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근사한 우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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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 시점]
그녀는 내 한 쪽 팔을 끌어 안은 채로, 잠에 들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불편한 곳이 있나 싶어, 팔을 뺀 뒤 살피려는데. 내가 조심스레 움직이자 그녀가 내 팔을 더욱 단단하게 잡으며 뒤척인다. 그런 그녀를 자세히 살피자, 그녀의 미간 사이가 짐짓 찌푸려져 있다. 나는 반대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펴주었다.
예쁜 꿈만 꿨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
[여주 시점]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올라 탔다. 사실 그가 나와 함께 스페인에 오겠다고 할 때부터, 그럼 그는 어디서 지낼지가 제일 의문이었는데. 그는 어디서 지낼 거냐는 나의 물음에 태연하게 '너가 우리 집에서 지냈던 기억은, 싹 다 어디 버렸나봐.' 하고 답했다. 그리고 그 답은 곧, 그 역시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는 거겠지.
공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었다. 그는 장시간의 비행과 이동이 피곤했는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팔을 쭉 뻗었다. 익숙한 스페인 풍경에 낯선 그가 불쑥, 들어왔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기사님이 전해주는 짐들을 받아들고는 내게 안 가냐고 묻는 걸 보니. 나는 괜히 진 것 같은 기분에 퉁명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는 걸음을 빨리해 나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왜.' 나는 그의 물음에 딱히 무어라 답 할 이유도 없어, 더욱 억울해졌다. 사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여기까지 같이 온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뭘까. 우리는
그와 내 방은 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거실이 있었고, 거실 옆으로는 부엌이 있었다. 복층은 딱히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창고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대충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짐을 풀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나 역시 그와 엮인 잡생각들은 버리고, 짐정리를 시작했다.
내가 방에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제 짐 정리를 마치고, 거실에 있는 전자제품 선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언제 옷을 갈아 입었는지, 한결 편해진 복장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의 편한 복장만 보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의 일부가 된 것 같아서, 그게 참 부끄러웠다. 그는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뭐하냐."
그러게. 나 지금 뭐하냐.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휙 돌리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그는 자꾸만 제 물음들에 답이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그는 내 앞을 막아서고 물었다.
"자꾸 왜."
"...아 좀. 비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
"내가 뭐 잘못했어?"
나는 그의 물음에 대충 아니라고 둘러댄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평소와 다른 내가 이상하면서도 제 물음에 얼버무리는 나한테 짐짓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 이게 아닌데.
*
나는 무표정으로 마지막 거실 정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엄청나게 눈치 보면서. 나는 괜시리 먼지가 다 닦인 곳을 닦는 척 하며,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내가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헛기침도 하며.
"큼큼."
"...뭐"
그는 또 순식간에 변해버린, 내 태도에 건조하게 답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 지금 되게 별로다. 나는 그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까 싶어 고민하다가 문득, 택시를 타고 오던 길에 본 동물원 표지판을 떠올렸다. ...동물원 가자고 해볼까. 싫다고 하려나. 그는 이번에도 제게 다시 답이 없는 나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아 몰라. 아무 말이라도 하자.
"...우리 동물원 갈래?"
그는 내 제안에 제 행동을 멈췄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성급했나. 그가 어릴 적 나온 성금방송에서 부모님과 동물원에 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게, 마음 쓰여서 한 말이었는데.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뭐.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방 정리만. 어?"
"..."
"계속 몇 달 동안 할 것도 아니고..."
"..."
"지리도 파악하고,바깥 공기도 ㅆ"
그는 내 마지막 말을 끊으며,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혹여나 그에게 한 대 맞을까 싶어,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때 없는 벽에 등이 닿았고, 나는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내 시선을 집요하게 따르며 물었다.
"그거 말하자고 계속 눈치 본 거야?"
"..."
이거 말하자고 눈치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만 보면 내가 부끄러워서 그랬다. 라고 답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하지만 내 속을 알 리 없는 그는, 또 연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물었다.
"서로 아팠던 거, 치료해주는거야?"
"...뭐... 그냥... 기분 나빴으면 미ㅇ"
"그럼 나는."
그는 정말 조금만 어긋나면 닿을 거리에서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하며.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그 때문에 자리를 좀 벗어나볼까 해서, 옆으로 조금 걸음을 옮겼는데. 그는 장난스레 내가 향하는 쪽의 벽을 제 손으로 막으며, 묻는다. '벽치기 이런 건, 학생들 취향 아닌가.' 나는 그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내 두 손으로 가리고 답했다. 벽치기고 뭐고, 좀... 비켜...주라... 그러자 그는 짖궃게 웃으며, 나와 다시 눈을 맞춘다.
"서로 아팠던 거 치료해주는 거면."
"..."
"난 벽치기 말고."
"...야."
"네 가족이 되줄게."
"..."
나는 그의 말에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치웠다. 그러자 그는 한껏 유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 동생.
이 중에 골라.
다 하기는 힘들 것 같아.
아.
너도 내 가족 해줘야 돼.
알지?
나는 그의 마지막 물음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사이로도 정의되지 않는 우리 사이를 단정 지으면서도, 더욱 헷갈리는 단어를 아주 쉽게 뱉는 그였다. '가족' 가족... 서로한테 가족이 되어줄 만큼이 될까. 우리가. 그는 별 다른 생각없이, 장난스레 한 말 같은데. 괜히 나 혼자 의미 부여하는 건가. 얘는 정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얘가 좋은 걸까. 나는.
**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못한 채로 향한 동물원이었다. 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기했다. 그래. 좋으면 좋은 거고, 이게 사랑이면, 사랑인거고. 하고 싶은대로 하자.
