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너의 품
15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그와 같이 있는 공간이며 공기며 모든 게 간질거렸다. 그가 의미없이 건네는 아침 인사에도 혼자 심장이 마구 뛰어 다시 이불 속으로 직진한 일도 적지 않고, 씻고 나와 제 젖은 머리를 터는 행동에도 상상력이 마구 뻗어나가 얼굴이 붉어지기 쉽상이었다. 그는 자꾸만 제 앞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나를 초반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싶더니,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냥 그러려니 - 하고 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와 함께 지낸 지도 어언 일주일이 넘었다. 이곳에 와서 오늘 처음으로 지사에 다시 출근한 나는,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내게 스페인에 들어왔으면, 오자마자 왔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그들에게 짐정리를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고,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그들 중, 제이슨이 얄궃게 눈을 뜨며 물었다.
"남자랑 같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소문이야 사실이야?"
제이슨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그들은 이미 잔뜩 나를 놀릴 준비가 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러자 암묵적인 수긍으로 받아들인 그들이 나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소란스럽게 행동했다. 뭐야! 남자친구야? 아니. 같이 온 거면... 남편이야? 나는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한 번 그리고 남편이라는 단어에 소스라치게 한 번 놀라며,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지, 내일 저녁 우리 집에 집들이 겸 환영회를 하러 오겠다며 일방적인 약속을 잡았다. 아직 그에게 허락도 맡지 못했는데. 나는 다급하게 그들을 말렸지만, 그들은 퇴근 시간에 맞게 제 짐들을 챙겨 나가며 말했다.
"집에 숨겨둔 꿀. 우리도 같이 좀 보자!"
순식간에 내 애인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꿀로 변해버린 그였다. 꿀이라니. 꿀... 허니... 허니... 아니. 나 뭐래.
그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
그가 집 근처 슈퍼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서 리모콘으로 제가 보고 싶은 채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를 곁눈질 하며, 내일 그들이 온다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는 딱 봐도 무서운 영화에 채널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나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을 놓칠 뻔했는데, 그는 또 귀신같이 그걸 잡아채고는 다시 내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가져와, 아이스크림 통을 감싸고는 다시 내게 쥐어준다. 아니. 이러면 빨리 녹는데...?
"뭐해?"
그는 내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소파에 제 몸을 기대며 답했다. '손 차갑잖아.' 무심하지만 다정한 그의 답에 나는 괜히 그를 따라,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가 튼 영화는 뭐가 자꾸 나오고,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아이스크림 통을 꽉 쥐며, 무섭지 않은 척을 해냈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간간히 하품까지 하는 걸 보니. 시간이 흘러 영화는 중반부를 향해 갔고, 여자 주인공의 잘린 목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클로즈업 됐다. 아니... 저런 걸 만든 사람은... 정서가 괜찮은건ㄱ... 엄마야! 나는 순간 음산한 효과음과 함께 화면을 가득채운 여자의 얼굴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는 내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 통을 바닥으로 내려두고는, 내 뒤로 팔을 뻗어 어깨동무를 한 채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무서우면 보지 말지, 이걸 뭐 자꾸 보고 있어."
"..."
"아이스크림 통 다 찌그러졌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손을 옆으로 살짝 치워, 바닥에 내려진 아이스크림 통을 바라봤다. ...원래의 동그란 통의 모습은 어디갔는지. 사방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괜히 더욱 부끄러운 마음에 내 눈을 가리는 그의 손을 치웠다.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 하며. 그러자 그는 '그래. 그럼' 하며 제 손을 치우다가, 화면을 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어!' 하며. 나는 또 나를 놀리는구나 싶어 아무렇지 않게 화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이번에는 잘린 아기들의 목 여러 개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의 품을 파고 들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물론 계산된 행동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냥 옆에 있는 걸 안은 건데... 그게 그였고. 내 팔이 둘러진 그의 허리는, 정확하게 그의 배는. 어... 되게... 단단했다. 물론 이것도 느끼려고 느낀 게 아니고. 그냥 고개를 묻었는데. 단단했던 거다. 정말로!
"무서워서 잠은 혼자 자겠어?"
"...ㄷ. 당연하지!"
"그럼."
그는 제 품에 안겨있는 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 좀 치우고, 얼른 들어가서 자.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며 뻔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제법 나는 무섭지 않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씩씩하게 방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춰섰다. 아. 내일 회사 사람들. 나는 여전히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내일 회사 사람들이 환영회... 뭐 그런 거 오고 싶다는데. 괜찮아?"
그러자 그는 '당연하지.' 하고는, 내게로 걸어와 내 머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
"작고 예쁘니까."
"..."
"잘 자."
*
"...자?"
왜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공포영화를 보고 난 날 밤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무섭게 불고... 막 그러던데. 이건 드라마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데, 왜 비가 이렇게 오고. 바람이 세상 모든 걸 부실 것처럼 부는 걸까. 나는 결국 참다 못해, 떨리는 몸을 이불로 감싸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천둥이 이렇게 내리치는 줄도 모르고, 잠에 들어있었다. 나는 그의 침대 옆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괜히 자는 사람 깨우지 말자 싶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언제부터 잠에서 깨어 있었는지 내 손목을 잡아채고는 제 옆에 나를 눕혔다. 그의 급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내가 낮게 엄마야. 하고 외치자, 그는 나를 제 품에 안고는 제 머리 위에 제 턱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는 제 큰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자."
