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한/민석] 내 어린 남자친구 06
루한은 또다시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게되었다. 숨을 씩씩 내쉬는 루한에 비해 민석은 허약해졌있을 몸으로도 숨소리 하나 바뀌지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루한은 셔츠소매로 이마를 한번 닦아내었다. 민석은 제법 따뜻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느끼는지 가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부도 새파랗게 질려서는 꼭 혼자만 겨울 속에 갇힌것같았다. 동네에서는 아주 예전 흔히 맡았던 시골 냄새가 났다. 계단 위 바짝 마른 흙냄새도 솔솔 풍겼다. 말하자면 고약하기 보단 정겨웠다. 계단 옆으로 이어진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그랗고 매끈한 돌이어야해 꼭. 이거? 아냐아냐, 이것보단 저거! 아이들은 공기놀이라도 하려는지 작은 돌맹이들이 흩뿌려진 골목길 바닥을 꼼꼼히 휘저었다. 계단의 끝자락에 닿았다. 텅 비어있던 스산한 밤의 풍경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좁고 복잡하게 이어진 길들을 오갔다. 끝이 빨간 뻣뻣한 목장갑을 끼고 공병을 모으고 있는 아주머니, 출근중인지 오래되보이는 색바랜 정장을 입고 유독 색이 진한 새넥타이를 매만지는 남자. 재 맞춘듯 똑같은 걸음으로 지하철을, 거리를 거니던 회색의 도시와는 다르게 이곳은 그랬다. 동네 가득히 진득한 삶의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담 위로 까맣게 번진 곰팡이의 쾌쾌한 냄새가 예전과 달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루한은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네의 가장 왼쪽부터 가장 오른쪽까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앞서 걷던 민석이 고개를 돌려 루한에게 일렀다. 길은 이쪽이에요. 루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이었다.
빌라의 앞에 도착했다. 희망빌라 A동, 골든빌라 A동. 루한이 여러 빌라들 벽면 위 다 지워져가는 하얀 페인트 자국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민석은 익숙하지 않은듯한 몸짓으로 빌라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섰다. 아침녘에 보게된 빌라는 조금 더 초라하고 지저분했다. 여긴 청소안하니? 루한의 투덜거림에 민석이 대꾸했다. 다 자기 사는데에 바빠서요. 조금 날이 서있는 그 말투에 루한은 자신을 책망하며 입을 다물었다. 민석도 제 말에 서려있는 날카로움을 느끼고 멋쩍은듯 눈을 굴렸다. 민석의 집에 해당하는 호수의 패가 달려있는 집 문은, 미세하게 열려있었다. 루한이 발로 밀어버렸던 우유곽들 또한 여직 그 모양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가지 달라진것이 있다면, 그 옆에 새로운 우유곽이 하나더 놓여있는 것. 민석은 냄새나는 우유곽을 들어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아직 하루 남았네.. 더워진 날씨에 분명 상해, 쉰내가 풍겼지만 민석은 개이치않았다. 루한은 민석의 손을 잡고 우유곽을 뺏어들었다. 이게이게, 냄새가 으윽.. 이렇게 나는데 이걸 마시겠다고? 루한은 몸소 우유곽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아보며 민석을 저지했다.
"유통기한은 하루 더 남았는데요..?"
냄새는.. 원래 우유에서 비린내 다 나잖아요. 민석이 다시 루한에게서 우유곽을 뺏어오려 손을 뻗었다. 루한은 곽을 꽉 쥔 채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몇시간전만해도 쓰러졌던 몸이였어. 죽을뻔도했다잖아. 먹지마"
루한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민석은 반박을 하려 입을 한번 열었다가 어쩔수없다는 듯 한숨을 한번 푹 쉬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오늘 배달한거에요. 민석이 깨끗한 새 우유곽을 집어들며 루한에게 일렀다. 루한은 탐탁지않은듯 눈을 흘겼다. 빈 속에 먹으면 비릴텐데. 고집은. 민석은 꿋꿋히 우유곽을 손에 들고 자신의 집, 104호의 문을 열었다. 집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어 더욱 냉랭한 기가 돌았다. 민석은 현관이라고 마련되있는 좁은 타일위에 슬리퍼를 벗어놓고 방바닥을 밟았다. 컴퓨터 책상 위에 우유곽을 올려놓았다.
