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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A WEEK

-꼬인 실타래-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정민은 자고 있었다. 태민은 곤히 자고 있는 정민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시선은 정민의 감은 눈에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손, 그리고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발로 내려갔다. 태민은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정민은 장래의 꿈이 축구선수였다. 메인 급으로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감독에게서 칭찬이 들리는 그런 아이였다. 태민의 머릿속에는 딱 한번 가본 정민의 경기에서 골을 넣고 좋아하는 정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을 뻗어 정민의 오른다리를 쓰다듬어 보려다,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길래 손을 거두었다. 태민은 그렇게 한동안 서 있다 접수처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민군 보호자 되세요?"

"예."

"오른 발목 골절 봉합 수술이랑 입원 3일치해서 백오십만 원 납부 하셔야 해요."

"예? 백오십이요?"

"예. 이게 보험까지 다 처리 되서 나온 금액이거든요? 오늘부터 3일이니까... 5월 28일까지 해주시면 돼요."

 

 접수처의 직원은 피곤한지 태민에게 진단서를 밀어버리곤 다시 제 할일을 하기 시작했다. 태민은 그 앞에서 망연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뒷사람에게 폐가 될까 일단 진단서를 들고 휴게실의 의자에 앉긴 했지만 앉아도 앉은 것 같지 않은 불편함이 계속해서 태민을 찔렀다. 태민은 나머지 50만원과 생활비 마련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양 손으로 거칠게 털던 태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힘든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던 큰아버지셨지만 막상 정민의 축구부 회비 납부가 생각보다 벅차 전화를 드렸더니 끝내 받지 않으셨던 적적이 있으셔서 기대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태민은 이번엔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전화부에서 큰아버지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태민은 밀려오는 허탈함을 뒤로하고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처음부터 기대하지는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실망을 아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번호까지 바꾸실 줄이야. 태민은 의자에 기대어 다시 돈을 빌려줄만한 사람들을 찾아 전화 부를 뒤졌다. 그리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절실했기에 걸어본 전화에서, 태민은 아무런 좋은 말도 듣지 못했다.
 결국 핸드폰이 뜨거워 질 정도가 되어서야 돈 빌리는 것을 포기했다. 이러다간 정말 장기라도 팔아야하나 라는 생각까지 하고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가야할 시간이 촉박해져 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정민의 병실에 한 번 더 들렸다가 정민의 손을 잡고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정민의 발이 완치되기를 빌었다. 그리곤 왔던 길을 되돌아 병원을 나왔을 때였다.
 아직 선선한 새벽 봄바람이 불며 태민의 신발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TS전자 실장 김종인'
 아까 만났던 종인의 명함이었다. 태민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명함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는 것이다. 또 읽고, 또 읽고…….
 'TS전자 실장 김종인'
 'TS전자 실장 김종인'
 'TS전자 실장 김종인'
 TS전자쯤이면 정말 일주일에 천만 원은 아무것도 아닌가? 순간, 해서는 안 되는 상상을, 태민은 해버렸다. 천만 원이면 월세도 미리 가불 해줄 수 있고 아니다. 아예 넓은 집으로 이사도 가능할 것이다. 또 정민이 수술비는 물론이고 새 운동화부터 원정훈련까지 모두 해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영화보고, 밥 같이 먹고, 차 마시고 가끔 섹스 한다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지금 이 현실과 비교해 보면 말이다.
 그쯤까지 생각해보자 정신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태민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절대로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자. 속으로 다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명함은 멀리 날아갈 것 같으면서 또 바람을 타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툭- 하고 살며시 떨어지는 것이다. 명함에 시선을 두던 태민은 명함이 떨어진 곳 앞에 있는 광택이 나는 검은 구두를 발견했다.

 

"……."

"지금 손에 들고 있었죠?"

 

 검은 구두의 주인은 종인이었다. 종인은 꼭 장승처럼 서 있었다. 태민은 속으론 깜짝 놀랐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종인을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종인은 태민을 빤히 쳐다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태민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그거 남들은 줄을 설 정도로 귀한 건데,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에요?"

"저한테는 별로 안귀해 보여서요."

"생각도 안 해봤죠?"

 

 종인이 싱긋 웃으며 태민의 구겨진 셔츠 깃을 펴주었다.

 

"아, 사실 여기 우리엄마 병원이에요. 엄마가 직접 운영하는 건 아니고 그냥 최대주주."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돈 자랑을 하는지 알 바는 아니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태민은 짜증이 솟았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자격지심을 간신히 누르며 앞에 서 있는 종인을 무시하려고 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자 정말 얼마 남지 않았었다.

 

"또 알바 있어요? 제가 또 태워줘요?"

"됐어요."

"그럼 뛰어가게? 잘 생각해봐요. 그렇게 뛰어서 돈 벌면 얼마나 번다구. 나랑 밥 한 끼만 먹어도 천만 원이에요."

