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맘 씀
‘나 너 좋아해. 정식으로 만나자. 네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좋은 사람이 될게, 네게 잘 할거야. 여주야. 우리 사귈래? 라고 분명 그랬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제 사 온 두통약을 뜯어 삼켰다. 26시간째 내 애인은 부재 중이다. 그 겨울, 꽁꽁 얼어 벌개진 손을 하고 우리 집 앞에서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던 오세훈은 부재 중이다.
오세훈은 바빴다. 교수님의 눈에 들어서 매일 불려다니기 일쑤였다. 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다. 우리가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말을 하면 과 사람들은 다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세훈이가? 남자 잘 만났네, 김여주.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를 너무 잘 만나도 탈인 걸까. 무엇이 반환점이 되었는지. 늦어진 연락은 부메랑이 아니어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것마저 익숙해져 가는 모양새가 어떤 밤엔 허탈했다. 지난 데이트는 달력을 한 장 뒤로 넘겨야 했다. 눈을 감았다.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예. 선배. 아침부터 왜요.”
“어디야?”
“가고 있어요.”
“웃긴다. 너. 이게 가고 있는 거야?”
어젯밤 깊은 사념으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수업을 앞두고 조금 늦잠을 자버렸다. 어제보단 멀쩡한 머리를 부여잡고 서둘러 씻었다. 머리를 탈탈 털어 말린 후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급하게 신고 나온 스니커즈는 뒷축이 거의 헌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걸려온 선배의 전화를 받으며 쪼그려 앉아 뒷축에 손가락을 넣고 발 뒤꿈치를 밀어 넣었다.
이것도 오세훈이랑 커플 신발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비유하자면 코 앞에서 들린 선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화들짝 놀라니 앞에서 선배가 키들키들, 즐거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인마. 뭘 그렇게 쫄아?”
“아... 놀랐잖아요...”
“뭘 또 놀라.”
“선배가 하도 무서운 얼굴을 가지고 계셔서.”
“이거 완전 막말파문이네. 우리 과에서 나만큼 개처럼 생긴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개라고 다 순한가.”
대꾸에 선배가 손을 들어 보였다. 스니커즈를 다 신고 일어나자마자 머리로 가해질 것 같은 아픔에 지레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쫄았냐? 쫄보 새끼.”
으이구우, 내게 타박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선배를 따라 걷는다. 문득 궁금함이 일어서, “나 왜 데리러 왔어요?” 하고 물었더니 선배가 답했다. “나 이 앞동 살아.” 뭐라 이을 말이 없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적막으로 찼다.
변백현 선배는 다정한데 남자답다. 무엇보다 나를 여자처럼 대하지 않아서 마음이 더 편했다. 오세훈도 선배 앞에서는 나름 너그러웠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여자란 여자는 후배, 선배, 동기를 막론하고 ‘인마’라고 칭했다. 그 얼굴이 예쁘든, 예쁘지 않든. 키가 작든, 크든. 선배에게 호감이 있든, 없든.
그래서 심리학과 철벽남이라는 오글거리는 별명도 얻었었다. 한 때는. 나보다 두 학번 위였던 선배는 내가 입학하자마자 한 학기를 보내고 입대를 했다. 오세훈도 그때 입대를 했다. 어쩌면 그래서 오세훈이 선배에게 안심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제 오세훈에게 보냈었던 다섯 개의 연락에 오세훈은 새벽 다섯 시, 한 통의 답변을 송신해왔다. -미안. 나 오늘도 너무 바빴어... 자? 잘 자.- 이제 거의 포기 수준이었다. 언제든 나에게 헤어지자 말하면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다고. 그런 결심을 은연 중 했다.
“야.”
“...... .”
“야. 김여주.”
“...... .”
“김여주.”
변백현이 그 결심에 젖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목적지 정류장에 다달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예에, 나는 느릿하게 대답하고 귀에 꽂혀 노래는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뺐다.
사귀는 사람과 만나는 시간이 인문관 복도에서 주어지는 3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라면 믿겠는가. 나는 그 일을 오랫동안 겪어 왔다.
“백현 오빠!”
이 앙증맞은 목소리는 나은이다. 엄나은. 올해 신입생. 선배는 내 곁에서 발을 맞춰 걷다 그 목소리에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그래도 그 목소리는 멎을 생각을 안 하고 고래고래 선배의 이름을 부른다.
어떻게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고 심지어 이름을 붙여 불러, 징그럽게. 나는 선배를 따라갈 생각 않고 느릿하게 걸었다. 남의 연애사에 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은이는 최근 유일하게 선배에게 대시하고 있는 여자애였다. 다들 나은이에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변백현 없다,고 말하며 그녀를 격려했다.
나? 나는 아무 생각 없었다. 나은과 선배가 사귀게 된다면 밥 친구가 없어질 것 같아 조금은 우울할 것 같다.
“여주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백현 오빠랑 같이 와요? 왜요?”
“비슷한 곳에 살아서?”
“그게 네가 왜 궁금해, 인마.”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선배가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누가 봐도 ‘나는 너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머쓱해져서 나는 나은이에게 하하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꼭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훈이 오빠는 오늘 와요?”
아무도 모르게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요새 좀 바쁜 것 같더라고.”
