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었다. 어머니는 물에 젖은 내 꼴을 보고 크게 놀라셨지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방에서 조금 기다리다, 어영이가 받아 놓은 물에 목욕을 하러 나섰다. 본래의 찬 물에 가마솥에서 끊인 뜨거운 물을 섞은 목욕물이었다.
"와 따듯해."
몸이 따듯해지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어영이에게 나가 보아도 좋다고 했다. 혼자 앉아서 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다.
내일 내가 치룰 일이 재간택이니까.. 여기서 붙고 삼간택과 마지막 최종간택까지 붙으면 여기서 국왕의 비, 왕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과 똑같다면.
이곳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다가, 금세 또 이동혁이 떠올랐다. 물속에 있던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냥 자동적으로 이동혁이 떠오르더라. 평소 나였다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일인데, 이동혁과의 일들은 정확하게 다 뇌에 저장되는 느낌이다.
내가 정말 그럴 일이 거의 없겠지만 내일 재간택에 붙고 최종 간택 단계까지 붙는다면 이동혁은 이제 만날 수 없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최종 간택 단계까지 붙을 리 없었다. 이곳에 대해 아는 것도 얼마 없는데 왕비가 되는 상상까지 하다니. 김칫국이 대단했다.
“어영아 밖에 있어?”
“네 아씨!”
하고 있던 생각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판단이 되면, 빨리 접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밖에 있던 어영이를 불렀다. 몸을 닦기 위해서였다. 어영이는 금방 수건 비슷한 것을 가지고 왔고, 어영이가 닦아 주겠다는 것을 말리고 혼자 한복까지 다 갖춰 입었다.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욕실 같은 곳에 있던 거울 앞에 섰는데, 나갔던 어영이가 다시 들어오더니, 내게 묻는다. 목욕이 끝나셨냐고.
그렇다 하니 내 눈치를 보며 말한다.
밖에 이동혁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
오늘은 재간택 날이었다. 집 밖에서부터 분주했다. 가마가 대기 중 이었고, 옷을 만드는 사람이 직접 만든 옷을 몇 벌이나 가지고 왔다. 내 몸에 이것저것 다 대보는 것이, 내가 살던 곳에서의 쇼핑 같았다.
“아씨, 꼭 재간택에 붙으셔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티를 내지 않았다. 웃으며 “고맙습니다.” 할 뿐이었다. 내가 재간택을 가고 싶지 않아도, 무조건 가야 될 느낌이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고, 나를 위해 고생 중이다.
이동혁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이른 시각이라 그런가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젯밤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올 리가 없지.
“아씨, 저는 부담 드리지 않을게요. 마음 편하게 하고 가세요!”
어영이가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주제 넘는 말을 했다며 남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신분의 차이가 이렇게 컸던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어영이에게 고맙다는 말 뿐이었다.
물론 빈 말이 아닌 진심으로. 어쩌면 이 집 안에서 제일 어린 어영이가 제일 믿음직 할 지도 모른다. 어영이는 나와 같이 간다. 이번에도.
“미친 이게 뭐람.”
가마를 열자마자, 조용히 나에게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마 안을 봤는데, 저번보다 더 좁아진 것 같다. 아 존나 여기서 살찌면 가마도 못 타겠네 싶었다. 거의 찌그러져 들어가는 느낌이 컸다. 대체 나를 얼마나 날씬하게 보는 거야? 내가 밥 제일 많이 먹을 텐데.
“출발하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가마가 들렸다. 갑자기 들리는 가마는, 두 번째 타도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좁아서 그렇게 막 몸이 덜컹거리지 않았다는 것.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싶다.
날은 화창했고, 하늘엔 구름 한 조각 없었다. 햇빛이 뜨겁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좋은 날씨였다. 그렇게 가마는 간다. 목적지는 궐앞.
오늘은 재간택 날이었다.
*
“내리세요 아씨..!”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벌써 편해진 건지 잠깐 잠이 들었다. 내 몸이 하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눈을 떴을 때, 어영이가 가마 문을 열며 도착했다며 나를 불렀다.
오랜만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하루가 지나면 이틀이 지난 듯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와 본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뭔가 반가웠다. 내가 나온 곳이 이곳이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꿈같은 삶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궁 앞에는 가마솥 뚜껑이 존재했다. 그것을 밟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초간택에 합격한 일곱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가마솥 뚜껑을 밟고 들어갔다. 어영이가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고, 마지막으로 내가 밟으니 슝 하고 위로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이쪽입니다.”
꽤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궁녀가 저번보다 큰 정자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 정자는 여러 궁녀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일곱 명이 가로로 나란히 앉기에 충분히 큰 정자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고, 곧이어 저번에 보았던 누군가가 들어온다.
“대비 마마 행차하신다. 다들 예를 갖추어라.”
아, 그때 뵈었던 분이 국왕의 어머니셨구나. 그 분은 우리의 인사에 옅게 미소를 보이시며 일곱 명의 앞에 앉으셨다.
“그래요. 다들 잘 지냈는지.”
궁녀들과 이곳에 앉은 사람들은, 그 분의 말씀 하나하나에 촉을 세우고 있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물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정자 바닥만 보고 있었다.
“성 대감 집의 여식은 긴장이 되지 않나 보군요?”
성 대감 집의 여식이 누군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나였다.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 부담스럽다.