"..ㅇ, 응."
"얼른 ㅈ"
"엄마야!"
그가 얼른 자라는 말을 이을 때쯤, 천둥이 내리쳤다. 단언컨데 태어나서 들은 천둥 소리 중에 최고였다. 분명 혼자였으면 벌써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는 내 비명 소리에 저도 놀란 듯, 나를 더욱 단단히 끌어 안으며 내 귀를 막아주었다. 별 다른 말 없이. 그냥, 귀를 막아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신기하게도.
**
[호석 시점]
그냥 눈에 보이기에, 튼 영화였다. 물론 공포영화라는 것 쯤은 알았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덥썩 안기면서 반응할 줄은 몰랐지.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작은 손이 제법 붉고 차가워서, 수건으로 통을 감싸주었다. 우리가 이럴 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마주잡아도 되는 사이면, 좋을텐데. 나는 아이스크림 통을 구겨가면서까지 무섭지 않은 척을 하는 그녀가 귀여워, 끝까지 채널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미 본 영화였다. 그래서 어느 장면에서 뭐가 나오고, 그런 것쯤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제 좀 잔인한 장면이 나오겠다 한 장면에서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내 품을 파고 들었다. 나는 하마터면 크게 소리내서 웃을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그녀는 제 작은 몸을 내게 딱 붙이고는 떨어질 줄 몰랐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 어떨까 싶었다. 지금보다 더 놀라려나. 나는 내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귀가 화끈거려왔다. 그녀가 안겨 있기에 다행이었다. 아. 아닌가. 한 번 붉어진 귀는 그녀의 작은 달싹거리는 움직임에도 쉽게 달아올랐다. ...기분 이상해.
혼자 잘 수 있냐는 내 물음에 당당하게 방으로 모습을 감춘 그녀였다. 내일 제 회사 사람들이 집에 오는데 괜찮냐는 조심스러운 물음과 함께. 참. 물어볼 것도 많다. 제 집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방으로 향하기 전에,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이것도 이렇게 떨리는데. 이마에 입맞춤은 무슨.
*
그녀와 함께 이곳으로 온 후에, 단 한 번도 악몽을 꾼 적이 없었다. 약을 먹은 적도 없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 줄도, 천둥이 이렇게 몰아 치는지도 몰랐다. 그 모든 요란스러운 소리들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계속 잠에 들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그 모든 것들을 뚫고, 들려왔다.
그게 신기해서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날카로운 소리들이, 다 묻혔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없는 내가 자는 줄 알았는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그녀였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내 옆에 눕히고는, 그녀를 내 품에 가뒀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내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왔다. 비록, 나는 오늘 밤 뜬 눈으로 있겠지만. 그녀는 이런 내 속을 모른 채로, 내 품에서 제 작은 손을 조금씩 움직이기 바빴다. 꼼지락 꼼지락.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데. 순간 강한 천둥이 내리치고, 그녀는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의 비명을 핑계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더욱 가까이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귀를 조심스레 내 손으로 덮어주었다. 잘 자라고.
손 그만 꼼지락거리고.
나 간지럽게 그만하고.
예쁜 꿈 꿨으면, 해서.
16화 미리보기 그가 누구냐고 묻는 그들의 말에 무어라 답해야 하나 싶어서, 머리를 굴리는데.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한 그가, 내게 묻는다. '뭐라고 한 거야?' 나는 그에게 대충 아니라고 둘러댄 뒤, 그들에게 답했다. "친구야." 내 답변에 그들이 야유를 보내온다. 친구랑 이렇게 다정하게 있는다고? 너가? 말도 안돼! 나는 그들의 야유에 당황하며, 머쓱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내 옆에 앉은 그는, 핸드폰 화면을 내게 보이며 제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그가 내게 보여준 화면에는 '구글 번역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번역기 안에는 '친구입니다.' 라는 글자가 있었고. 그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친구는 아닐텐데. 우리가." 그리고는 제 말을 끝으로 내게 짧게 입을 맞추고는 멀어진다. 동시에 그들의 환호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맞네! 꿀!" "역시 남편이었나봐!" "아니야. 아직 결혼은 아닌 것 같고... 남자친구?" 그의 핸드폰 번역기는 아직 꺼지지 않은 건지, 제이슨의 첫 번째 말을 번역했다. '맞네. 꿀.'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다들 추석 잘 보내셨나요? 긴 연휴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또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벌써부터 지치고 싫으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돌아갈 일상이 있다는 것도 참 축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
그리고 지금 고등학교 3학년 분들은 수시 원서를 접수하더라구요.
많은 행복이, 최대한의 행복이 여러분한테 향했으면 해요.
비록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지만 - 아무것도 몰라서 더 많이 아는 우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딘가에서 여러분의 행복을 비는 사람이 있어요. 힘 냈으면 해요!
암호닉은 계속해서 정리해서 오겠다는 말만 하는데, 제가 댓글이 너무 늦게 열리더라구요!
그래서 핸드폰으로 확인해서 올리려구요...! 오늘은 정말 올리겠습니다 :)
다정한 사람들
혹시, 12화 후로 신청하셨는데 없으신 분들은 꼭 말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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