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연정 w. 채셔
5. 엇갈려버린 길의 끝에 서면
여주는 떨리는 걸음으로 정국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정국은 흐릿한 표정으로 제 상처 부위를 꼭 눌렀다. 아픈 사람의 표정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여주는 정국의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정국의 상처 부위를 만졌다. 피가 잔뜩 묻어 나오는 손을 확인한 여주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정국이 참고 있는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고, 잠겨 흐리터분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게지."
"……."
"나는 괜찮으니, 울지 말거라."
"……."
정국은 숨을 가쁘게 쉬며 여주의 볼을 감쌌다. 숨 쉬기가 곤란한 듯 연신 숨 쉬기를 멈췄다가 한 번에 호흡하던 정국은 입술을 꾹 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가련하게 떨어지는 여주의 눈물을 제 엄지로 닦아낸 정국은 이내 여주의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피로 물든 침의를 보고 있던 여주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정국은 희미한 웃음 뒤로 혼절해버렸다. 허나 꼭 잡은 손만큼은 그 묘연한 정신에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 못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팍 어딘가까지 깊게 난 자창보다 여주의 그 독한 마음 속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여린 상처가 걱정되어서였다. 더 아파서였다.
"폐하, 어의 들었사옵니다."
이내 정국의 치료를 위해 어의가 당도하였고, 그 때문에 여주는 두 시진이나 침전 옆의 다실(茶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여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떠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태형이 제 투박한 손을 내어줬을 정도였다. 지금은 황제의 치료가 중대사인 시점이므로, 다실에 누군가 올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태형은 한결 편하게 여주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다. 그 자그만 온기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태형은 만족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분이어도, 그 작은 마음 한 칸이라도 여주를 위로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태형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태형아, 나는 이제껏 전하만이 내 세상이라 믿었다."
예. 태형은 여주의 손을 어루만지며 온기를 전했으나, 끝내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주는, 울고 있었다. 태형은 묻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열병으로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새로이 여주의 머릿속에 조각, 조각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그 사건 이후에 앓았던 열병은, 그 사건을 잊기 위해 시작된 마음의 병이었을지도 모른다. 태형은 의자에 앉은 여주의 등에 아주 조심스레 제 손을 올려놓았다. 흠칫, 하고 몸을 작게 떨었으나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었으므로 태형은 손을 천천히 움직여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겨내십시오, 마마는 제가 본 어떤 사람보다 강하고 어여쁜 여인입니다. 태형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축 쳐진 등을 쓸었다.
폭군의 연정
정국은 '으윽….'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의가 찢어진 살결에다 다진 약초를 바를 때마다, 살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으득 갈며, 정국은 거칠게 말했다. 그만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 정국의 탁성에 흠칫 놀란 태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치료를 중단하면, 상처가 오래 갈 겝니다. 위에다 붕대를 덧대자, 이번에는 살을 하나하나 도려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정국은 입술 새로 신음을 흘려내며 이불보를 꽉 쥐었다. 헝겊을 꽉 묶고 나서야 태의가 물러갔고, 침전이 한적해졌다. 정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남준을 불렀다.
"폐하,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호석이는 어디 간 게냐."
"폐하를 지키지 못한 죄로 투옥해두었습니다."
풀어주거라. 다짜고짜 들어와 제 이마를 바닥에다 찧으며 비장한 음성으로 저와 호석의 불충을 고하는 남준에게 짧게 명령했다. 의문스러운 눈길로 정국을 바라보자, 정국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호석의 잘못이 아니다. '허나….'하고 반박하려던 남준의 입을 정국은 단 한 마디로 아주 쉽게 막아왔다. 내 사람이 얼마 없구나. 남준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이 넓은 궁궐 안에, 천 명이 넘어가는 거대한 집단 안에, 정국의 사람은 남준, 호석, 그리고 윤기 등 도합 다섯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슬픈 일이 아닌 것인 양 행동하는 정국의 눈동자에는 아주 뿌리 깊은 외로움이 박혀 있었다.
"………여주는."