*
동물원에 입장한 그는 모든 게 낯선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곧 내 옆으로 바짝 붙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굳어 있는 그였다. 문득 그의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올라, 그의 큰 손을 덥썩 잡아챘다. 하고 싶은대로 하기로 했으니까. 그러자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깍지를 껴왔다. 비행기와 같았으면 능글거리는 대사와 함께 나를 놀렸을 텐데. 지금의 그는 정말로, 마주 잡을 손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두 손를 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
그는 호랑이나 코끼리 같은 큰 동물은 겁 없이 가까이 다가가 관찰 하면서도, 토끼나 원숭이 같이 작은 동물 앞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특히, 토끼를 만져보라는 사육사의 말에 기겁하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아니. 자기 덩치는 저거에 몇 배나 되는데. 어울리지 않는 그의 행동에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내가 물었다.
"왜? 무서워?"
"..."
"어이구. 호석이 무서웠어요?"
그는 어린 아이를 달래는 내 말투에 제법 샐쭉하게 눈빛을 쏘았다. 동물원에 와서 그런지, 더 어려졌네. 그는 자꾸만 제게 무섭냐고 되묻는 내게 아니라고 답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저렇게 작고... 그런 건 어떻게 만져."
그는 정말로 진지했다. 순간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진짜 몰라."
"..."
"우리 회사 와봤잖아. 사내새끼들만 엄청 많은 거."
"...그랬지."
"...그리고 맨날 총이나 들고 다니고... 그럴 줄만 알았지."
그가 말을 하면 할 수록, 내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아. 그러고 보니 첫 만남에서 고양이도 막 괴롭히고 그랬지. 이 남자.
하지만 지금 보니, 그는 정말로 저보다 작은 것들을 어떻게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 귀엽다.
"...그래서 저렇게 작은 건 어떻게 만지고 귀엽다 해주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예쁘다 하고 살살, 만져주면 돼."
"...그러다 다치면."
내 답에 그러다 다치면 어쩌냐는 그였다. 아니. 나 지금 정호석 왜 이렇게 귀엽냐. 진짜... 정신 차리자. 나는 그의 큰 손을 잡아 끌어, 사육사가 안고 있는 토끼의 머리 위에 살풋 올려두었다. 그는 굳은 몸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두 눈은 내게 '도와줘.' 하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참던 미소를 가득 피워내며,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가 토끼를 쓸어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점차 풀리며, 그의 눈에 하얀 토끼가 오롯하게 담겼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겹쳐졌던 내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그가 서툴지만 혼자서 토끼를 만져주고 있었다. 참 예쁘게 웃으면서.
나는 그에게서 조금 멀어져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담았다. 그들을.
예뻤다. 모든 게.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인 것 같았다.
*
마실거라도 사와야겠다 싶어, 그를 쉼터에 두고는 자판기에 다녀왔다. 혼자 있을 그가 심심할까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는 한 유모차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있었다. 뭐하는 건가 싶어, 반대편으로 티나지 않게 걸음을 옮겼는데. 그는 내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유모차 속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작고 귀엽고 예쁘니까."
"..."
"이렇게 살살, 예쁘다 - 해주면 된다고 그랬어."
"..."
"너 눈이 진짜 예쁘다."
"..."
"손도 엄청 귀여워."
"..."
"아. 혹시 내가 무섭고 불편한 건 아니지?"
유모차 속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는 제 아이에게 무어라 자꾸 말을 거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의 옆에 서며, 그가 하는 말들을 통역해주었다. 사온 음료 한 개를 건네며. 그러자 아이의 부모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애인이 참 근사하네요.
아이와 눈도 맞출 줄 알고. 대화할 줄도 알고.
순간 애인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힌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 제가 오늘 알려준 거예요. 원래는 자기보다 작은 건 쳐다도 못 보는 바보여서."
내 대답을 들은 그들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참 근사하네요.
당신의 말을 저렇게 잘 이해한, 당신 애인만큼요.
그는 뒤늦게 뒤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살폈다. 언제 왔어. 왔으면 말을 하지. 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아이의 부모에게 인사를 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부부는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좋은 날이었다.
*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모든 게 정리되었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뭐,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지금의 나는 지금 내 옆의 그가 좋다. 장난스러운 그의 농담들과 그 농담들로 감춰진 상처 그리고 아이 같은 순수함까지. 그게 다 좋다. 집 앞에 차를 세운 뒤 내린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마을 전체가 저녁시간이 된 건지, 달큰한 밤 냄새가 저녁공기와 함께 뒤엉켜 있었다. 아... 배고파.
"배고프지?"
"응. 맛있는 거 먹자."
그 역시 배가 고팠는지, 내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맛있는 걸 먹자고 답한다. 나는 집 안에 뭐가 있을까 싶어, 서둘러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는 갑자기 내 한 쪽 팔을 잡아왔다. 나는 그에게 잡힌 한 쪽 팔과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러자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투박하지만 조심스럽게.
"작고 예쁜 건."
"..."
"이렇게 예뻐해주는 거니까."
"..."
"고마워."
"..."
"오늘 좋았어. 전부 다."
작고 예쁜 건 이렇게 예뻐해주는 거라며, 내 머리칼을 쓸어내려주는 그였다. 덕분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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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찾아왔죠? 글의 뒷부분이 사라진 게 속상하기도 하고 또 얼른 만나고 싶어서, 시골 내려오는 길에 적어봤어요!
다들 추석 잘 보내세요! 스트레스 받는 일들 없으시길ㅜ_ㅜ
암호닉은 다음 화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올릴게요 :)
아. 그리고 여러분이 해주시는 일상적인 이야기들 참 좋아요. 고마워요!
이야기 나눠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