“네..?”
“다른 집 여식보다 여유가 있어 보이네.”
“모든 일에는 침착해야 한다 하여..”
예? 하하. 저는 생각 없이 멍을 때리고 바닥에 있는 무늬를 보며 호랑이를 닮았네, 토끼를 닮았네 하고 있었을 뿐인데요. 하며 진실을 말했다간, 옆에 있는 궁녀의 눈초리가 사나워 질 것 같았다. 대충 둘러대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드신 듯, 그녀의 입꼬리가 인자하게 올라갔다.
그리곤 몇 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이만 일어나 보겠다며 이 정자를 빠져 나가신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단장을 해 주고, 공들인 시간과 내가 가진 부담감에 비해 금방 끝난 재간택 시간이었다. 맨 왼쪽에 앉은 사람과, 세 번째에 앉은 사람,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은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을 한다. 공부를 많이 한 티가 보인다. 공자, 맹자 등 아주 도덕시간에나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 나온다. 그에 비해 나는 아는 것이 없기에, 거의 마지막에 대답을 했다.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아씨 잘 하셨어요?”
“모르겠어..”
부담감과 압박감이 풀린 덕인지 몸에 힘이 풀렸다. 어영이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 들리지 않았다. 바로 가마로 직행하여 집에 가는 길에 잠을 취할 생각이었다. 방금 내가 보내고 온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의문이었다. 슉- 하고 지나간 느낌.
어영이가 가마 문을 열었고, 나는 좀비처럼 걸어가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궐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난리가 났는데, 나는 피곤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 때문에 지금이라도 잠을 청해야 오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어젯밤 이동혁의 얼굴을 지우려 애쓰며.
*
밖에서 이동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그가 반가워 얼른 나왔다. 별거 아닌 머리끈 색마저 고르는 데 2분은 걸린 것 같다. 이동혁이 뭐길래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늦은 봄이어도 목욕을 방금 끝내고 나온 밖은 냉기로 가득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집 앞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있던 이동혁이 내가 나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멍을 때리고 있었다.
“야 오랜만?”
“어? 어. ..야 추운데 옷을 그렇게.”
“너 때문에 바로 와서 그렇잖ㅇ..”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내 입은 이동혁이 덮어준 담요 비슷한 것으로 다물어 졌다. 오오..여기도 이런 게 있네. 보라색 담요는 보드라운 털로 뒤덮여 있었다.
“그거 원래 네 물건이니까 주지 말고 너 해.”
“응? 근데 이게 왜 너한테 있어?”
“저번에 추워서 뺏었어.”
못된 놈. 막 친구 물건 뺏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며 훈계하듯 말하니, 이동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성이름 네가 가져간 내 물건 몇 갠지 세 봐?”
“..아냐.”
뻘줌했다. 내 방에는 내 손에 안 맞는 큰 장갑도, 밑잔에 ‘동혁’ 이라고 써져 있는 작은 물잔도, 심지어 파란 색 무늬의 손수건도 다 이동혁의 물건 같았기 때문에.
“와 달빛 진짜 예쁘다.”
“걸을래?”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서의 달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염되지 않은 곳의 달빛은, 더 밝고, 노란 빛이 밤하늘에서 쏟아져 나왔다. 걸을 거냐는 이동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하고 나와서 달빛을 받으며 걸으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개한 벚꽃 나무가 양옆에 있는 집 옆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 적응은 좀 되냐?”
“응 여기 말 잘 알아듣고 있어! 편한데?”
그 말을 하자, 이동혁이 이런 저런 단어를 물어왔다. 그러면 나는, 이동혁이 물어온 단어의 뜻을 맞추고는 혼자 뿌듯해 했다. 이동혁도 여러 가지를 물어보더니, 좀 아네. 하며 웃어보일 뿐이었다.
“성이름, 그러면 너”
“응? 응. 또 뭐. 말해봐 다 맞출 수 있어”
이동혁이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정인이 무슨 뜻인지 아냐?”
“정인? 좋아하는 사람 아냐? 정붙인 사람.”
이동혁이 대충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맞은 건 뭐냐 맞으면 맞은 거고 틀리면 틀린 거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때였다. 이동혁이 멈춰섰다.
“야 안 가?”
“너는 모르겠는데.”
“응? 뭐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이동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달빛에 비춰진 그의 짙은 남색 도포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난 너야.”
“뭐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가 이동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동혁은 눈을 한 번 2초정도 세게 감았다 뜨더니 시선을 땅에서 내게로 옮기며 말한다.
“내 첫 정인.”
“...”
“그래서, 안 되는거 아는데”
".."
“자꾸 네가 재간택에 안 갔으면 좋겠어.”
당황한 나는 그곳에서 얼어 있었다. 몇초를 그러고 있었을까. 바로 뒤돌아서 집에 와 버렸다.
이 이후의 내 감정을 잘 추스리지도 못 할 거면서.
그날은 재간택 하루 전이었다.
!작가의 말! |
오늘 너무 급전개가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아직 풀어나가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껄껄. 재밌게 보셨나요,,? 시간의 흐름?은 재간택 전날 밤- 재간택 날 -재간택 전날 밤. 이렇게 흘러가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설명 해 드리는? 거에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암호닉 신청은 항상 받고 있어요 ! ♥ 궁금한 점은 댓글로 물어봐 주세요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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