 

 태민은 계속해서 말을 거는 종인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병원에서 편의점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태민은 잘하면 지각은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편, 태민이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자 종인은 이젠 보이지 않는 태민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셔츠가 너무 커서 깃을 펴주어도 태가 나질 않는다. 오랜만에 찾은 취향인데 너무 발버둥을 치고 있다. 마침 돈도 없어 보여 돈으로 유혹해도 넘어오질 않는다. 종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는 태민의 얼굴이 또 떠올라 고개를 내리며 혼자 웃음 지었다. 웃음을 지은채로 눈을 아래를 보자 곱게 접힌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종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얀 종이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그냥 쓰레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진단, 납부서'

 

 물론 태민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종인은 오랜만에 적선을 한다는 마음으로 진단서를 가지고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접수처 앞에 서 진단서를 내밀었다.

 

*

 

 새벽 알바까지 끝낸 후 첫차를 타고 골목을 올라 집의 현관문을 열자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찍찍이는 쥐 소리가 났다. 태민은 이젠 모든 게 다 귀찮아져 쥐를 쫓을 생각도 안하고 이부자리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쥐 네까짓 게 뭔데 내 관심을 받으려고 지랄이냐. 대기업 회장 막내아들도 내 관심 못 받아서 안달인데. 태민은 그렇게 누워 자조하다 잠이 들었다.
 꿈은 꾸지도 못했다. 정말 눈감았다 뜨니 해는 중천에 올라있었고, 핸드폰의 알람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하루일과가 시작되었다.

 

"형 어제 왔다 갔어?"

 

 버스를 타고 호프집 알바를 가던 길이었다.

 

"아니. 귀찮아서 안 갔는데."

"에이. 왔었잖아. 병원비도 다 내고 갔지?"

"병원비?"

"응. 형한테 좀 미안해서 얼마인지만 알아보려고 내려가 보니까 나 납부 했다는데?"

"아, 아 그거?"


 태민은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 보다 너무 놀라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순간 옆에 앉아있던 여자의 시선이 느껴져 태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병원비를 모두 납부해 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종인 같았다. 아니, 분명 종인이다. 큰아버지가 내주셨을 리는 없고 알바사장님? 그 짠돌이 양반이? 택도 없다. 그렇다고 주위 친구들은 그렇게 큰돈을 새벽에 내줄리만큼 친하지 않다. 태민은 분명 종인이라고 단정 지으며 정민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만약 종인의 얘기를 한다면 정민은 태민에게 미쳤냐고 대들며 욕까지 할 위인이었다. 태민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결국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제 큰아버지한테 전화 드렸더니 내주셨나보다."

"큰아버지? 큰아빠가?"

"어. 어제 너 되게 걱정했어. 그런데 바쁘시다고 못 오신다고 하시더니 무슨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치?"

 

 정민은 대답이 없었다. 물론 태민 본인이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월세도 못내 빌빌 거릴 때 전화 한번 받아준 적 없던 것을 정민도 알고 있었다. 태민은 긴장 속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정민이 의심하며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태민은 종인에 대해 얘기해줄 의향이 있었다.

 

"아 그래? 웬일이래? 그 양반이."

"그니까. 새벽에 전화 드려서 술드시다 받으셨나 좀 얼 떨떨 하신 것 같으시더라고."

"알겠어. 형 오늘은 와. 어제 오지 말란다고 진짜 안 왔어? 한번 튕겨본거야."

"애교부리지마 새끼야. 토나오니까."

"사랑해 형~ 알러..."

 

 태민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정민의 애교를 받았다고 해서 힘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웃음은 났다. 형제가 뭐라고 자신을 이렇게 까지 힘들게 하는 건지 모를 때도 있지만 분명 형제라 자신을 기쁘게 만들어 줄 때도 있었다. 태민은 벌써 불이 나간 액정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며 정민의 다리를 생각했다.
 그때 마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태민은 누구일까 고민도 하기 전 벌써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얼결에 전화를 받아버린 태민은 말까지 더듬으며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 여보세요?"

"거기 이태민씨 전화 맞죠?"

 

 서글서글한 말투가 귀에 익었다. 태민은 푹 이완되었던 얼굴근육을 도로 수축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개인정보까지 터는 거예요?"

"아니요. 아, 뭐 그렇게 되네요."

 

 태민은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가 듣기 싫어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렸다. 태민이 무시하려니 옆에 앉은 여자가 태민을 건드리며 전화가 왔으니 받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태민은 일단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는 했지만 손은 이미 본체와 배터리를 분리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내릴 역이 다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벨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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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완전 재밌어ㅠㅠㅠㅠㅠㅠ 큰아버지 진짜 너무한다ㅠㅠㅠㅠ 잘 읽고 가ㅎㅎ고마워!!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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