"다행히 누가 집어가지는 않았네"
"완전히 열려있어도 신경도 안쓸걸요? 집에 훔쳐갈만게 있어야 훔치죠"
"컴퓨터 있잖아. 컴퓨터"
"컴퓨터 하나씩은 다 있던데요 뭘. 그것도 이것보다 더 좋은걸로. 이거, 엄청 오래전에 산거에요"
"응, 그래보이긴해"
거실겸 침실겸 주방인 좋게 말해 '멀티테스크'한 집안에는 정말 필수의 가구, 냉장고,냄비,컴퓨터,이불등의 것들 외엔 별것이 없었다. 거 참, 엄청나게 단촐한 집이네. 루한은 자신의 소중한 짝퉁 프라다백팩과 서류를 챙기며 중얼거렸다. 루한은 서류 봉투를 막 가방안으로 집어넣으려다 민석에게 했어야 할 질문을 떠올리고 고갤 돌려 물었다. 루한은 사라진 X의 행방에 관해 물어야했다.
"여기 전에 살던 작가, 그러니까.. 남자인데, 어디로갔는지 알고있어?"
"....글쎄요"
"그럼 여기 언제 이사왔어?"
"초등학생때부터 쭉 여기서 살아왔어요"
"...아씨, 이제 어디가 찾나... 어쨋든 알려줘서 고마워"
짝, 루한은 박수한번 치고 화제를 전환시켰다. 근데 집안 어른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없니? 아니 물어봐도 될지모르겠는데 몇살이야? 중학생정도로 밖에 안보이는데. 여기는 월세? 전세? 아, 이건 주제넘나? 루한의 입에서 끝없이 물결쳐나오는 질문 세례에 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쓱 밀어올렸다. 하나씩 물어보세요.
"그래, 음 일단 물어보는건 널 구해준 사람으로써 물어보는거야"
"네 물어봐요"
"집에 다른 가족들은 없어?"
"조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몇년전에 돌아가셨어요"
민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 눈에는 슬픔이 일렁거리는 듯 보였으나 루한은 위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살이야? 이번 물음에 민석은 쉽게 대답하지못하고 루한을 바라보았다. 민석은 고개를 젓다가 대답했다.
"그냥, 보이는대로.."
"중학생?"
"그보다는 많아요"
뭐지, 나랑 스무고개하자는건가? 루한은 손가락으로 볼을 두들기다 외쳤다. 그럼 열 여덞? 민석은 콧가를 문지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한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소리쳤다. 진짜 동안이네?!
***
"안녕히가세요"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옷 따뜻하게 입고 알았지?"
"알겠어요"
"정말이지?"
"네"
그럼 약속. 민석이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을 구부린손을 제게 내미는 루한을 바라보았다. 어련히 지킬까봐요 저도 다시 쓰러지긴 싫어요. 툴툴대면서도 긍정이 담긴 그 대답에 루한은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민석은 떨더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손가락을 걸었다. 새끼손가락 끝에 짧은 손가락 하나가 닿았다. 사뿐히 구부려 엮는 그 손가락을 루한은 꽉 쥐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꼭 지키기다! 그럼 난 갈게, 잘있어! 루한은 민석의 덮수룩한 머리를 큰 손으로 거칠게 부비고나서 현관문을 나섰다. 민석은 문을 반쯤 열어놓고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루한의 뒷모습이 그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눈을 떼지못했다. 오지랖이 홍수같네.. 민석은 루한이 헝크려놓은 머리를 매만졌다. 오늘은 청소라도 해야겠다. 민석이 중얼거렸다.
