 내가 지금 상대역을 해주겠다는데!"
그녀가 책상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러다 또 내일 아프다고 찡찡대겠지. 나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곧이어 그녀의 주먹이 내 손바닥 위를 쿵쿵 찧어댔다. 그닥 아프진 않았다. 워낙에 솜주먹 이었으니. 한 네 번 쯤 찧었을까, 나는 그녀의 주먹을 살짝 감싸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
이번의 정적은 ㅇㅇㅇ의 쪽이었다. 어째 볼이 아까 보다 더 빨개진 것 같기도 하고, 많이 마셨나. 걱정은 되었지만 내게 그 정적을 깰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저 다음 대사가 이어지길 기다릴 뿐.
"오빠."
"응."
"나 사랑해?"
옅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창밖의 빗소리와 어우러져 내 귀를 파고들었다. 그저 한 장면의 대사일 뿐인데, 수도 없이 봤던 대본의 단 한 줄인데. 내 심장은 왜 이리 요동치는 지. 답은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오빠아, 나 사랑해? 응?"
내 입술이 굳게 닫혀있자 그녀는 또 한 번의 직구를 던졌다. 이 또한 대사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에 추가된 것은 말꼬리를 죽죽 늘이며 애교를 부리는 것. 그런 지문은 없었는데,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뭐 있다 진짜. 답답한 마음에 이미 잔뜩 부르튼 입술을 깨물자 여자 주인공인 혜은의 탈을 쓴 채 내게 안기다시피 한 그녀가 제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어냈다. 물지 마, 피나. 나긋나긋한 그녀의 목소리와 손짓에 나는 홀린 듯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술을 열었다.
"응, 사랑해."
극 중의 남자 주인공인 은석의 탈을 쓴 채 말했다. ㅇㅇㅇ에겐 도착하지 못 할, 떠돌이 인생을 살게 될 작은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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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래 듣다 삘 받아서 끄적인 글입니당 사실 뒤에 다른 장면 (예를 들면 키스신이라든지 네 뭐 그런) 있었는데 하핳...오늘은 이 쯤에서 마무리 하려구요 조만간 성균관 양아치로 찾아뵙겠습니다 워너원도 워너블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굿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