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말하지 않아도
13
그에게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순간, 모든 결정은 끝났다. 사실 결정이라는 게 있었을까. 내 사람들은 이제 내 사람이 아니였으니.
전부 다, 순차적으로 진행 되어갔다.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받아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 문제도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집에 두고 갈 물건이라고는 아빠가 20살 생일 선물로 사준 자동차 한 대와 엄마가 사준 여행 캐리어 뿐이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출국금지 신청이 떨어지기 전에 출국을 해야 했다. 걸릴 것이 없었지만, 수순이 복잡해지면 메스컴의 관심만 뜨거워질 게 뻔했다. 나는 빠르게 통장을 비롯한 카드 정리를 마쳤다. 집으로부터 미리 상속된 지분의 돈과 지위를 포기했다. 정호석 그의 친구이자 나와 몇 번 대화를 나눠본 김남준이라는 남자가 이 일을 도왔다. 그와 함께 일을 하기 전에는 꽤나 이름 날리는 변호사였다고 했기에. 그리고 그 말은 정말 사실인 듯 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완료된 서류와 각서가 내 두 손에 들려졌기 때문이다. 첫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사람이었는데,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기꺼이 내 변호사가 되어준 그는 내게는 출국금지가 이유가 될 재산과 행적이 없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기도 했다. 떠나기만 하면 됐다.
*
정호석과는 그 사이 꽤 많이 가까워졌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제 부모님에 관한 언급과 내 가족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때 자신에게 오라는 그 말로 모든 게, 설명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굳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정호석은 생각보다 훨씬 유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집을 나온 이후, 그의 집에서 일주일 남짓 생활했는데. 그는 내가 방에서 나오기만 해도 신기한 듯,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살풋 미소지었다. 또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떨어져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워두면 또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한 번은 정신없는 중에 지나치게 길어진 손톱 좀 자르려, 그에게 손톱깎기가 어딨냐 물었는데. 그는 소파에 앉아 있던 제 몸을 일으키다 다시금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 미소 지었다. 나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그의 웃음에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어?"
하지만 그는 내 물음에도 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는 제 검은 눈동자에 나를 담으며, 답했다.
"신기해서."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뭐가 신기해.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옷을 올려주었다. 잠옷이 따로 없어 그의 옷을 빌려 지내는 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게 닿은 그의 손길이 부끄러워,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그는 아직 물기를 머금은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손을 뻗어만져보았다. 좀처럼 짐작되지 않는 그의 행동들에 부끄러워지는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약하게 밀었다. 곧이어 그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헛기침을 뱉으며 손톱깎이를 찾아나섰다. 그는 거실 앞 선반을 한참 휘적였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편한 모습이었다. 그는 언제나 각잡힌 정장과 총을 손에 쥔 채로 살아갈 것 같았는데. 지금의 그는 조금은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제 몸보다 조금 큰 듯한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정장구두가 아닌 회색의 슬리퍼를 신고서, 총알이 아닌. 손톱깎이를 찾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바깥에서와는 다른 그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손톱깎이를 건넸다. 나는 물건을 건네 받으며, 괜히 달아오른 마음을 감추고 답했다. 고마워. 라고. 그러자 그는 제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진짜네."
"...뭐가."
"너가 진짜가 맞나 싶어서, 자꾸 만져보게 돼."
"..."
"진짜구나. 너."
"..."
"내 집에 너가 있는 게, 신기해."
"..."
"얼른 하고 자."
"...응."
"아."
그의 이어지는 말들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니. 뭐 좋아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달콤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 어떤 고백을 받은 것보다 부끄럽고 난리야. 내 눈 앞에 보이는 그의 회색 슬리퍼가 '얼른 하고 자.'라는 그의 말 뒤로 멀어져 갔다. 아마도 제 방에 들어가려는 듯 했다.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때마침 무언가 생각난 듯, 아 -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제 몸을 돌려 다시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편해도
그렇게 어깨 다 내놓고,
씻자마자 내 옆에 앉으면
힘들지. 나는
내가 벌써 편하면,
안 되는데.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들어가서 자! 하며. 그러자 그는 또 제 특유의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어? 씻고 옆에 앉지 말라니까 막 만지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기겁하며,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놀리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 방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다던 그는 제 고개를 숙여 내게 속삭였다.
허리 만져주는 거,
좋아해.
어디서든 환영할게.
쟤 진짜 미쳤나봐.
*
"정말 같이 가도 괜찮아?"
나는 입국 수순을 밟는 중에도 정호석, 그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내가 스페인에 간다고 덜컥 나를 따라 함께 가겠다니. 스페인에는 내 직업이 속한, 월드난민구호 단체의 본사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일을 병행하며 생활하기에도 편할 터였고. 하지만 그는 그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나는 내 물음에 답이 없는 그의 팔을 약하게 잡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정호석. 괜찮냐니까? 그러자 그는 대체 같은 질문을 몇 번이냐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제 여권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나도 이제 진짜 모르겠다.
우리는 마침내, 출국 게이트에 함께 섰다.
*
그와 같은 비행기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피곤하다며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의 행동에 흠칫 놀란 내가 몸을 굳히자, 그는 자연스레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비행기 무서워서."
"...뭐?"
비행기가 무섭다며 내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아오는 그였다. 그의 말에 헛웃음이 흘러 나온 내가, 뭐?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아. 무서워.' 하며 제 말만 반복한다. 어린 아이 같았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는 걸 포기한 채로,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이곳을 벗어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까. 그리고 돌아올 때도,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와 함께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때의 우리도
이렇게 손을 마주잡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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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암호닉은 글 먼저 올리고, 천천히 정리해서 다시 올릴게요!
프리뷰의 내용보다 조금 더딘 이유는, 그래도 너무 훅 건너뛰면 아이들의 이런 사소한 감정선이 보이지 않을까봐...!
이제 본격적으로 다정해질 아이들, 지켜봐주세요 :)
오늘의 이야기가 짧은 이유는, 쓰던 뒤의 내용들이 날아갔어요...ㅜ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