내 말에 수긍하는 듯 나은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원래라면 강의실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법한 선배인데 오늘은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다.
“안 들어가요?”
“연락이 안 됐어?”
“네. 왜요?”
“아니다.”
실없는 소리만 늘어 놓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나은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나를 보지만 그 속에는 뼈 있는 부러움이 담겨 있다. 남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눈빛은 체념이다. ‘이런 사람이랑 오빠가 붙어 다닌다고 여자로 보기는 하겠어?’ 같은.
오세훈과 다니며 수없이 받았던 눈초리들이다.
두 남자
수업이 끝났다. 장장 세 시간을 이어진 연강은 하필 오늘 첫강이어서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가방을 손에다 들고 일어섰다. 곧 2학기 기말 고사다. 필기 된 전공 책은 필기 무게만큼 무거운 건지, 아니면 지쳐서 무겁다고 느끼는 건지 하여간 축축 처지는 느낌이다.
강의실을 나오자 눈 앞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인다. 오세훈이다. 바쁘단 말 와중에도 머리 손질은 깔끔히 했다. 얼굴도 멀끔한 게 수염도 깎은 것 같다. 피부도 트러블이 없는 게, 잠도 잘 잔 것 같은데... 오세훈은 잠을 못 자면 피부가 버석해진다. 뒤에서 오세훈을 부르려 하는데 나보다 앞선 모르는 여자가 선수를 친다.
“오세훈! 왜 네가 여기 있어?”
“어? 아름이 누나.”
“왜 너 여기 있어? 너 인문관 잘 안 오잖아.”
아니에요. 나랑 연애할 때 많이 왔어요.
그럼 지금은 연애가 아니야?
“아... 누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문득 오버랩 된다. 매번 내 수업이 마치기 전부터 창문으로 나를 힐끔대던 세훈이의 모습과, 왜 수업을 끝까지 듣지 않고 나와 나를 기다리냐는 내 질책에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 하고 고백하던 목소리가.
나는 이제 그 애한테 누구 만날 사람이다. 입 안이 꺼끌해졌다. 모래를 씹은 것도 아닌데...
“세훈아.”
그래서 나는 반가웠던 내 기분처럼 신나게 그를 부를 수 없었다. 여자와 세훈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누구?”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됐던, 나는 지금 오세훈에게 ‘누구 만날 사람’이고 그녀는 그저 우연히 만난 사람이므로.
“...... .”
“...... .”
여자의 질문 뒤로 우리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서로를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라 부끄러워하던 어린 고등학생들처럼. 사랑의 감정에 요동치던 그때처럼. 서로의 사이를 물어보는 말에 아무 대꾸 않았다.
“그냥 친구예요.”
내가 이 말을 하길 기다린걸까. 오세훈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푸석한 얼굴의 나는 누가 보아도 경쟁자로 느껴지진 않는 모양이다. 그제서야 여자가 한 발을 뺀다. 오세훈은 내 손목을 잡고 뒤편 비상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짧게 끝날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거기서 왜 그냥 친구라고 했어?”
내게 처음 물은 질문. 보고 싶었다, 잘 지냈어? 밥은 먹었어? 아프다던 머리는 안 아파? 네가 그리웠어. 늦어서 미안해, 가 아닌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그저 그런 질문. 잠시라도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네가 망설이는데 내가 무슨 대답을 해.”
“말 하려고 했어. 여자친구라고 하려고 했다고.”
“그래. 그런데 왜 말 안 했는데.”
“따지려 들지 마.”
애초 물은 건 자기면서.
“그래, 왜 왔어? ‘누구 만날 사람’이 있다며.”
“바빠서 미안하단 말 하려고 왔어.”
“알았어. 용서할게. 그리고 기다릴게.”
“시비 거는 거냐?”
“전혀. 용서 하고 기다리는 게 왜 시비야.”
“하...... 너는 꼭 나를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어야 해?”
누가 툭 건드리면 울 것 같다. 바쁜 오세훈은 예민해져 있었다. 바쁜 오세훈 때문에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무엇이 더 옳은 문장일까. 그는 만지고 온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그러지 마. 머리 한 거 흐트러져.”
“너는 지금 그게 문제야?”
목구멍까지 그래, 라는 말이 차올랐으나 간신히 눌렀다. 오세훈 역시도 화를 눌러 참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화가 났다. “그만 말 할래?”
“그게 좋겠다.”
오세훈의 간결한 대답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묵직한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오자 앞 기둥에 선배가 기대어 서 있었다.
“...... .”
“치정 찍었냐? 얼굴이 왜 이렇게 구려.”
“...... .”
“커피 마시러 가. 나 네가 저번에 말한 거 먹고 싶어. 포카칩 프라푸치노?”
“자바칩 프라푸치노요. 그리고 선배가 저번에 먹은 건 초코 민트 프라푸치노예요.”
“아무튼 그거.”
내가 앞서 나가자, 선배는 내 걸음을 맞춰 뒤 따라 걷는다. 누군가에게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속상하고, 창피했다.
“인마.”
“네.”
“연애는 오세훈이랑만 하는 게 아니다.”
뜬금 없고 속절 없는 그의 위로에 나는 발걸음이 절로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인상 펴. 김여주.”
변백현의 서투른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