***
후우, 한숨과 같기도 한 쉼호흡을 한번 들이 내쉬었다. 한 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덕에 어깨며 다리며 온몸이 찌뿌둥했다. 목에 걸린 사원증을 한번 매만지고나서 루한은 살며시 사무실 문을 밀어열었다. 루한이 빠진 사무실 안은 유난히도 분주해보였다. 평소엔 신경쓰이지도 않았던 프린트 돌아가는 소리, 전화기의 수화기를 잡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소리, 하다못해 서류를 넘기는 소리까지. 루한이 지각하는 사이 사무실 어딘가에 음폭기라도 달아놓은건지 그 많고 커다란 소리들은 루한의 귓 속을 침범해 괴롭혔다. 루한이 쭈뼛쭈뼛 들어오는 모습을 처음 목격 한 사람은 백현이었다. 백현은 이제 와요? 하고 루한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예.. 루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현은 한손엔 서류를 들고 한손엔 녹차티백이 걸쳐진 머그컵을 들고 루한을 뒤따라왔다.
"왠일로 지각이에요? 옷이 어제랑 똑같네요? X가 누군지는 봤어요? 어떻게 생겼어요? 남자는 맞아요?"
"예에? 아....팀장님이 말씀안해주셨나봐요.."
"뭐가요? 루한씨 지각한이유?"
"네. 어제 그러니까, 주소라고 적혀있는 곳에 적혀있는곳에 갔었긴했는데.."
"갔는데?"
"왠 아이 하나가 쓰러져있더라고요. 병원까지 업어나르고, 그렇게 여차저차.. X는 구경도 못했어요"
아아, 힘들었겠네. 근데 팀장님이 꽤 열받아보이던데 루한씨덕분이였구.. 아니, 아니야..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던 백현이 말끝을 흐렸다. 루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백현이 루한의 어깨를 토닥이곤 자리를 떠났다. 병주고 약주기는.. 루한은 백현이 완전히 뒤돌아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발밑, 책상아래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서류철을 꺼내놓았다. 이리저리 뒤섞인 두툼한 종이뭉치를 책상위로 탁탁 두들겨 모양을 맞추었다. 야근타임동안 열심히 타이핑했던 자료를 그 순에 맞게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루한은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열심히 일하는것에 박차를 가하던 중, 사무실 안에 켜놓은 에어컨 바람에 A4용지 하나가 책상아래로 떨어져내렸다. 루한은 허리를 숙여 종이를 주워올렸다. 루한은 종이 위, 빼곡히 채워진 검은 폰트 가운데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그 구탱이에 작게 낙서했다 줄을 그어 지워냈다. 마녀 짱시룸
엑셀의 가로세로 줄이 모였다 퍼졌다 어지러웠다. 오마이갓 졸려죽겠잖아. 충분히 취하지 못한 휴식에 일을 하는 와중에도 졸음이 야금야금 루한의 정신을 좀 먹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을 쫓아내었다. 설탕을 듬뿍 털어넣은 커피를 들이켰다. 카페인 덩어리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미팅관련 시간이 적힌 쪽지를 보며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아 참"
루한은 손바닥을 주먹으로 툭 내려치고 컴퓨터 화면위로 인터넷 창 하나를 켰다. 혹시나하는 마음과 함께 이메일주소를 빠르게 치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확인하지 않은 사이에 메일함에는 꽤 많은 스팸메일과 광고메일이 쌓여있었다. 마우스 휠을 천천히 돌려가며 재빠르게 메일들의 제목을 확인했다. 이윽고 휠을 굴리던 검지손가락이 멈추고 루한은 환호성이 담긴 비명을 꽥 질렀다. 시발.
"왔다!"
물론, 앞 말은 꾹 삼키고.