이내 문득 떠올랐는지 정국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주의 생각이 나자마자 익숙하게 걱정부터 떠올랐다. 그 아이, 괜찮은 게지. 다소 성급하게 물어온 정국은 제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혜비 마마는 폐하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다실에서 기다리셨다가, 치료가 끝난 뒤 태의를 뵈시고는 혜비전으로 돌아가셨다 합니다. 정국은 그제야 베개에 제 머리를 뉘였다. 그 아이, 그 일 있고나서 한동안 열병이 났었다. 정국은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 부위가 꽤나 아픈 듯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그러니 잘 보살펴야 한다. 이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말들 또한 여주에게 닿아있는 말들이었다. 어찌 이리 제 몸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남준은 안타까워 제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
"그 호위무사 놈이라면 지극정성으로 보살필 테지."
"…태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찌 되었든 그 자에게 전하거라."
"………."
"여주가 열병이 나 사경을 헤맨다면, 그 자를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남준은 '예.'하고 읍을 했다. 남준이 명을 전하기 위해 나가자마자 정국은 참아왔던 신음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어흑…. 한동안 침전에는 거칠고 둔탁한 신음과 날숨이 가득했다. 제 호흡이 조금이나마 일정해진 후에야 정국은 눈을 감았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 사건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아파하고 있을 여주의 걱정 밖에는. 그 사건은…. 정국과 여주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날이었다. 정국에게는 가장 소중한 날이기도 했고, 가장 악독한 날이기도 했다. 인연이 악연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때는 정국이 열 살이 되던 해였다. 따스한 봄기운이 들기 시작하던 즈음, 황궁에서는 태자 석진의 생일을 맞이해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정국은 이런 연회를 싫어했다. 제가 연회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혹자가 정국의 생각을 읽었다면, 그 자리에서 반역죄로 목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정국은 그리 어리석은 사내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민하고 민첩한 쪽의 정국은 제 마음 속의 야망을 항상 쳐내왔다. 이렇게 천자의 아들에게 투기가 생길 때면, 아예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수 밖에 없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태자를 향해 축배를 드는 것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정국은, 제 아비가 승상과 얘기하고 있는 틈을 타 결국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내 정국은 태자전을 빠져 나와 태자전의 뒤뜰에 닿았다. 궁정이었다. 가득 만개한 배꽃 아래 선 정국은 가만히 달을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께서 어인 일로 궁정에 와 있으십니까.'
'…….'
'이 연회는 오로지 태자 전하의 연회 아니십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 달구경을 방해하는 자가 있었다. 계집이었다. 어두워 보지 못한 것인지 정국 저를 태자 전하, 라고 불렀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으나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혹여나 제가 태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그 칭호도 듣지 못할 터이니. 그저 태자 전하라는 말이 좋았기에 우뚝 선 채 즐기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참으로 달이 밝지요? 달도 태자 전하의 탄신일을 경하 드리나 봅니다.'
바람에 실려 제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꽤나 고왔다. 그리고 한껏 설렌 아이 같은 말투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말씀을 않는 것을 보니 혼자 있고 싶으신 걸 제가 괜히 방해했나 봅니다. 쉬십시오. 허나 아무리 말을 던져도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실망한 것인지, 계집은 한 번 읍을 하며 안녕을 고했다. 정국은 결국 성급하게 몸을 돌려 계집을 바라보았다. 계집은 놀라 정국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태자전에 계시기에, 태자 전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
'제 불찰이니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당황했는지 민망한 자세로 다시 읍을 한 계집을 정국이 서둘러 붙잡았다. 계집의 눈이 더욱 커졌다. 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정국은 계집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계집은 '김여주라고 하옵니다만….'하고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정국과 여주의 눈이 마주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순간 여주의 볼은 홍조로 물들었고, 정국은 그 모습을 제 눈동자에 담으려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반란이다! 하고 크게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놀라 옆을 바라보자 연회장이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피바람이었다. 제 오라비가 아비를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발견한 여주는 '오라버니!'하고 연회장으로 뛰었다. 별안간 여주가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한 정국은 그대로 여주의 뒤를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여주는 반란군 앞에 길을 막히고 말았다.
'이 년, 좀 쓸 만하구나.'
'…무엇하시는 겁니까! 저는 승상 어르신의 금지옥엽입니다. 비키시지요.'
