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과거 속에는 그날 떴었던 달도,
구름도,
네가 입었던 옷도
네 목소리도 변함이 없었지만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다시 찾은 네 세상 속엔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니 물론 네 옆의 나도, 9년을 같이 동고동락했던 우리의 추억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깨끗이 사라져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내 눈앞의 널 붙잡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너 정말 나 기억 안 나? 내 이름 알잖아 너. 우리 8년이나 사겼었는데 정말 기억 안 나? 윤기야 제발... 장난치는 거면 이쯤 해. 나 이제 재미없어. 응?"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네게 애걸복걸하며 몇 번이나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그저 모른다는 신경질적인 대답뿐이었다. 처음엔 네가 그저 나를 놀리려 장난치는 줄 알았다. 언제나 장난이 지나칠 정도로 많던 너였으니까.
그래도 내가 눈물을 보일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히 달래주던 너였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든 말든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멀어져 가는 너를 바라보니 확실히 나를 잊은게 틀림없었다.
그래, 다시 찾은 네 세상속엔 너는 있었지만 내가 없었다.
네가 없는 세상
Ep. 02 내가 없는 세상
네가 멀어져서 흐려지는지 눈물이 앞을 가려 흐려지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옷소매를 늘어트려 눈 주위를 서둘러 훑고는 시계를 바라보니 10분. 딱 10분 남짓 남아있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네 뒷모습을 좇아 서둘러 따라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네가 사고를 당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3월 10일이 되었음에도 내가 없는 세상 속의 너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문을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문을 닫더니 잠시 후 네 방 불이 커졌다.
아, 참 오랜만에 보는 네 집이었고 참 오랜만에 보는 네 방 불빛이었다. 사실 시간으로 따지자면 하루도 채 안될 테지만 그 하루를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한 나에겐 그 불빛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버린 건지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게 네 방을 쳐다보니 또 청승맞게 눈물이 흘렀다. 네가 무사한 것에 대한 안도감의 눈물인지 나를 잊어버린 것에 대한 서운함의 눈물인지 복잡 미묘한 감정 속에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나는 그냥 그렇게 울었다.
이렇게 울고만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머릿속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대도 망할 눈물샘은 윤기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날 잊어버렸단 배신감에 엉엉 울고 있었고 내 마음도 그에 동조해 엉엉 울고 있었다.
나도 그냥, 그냥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느 시도로도 사라져버렸던 네가 살아있단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단 뜻이었고 그렇다면 더더욱 시간을 헛되이 쓸 수 없었기에 이미 헐을 대로 헐어버린 눈 주위를 다시 세게 비비고 천천히 일어섰다.
마음을 다잡은 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단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익숙한 동네, 익숙한 골목길, 나란히 이웃한 너와 내 집. 모든 것이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나만 없었다. 이곳에 더 있어봤자 괜히 기분만 더 울적해질 것 같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작은 공원이었다. 작은 공원이지만 나름 연못도 있었고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던 벚꽃나무가 가득해 봄이면 항상 공원 끄트머리 벤치 아래에서 너는 콜라, 나는 사이다 한 캔씩 들고는 몇 시간이나 그저 벚꽃나무를 바라보던 게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네가 없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주 가던 벤치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꾸역꾸역 옮겨갔다. 벤치에 누군가 앉아있단 걸 알았을 땐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혹시 너일지도 모르는 그 인영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혹시나 하며 너일지 모를 그에게로 다가갔지만 역시나 네가 아니었다.
네가 아니랄 걸 대충 짐작한 채 옮긴 발걸음이었지만 피어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괜히 아무 죄도 없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 많고 많은 벤치 중에 하필 왜 거기 앉아서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멋대로 실망하게 만드냐고. 마음 같아선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새어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쉰 채 근처 아무 벤치나 털썩 걸터앉았다.
네가 내 옆에 없어도, 내가 네 옆에 없어도 아무 변함이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꽃나무도, 공원도, 페인트가 다 벗겨진 벤치도 그대로였지만 너와 내가 앉아있던 그 벤치엔 다른 사람이 앉아있고 난 그 주위에 가지도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쓸쓸하게 동떨어져있다.
**
아까까지의 나의 감정이 슬픔과 무력함으로 뒤엉켜 있었다면 이제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윤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존재가 잊혀진 거라면 앞으로 내 신분은 어떻게 증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서 너를 지켜가며,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간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에선 이럴 때 누군가 뿅 하고 나타나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을 도와주던데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스쳐가는 시민 1쯤이었는지 아무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현금이라도 잔뜩 챙겨오는 건데. 주머니를 아무리 탈탈 털어봐도 전 재산이 5,200원이란 사실은 안 그래도 암울한 내 현실을 더욱 까맣게 만들었다. 애꿎은 모래만 신발 끝으로 툭툭 건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던 중에 예의 그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지금 누구 도와줄 사람 없냐고 생각했지."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 싶어 고개를 아예 무릎에 묻었다.
"안 들리는 거야, 안 들리는 척하는 거야?"
요샌 환청이 대답도 하나? 싶어 고개를 들자마자 낯선 얼굴이 가득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그치?"
"ㄴ.. 누구세요?"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어봤지만 그는 내 노력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현금도 없는 것 같고."
"누구냐니까.. 요?"
"잘 곳은 당연히 없을 테고."
"아니 누구냐니까?"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궁금해?"
갑자기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놀라 나도 모르게 얼굴을 밀치며 말했다.
"ㅁ.. 미쳤어요?"
"아니, 네가 나 궁금해하니까 기뻐서."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얼굴이 붉어졌다.
"ㅁ..미친거맞네."
"원칙대로라면 가르쳐주면 안 되지만."
"네가 궁금해하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나도 너처럼 여러 번 시간을 되돌렸어."
"어쩌면 너보다도 많이."
***
바로 오려고 했는데... ㅜㅜ 어쩌다 보니 엄청 늦어졌네요 죄송합니다ㅜㅜㅜㅜ 앞으로는 빨리빨리 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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