***
별 것도 없는 살림이었지만 그 위에 쌓여있던 먼지의 양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먼지떨이로 좁은 집 안을 몇번 휘젓고 나자 먼지가루들이 붕 떠 방안을 부유했다. 콜록콜록, 민석이 잘게 기침했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껴있는 걸레를 물에 흠뻑 적셔 꾹꾹 주물렀다. 희뿌연색의 구정물을 두어번 씻겨 흘려보냈다. 걸레를 반의 반으로 접어 끝을 잡고 비틀자 물이 흠뻑 떨어져내렸다. 창 틀에서부터 바닥, 냉장고위와 앉은뱅이 책상. 평소에 몇배는 움직인 덕분에 온몸이 후끈했다. 더러워진 두 손 대신 입으로 손을 덮는 티셔츠소매를 물어 팔꿈치 위까지 끌어올렸다. 쉴 새 하나 없이 쓸고닦자 몇시간이 채 되지않아 청소가 끝났다. 이불은 구석에 곱개 개어놓았고, 상한음식은 모조리 쓸어담아 쓰레기통에 쳐박아두었다.
"끝났다"
뿌듯한마음으로 나름 깨끗해진 집 안을 둘러보던 중 돌연 루한이 떠올랐다. 민석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책상앞으로 앉았다. 바탕화면에 존재하는 폴더들 중 유일하게 '완결'이라는 꼬릿말이 붙지않은 폴더를 클릭했다. 몇십개의 워드파일이 떠올랐다. 민석은 바로 이메일을 켜고 손을 움직였다. 연락처들중 눈에 띄는 한 이름이 있었다. 김 루한. 몇십번이고 보았던 이름이었는데 루한을 처음 만나고 그 이름을 들었을 땐, 이상하게도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김 루한. 처음으로 그 이름을 발음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만날 일이 없을테지만 이 이름은 계속 보게되겠지.. 햇빛에 반짝이던 샛노란 머리카락과 고른 치아가 다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저의 푸석한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길이 생각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까칠하고 윤기없는 머리카락이 기분나빠 다시 손을 떨어뜨렸다. 민석은 고개를 흔들어 머리속을 떠도는 복잡한 생각을 떨궈버리고 제일 마지막에 쓰여진 워드파일을 메일에 첨부했다. 제목은 죄송합니다로, 메일만 덜렁 보내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긴긴 사과문과 감사하다는 말까지 적어내렸다. 전송.
민석은 컴퓨터를 끄고,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져 누웠다. 손을 천장 위로 들어올렸다. 자그마한 손이 보였다. 핏기도 없고 짧닥한 손 위로 루한의 큰 손이 덮어져내렸다.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아직도 자신의 손은 작디작았다.
"개같다"
웃기게도 오년전에 그만두었던 행동을 다시 하고있었다. 자신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면 내가 정상이 되어있길 바라는 한심하디 한심한 행동. 바뀌지않을것을 알면서도 아직까지도 바라고있었던 것이었다.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루한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민석은 눈가를 슥슥 비비고 일어나 바로 섰다. 자물쇠까지도 잠구어놓은 작은 철상자를 책장안에서 꺼내왔다. 자물쇠 구멍속으로 열쇠를 끼워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고 상자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 속엔 몇 안되는 오래된 사진들이있었다. 민석은 건조한 손길로 그 속을 헤치다가 명함 만한 크기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위에 새겨진 사진은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힘들만큼 흐릿했다. 그 옆에는 김 민석. 자신의 이름 석자가 써있었고 그 아랜,
830326-1xxxxxx
카드 위로 눈물 한방울이 떨어져흘렀다.
루한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자신은 괴물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비밀이었다.
스포쟁이인 저는 이걸 스포하지않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민석이가 말하기 시작하는 3편에서 민석이가 이름보다 나이를 먼저 물어본것도 지금 6편에서 나이를 애매모호하게 말한것도...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골목길 잔혹사는 언제 나올지 저도 몰라요...ㅎㅎ......내 손 완전느림(오열) +)암호닉 Jay 찌인빵 엘모 웬디 언어영역님 감사합니다♡ 그외 신알신,댓글,그리고 지금 이글을 읽고계실 이름모를 독자님들도! 너무너무 감사드려요~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