태자전 궁정이라 아직 조용한 틈을 타 반란군 병사 하나가 이쪽으로 침입한 것이었다. 지원군이 도착한 것을 보고 이쪽으로 잠시 몸을 피신한 것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쓸만한 계집 하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벌벌 떠는 모양새가 대뜸 병사의 시각을 자극했다. 태자전 궁정이라면 쉬이 사람들이 들어올 리 없겠다 여긴 병사는, 여주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바로 가슴을 만지며 희롱했다. 싫습니다, 놓아주세요. 여주가 떨며 부탁했으나 병사는 멈출 생각을 않았다. 결국 제 치마까지 찢겨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 여주는 반쯤 실신해 울먹였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제 다리를 만지며 희번덕한 눈을 부라리던 병사가 억, 하고 제 몸 위로 풀썩 쓰러져버린 것은. 정국이었다. 정국이 병사를 베어버린 것이었다. 이내 제가 입고 있던 의복이 병사의 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여주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듯 헐떡거렸다. 곧 몸을 질질 끌며 벗어난 여주의 머리를 정국이 받쳐 들었다.
'주, 죽은 것입니까.'
'괜찮으니 떨지 않아도 된다.'
여주를 달래주는 목소리가 참으로 다정했다. 정국도 칼로 누군가를 베어본 것이 처음이었기에 제 등줄기로 서늘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제 앞의 여주를 달래기에 바빴다. 엉엉 울던 여주가 한순간 비명을 질렀다. 놀라 눈을 크게 떴는데, 그 뒤로 제 등의 살가죽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고통이 찾아들었다. 여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울부짖으며 숨을 헐떡이는 여주를 차마 달래주지 못할 정도로 정국은 고통스러웠다. 이내 최후의 반격을 한 병사는 풀썩 죽어버렸고, 정국은 고통을 참기 위해 잔디를 꽉 쥐었다. 제 무릎 새로 피가 물들었다. 제 어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미끈거리고, 축축하고, 서늘한….
'나는 괜찮다.'
'…도련님, 저 때문에…….'
'네가 괜찮으면 됐다.'
정국은 혼신의 힘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여주를 안아들었다. 이내 반란군이 모두 소탕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정국은 여주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승상이 있는 곳까지 여주를 데려다주었다. 그 순간에도 제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멎을 생각을 않았다. 오히려 더 벌어져 소름이 돋는 기분에 정국은 입술이 찢어질 때까지 신음을 이로 짓눌렀다. 여주가 승상에게 안겨 제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기둥을 잡고 버티고 있던 정국은 그제야 풀썩 쓰러져 정신을 놓았다. 곧 저를 찾은 남준에 의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정국 자신도 의문이었다. 왜 여주를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까지 걸었는지. 병사가 여주 희롱하는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제 몸을 휘감았는지. 저를 태자라고 불러준, 천자라고 말해준 유일한 여인이었기에 정국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았을 것이다, 혹은 어쩌면 마주쳤을 때부터 연정이었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정국 저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몇 없었다.
며칠 뒤에 상처를 모두 치료한 이후, 정국은 제 아비와 승상의 집을 찾았다. 정국은 보름이 훌쩍 지난 시일이었음에도, 여주가 제게 '태자 전하'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와 홍조로 물든 붉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비와 승상이 꽤나 친해진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라도 여주를 볼 수 있으니. 며칠 동안 여주의 반호로 들었으나 마주칠 수 없었다. 열병이 들었다 했다. 어찌 그 일을 겪고 제정신일 수 있으랴.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 그러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허나 며칠을 기다려 본 것은 결코 제가 생각하던 유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태자 전하가 저를 구하셨다 들었습니다.'
'저는 그저 반란군을 소탕했을 뿐입니다. 열병이라고 들었는데, 차도는 있으십니까.'
…정국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으나, 여주를 구한 이가 태자로 둔갑되어있었다. 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첫 연정이 뒤틀려져 지금껏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 순간이었다.
덧붙임
궁디 토닥토닥해주세여
열심히 오져?
내일도 단편 글로 올게여 ^ㅁ^
종강을 해서 시간이 남아돌아여
글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
세 명 중에 골라 보세여
낮누
호비
석찌
내일 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아됴스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