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반존대를 써요
w. 채셔
"안녕하세요."
"아, 네.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남자의 앞에 앉았다. 남자는 연애 상담 프로그램의 작가라고 했다. 케이블에서 하는 새 TV 프로그램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그런지 좀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내게 손을 쭉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남자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을 몇 번 흔들다가 상담이 시작됐다. 순간 지민과 내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남자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결국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 다짐했다. 어차피 친구들에게 얘기를 하면 씨알도 안 먹히는 얘기니까. 나는 정말 고민이란 말이다, 엉엉.
"아,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 남자친구가…."
"네."
"웃으실진 모르겠지만, 정말 고민이거든요."
"네."
"바, 반존대를 써요…."
"…네에."
"막, '자기, 오늘도 아침 안 먹었죠. 혼나, 진짜.', 막 이런다니까요오."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네에. 그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한 건지 손깍지까지 끼고서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끄, 끝인데요. 남자는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당황한 남자는 입술이 마르는지 계속 해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울먹이는 듯한 말투로 남자는 정말 끝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 꼬리를 축 내린 남자는 반쯤 따지는 듯한 말투로 물어왔다. 그게 왜 고민이에요? 나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가 이유를 털어놓았다. 너무… 섹시하거든요.
1. 로맨스영화의 필연적인 법칙: 첫만남
그 날은 이제 막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6월 말께였다.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고, 지민은 작곡가 겸 작사가 겸 안무가였다. 워낙 다재다능해서 직업이 참 많았다. 목소리도 예뻐서 유튜브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유튜브 스타기도 했고. 어쨌든 지민은 제 자리에서 그럭저럭 입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좋게 말해 취준생이지, 사실은 백수나 다름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이모는 엄마와 아빠의 돈을 먹는 돈벌레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둘을, 혹자는 섞일 리가 없는 두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치만 인연의 싹은 어디에서나 자라난다. 설령 기름과 물의 경계에 서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첫만남의 날로 돌아가보자면 이렇다. 그 날은 내 인생에 몇 없는 일탈의 날이었다. 면접에서 조롱 및 비웃음과 함께 아주 시원하게 까여버린 거다. 속상한 마음에 혼자서 소주 세 병을 마셨다. 소주 세 병이면 내 주량의 세 배 정돈 되니까 아주 치명적인 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술을 먹고 뻗어버릴 생각에였는데, 마시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사실 잊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을. 이런 줫같은 세상. 술집에 갈 돈도 없어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청승맞게 술을 먹다니. 10대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상했을까. 아니, 그 땐 '10년 후의 내 모습'에 꼭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을 그렸던 것 같다. 씨이발, 내가 왜 그랬지.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온다.
여차저차해서 집에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불을 덮고 잘 누웠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환청이 들렸다. 내 귀를 툭툭 쳐보았지만 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래도 어떻게 여기 두고 가?"
"아, 박지민, 오지랖 좀 부리지 마."
"지민이 혀엉, 나 쉬 마려워요."
"정국이는 얼른 먼저 올라 가. 야, 이랬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
아랫층에 사는 남자 목소리가 언뜻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잘생겼는데 약간 무서운 남자 목소리. 아, 무서운 건…, 좀 사람이… 잘생겼는데 조금, 아주 조금 똘끼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우리 집으로 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잘생김 속에 숨어있는 똘끼를 다들 알 수 있을 거다. 어쨌든 내 앞에 아른거리는 인영이 남자들인 것 같기는 한데. 근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서 눈을 뜰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진짜 눈이 잘 안 떠졌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그리고 결정적인 건 속이 울렁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오버해서 술을 마신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 그럼 올라 가. 오지랖 안 부릴게. 한참을 실랑이하던 남자들의 소리는, 미성의 목소리로 삐친 티를 내는 남자의 말로 끝이 났다. 고 생각했는데, 몇 분 뒤에 다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오징어랑 좋은데이 사온다? 이번엔 남자 하나인 것 같았다.
"저기요."
"…으응."
"저기, 괜찮아요? 태형이가 윗집 여자 분이라고 하던데…."
"저기, 괜찮아요? 태형이가 윗집 여자 분이라고 하던데…."
미성의 목소리. 나는 심봉사처럼 눈을 번쩍! 떴다. 계단에 처량하게 앉아 벽에 핑핑 도는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데, 내 앞에 웬 망개떡이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색을 살피는 게 엄청 귀여운 인형 같기도 하고. 아니면 만화에서 봤던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기도 하고. 나는 남자의 볼을 두 손으로 꾹 잡았다. 놀란 망개떡이 그대로 굳는다. 오구, 귀여워어. 나는 헤에 웃었다. 망개떡이 '아, 아니. 술 많이 마셔써오….' 하고 통통한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며 말한다. 망개떡이 말을 하네에. 나는 오물거리는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다시 웃었다. 망개떡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떠오른다.
"망개야, 나 망개떡 먹고 시퍼어."
"그, 그게에 전 먹는 게 아니에오…."
"왜 먹는 게 아니야아. 먹을래, 흐엉."
"어어, 울지 마오…. 태형이 데려오깨, 집 드러가오…."
싫어어. 망개랑 있을래. 나는 투정을 부리며 어지러운 머리를 망개의 어깨에 툭 기댔다. 망개가 또 굳는다. 추운가. 내일 먹으려고 했는데, 딱딱해서 못 먹게써어. 근데 왜 이렇게 자꾸 속이 울렁거리지. 안에서 음식물들이 파도를 친다. 드넓은 벌판을 지나, 봉긋한 동산을 지나, 깊은 골짜기를 지나, 잔잔한 당신의 샘물에 파도가 철썩, 철썩, 철썩…. 나는 결국 헛구역질을 했다. 에이, 설마. 나는 헛구역질을 몇 번 하면서도 이후의 일을 상상하지 못했다. 절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술 먹고 토하는 건데! 그래서 옆집 남자를 엄청 싫어한단 말이다. 근데 왜 자꾸 뭐가 올라오는 것 같은지. 헤헤 웃으며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정말 꾹꾹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은.
"자, 잠깐만요! 내가 보, 봉지! 잠깐!"
"우웨엑…."
토해버렸다, 남자의 옷에.
*
안녕하세요, 채셔예요. 지민이 반존대로 꼭 글을 한 번 써보구 싶어서 올려봅니댜.
첫만남 에피2는 다음에 데려오로게요. 망개의 반존대 글 많이 사랑해주세오 ☆.☆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망개의 반존대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장)
오래 봬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