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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한창 여름에 내리는 장맛비라도 되듯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방울은 집 지붕을 세차게 강타했다. 재간택을 갔다 온 지 하루가 지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이 화창하고 좋았는데, 오늘은 또 갑자기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 이곳의 날씨는 가늠할 수 없다.
재간택 날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밥을 먹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인가. 어제 저녁에는 집에 오자마자 애써 잠을 자려 노력했고, 달이 밖을 환하게 비추고 있을 때 눈을 떠버렸다. 그래서 혼자 여러 생각을 하다 새벽에서야 잠이 들어서, 아침 늦게 일어나버렸다.
어영이에게 깨우지 그랬냐며 얘기를 하니, 저번에 내가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단다. 아주 지 마음대로인 사람이었네 여기서의 난. 이동혁의 물건들을 다 가져오지를 않나, 심심하면 내 마음대로 나가고, 돈도 많고 친구도 이동혁이면 뭐.. 됐고. 차라리 이곳의 삶이 나은 것 같았다. 자본주의에 찌들어 가는 저 곳보다는.
전전날 밤 이동혁의 고백은 내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냥 갑작스러워서 도망치듯 걸음을 옮긴 것 같다. 물론 이동혁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지만. 늦은 밤에 마당을 쓸던 어영이의 말에 의하면 이동혁은 꽤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고 했다.
얼마 보지 않았지만 가족보다 편한 존재인 이동혁. 그리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얼마 보지 않은 이동혁이라고 해도, 이곳에서의 나를 이동혁은 몇 년이나 봐 왔을테니.
“어영아, 밖에 있어?”
“네 아씨!”
“잠깐만 나갈래?”
“네 잠시만요!”
비가 오는 날은 춥다. 진짜 오질나게 춥다. 다른 곳보다도 손이 너무 시렵다. 그 때 내 눈에 띈 것은, 내가 쓰기에는 확연히 큰, 이동혁의 장갑이었다.
어영이와 저자거리로 나설 것이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해서. 내 말을 들은 어영이는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는 금방 내 옆에 섰다. 우산으로 내가 비를 맞지 않게끔 씌우며.
그렇게 여자 둘이 저잣거리로 나선다. 한 명은 비 가리개를 들고,
또 한 명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큰 장갑을 손에 어설프게 끼운 채.
*
“잠시만 기다리셔요!”
“조심히, 조심히 갔다 와!”
그냥 습관처럼 출출하다는 이야기가 입 밖으로 퍼지니, 어영이는 나를 저자거리 끝 쪽에 있는 정자에 앉혀두고는 급하게 뛰어갔다. 바로 맛있는 음식을 사 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걸으면서 어영이에게 말을 붙이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데, 이렇게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문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동혁이 떠오른다. 내가 이만큼이나 그를 많이 생각했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분명 현실세계였다면, 현주가 꾸지람을 했을 것이 뻔하다.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네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구분도 못 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애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현주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때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이건 그냥 호감에서 멈춰있는 단계였더라. 분위기에 휩쓸려 고백하고, 그 고백을 받는 일은 몇 년이 지나도 흑역사가 되고,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였다. 비가 와서 사람이 몇 없는 저잣거리에,
짙은 곤색 도포를 입은 이동혁이 보였다.
내가 이동혁을 바라 본 그 순간에, 이동혁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이동혁이 맞았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다. 허나 눈빛이 예전의 나를 보던 그 친근함은 없었다. 물론 그날 밤의 떨렸던 그 눈빛조차도. 그는 나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한 채 뒤를 돌아 가신이 갈 곳으로 갈 뿐이었다.
계속해서 생각나고 신경이 쓰인다면...
확실치 않던 마음이 확실해지자, 나는 비가 오고 안 오고를 구분할 것 없이 정자에서 뛰어 내려갔다. 발끝부터 젖기 시작하더니, 무섭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온몸이 젖어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이동혁을 놓칠까 무서웠다. 그래서 더 빨리 달렸다.
“이동혁!!!!”
이동혁이 못 들을까 싶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자거리에 사람이 얼마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쪽팔려서 바로 도망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다행히도 이동혁이 들은 듯 잠시 멈칫거리더니 느리게 뒤를 돌았다. 이동혁이 비에 쫄딱 젖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다가오려 하다,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동혁이 나처럼 도망칠까 무서웠다. 그래서 내가 비가 들어오지 않는 그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나도.”
“...”
“나도 너야.”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 현주가 그렇게 강조했던 좋아하는 사람과 호감인 사람을 구분하라는 말에서, 답이 나와서가 아니였을까.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뛰었다. 아무 말이 없는 이동혁을 보자, 내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이동혁은 나를 보며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시선을 이동혁의 눈에서 바닥으로 떨구었다.
“왜 비 맞고 있냐. 추운데.”
“..”
“걱정 되잖아.”
이동혁은 그렇게 말 한 뒤,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불안했던 시선이 다시끔 이동혁에게로 향했고, 이동혁은 애써 나오려는 웃음을 감춘 채 일관성 있게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일 보자 성이름.”
그는 내게 내일의 만남을 예고한 후 뒤를 돌아 비를 맞으며 사라졌다.
가슴이 후련했다. 마치 원래 했어야 할 말을 못 했다가 뱉은 것처럼. 그도 내 첫 정인이라는 것을 원래 말했어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이젠 내심 비를 맞고 가는 그가 걱정까지 되었다.
나는 이동혁을 좋아한다.
*
“아씨 어디 갔다 오셨어요!!”
“미안. 진짜 미안해.”
어영이가 놀란 눈으로 호들갑을 떨며 나를 쳐다본다. 아 나는 무슨 나오기만 하면 쫄딱 젖어서 집에 가네. 내 말에 어영이가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며 다치신 곳 없으니 다행이에요. 하고 웃는다. 그리고는 집에 어서 들어가셔야 된다며 또 한 번 방방 뛴다. 어영이는 내가 감기에 걸릴까 또 걱정하고 있었다. 아유 걱정만 시키네.
내가 앞장을 섰고, 뒤에서 어영이가 날 따라왔다. 어느새 좀 갠 날씨에, 우산을 접어 손으로 들고 다녔다. 그러자 어영이가 뒤에서 묻는다.
“아씨, 그 우산은 어디서..”
“아, 이동혁이 줬어.”
이동혁이라는 말에 어영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평소에도 나를 챙겼구나.
어영이와 한참을 걷다가, 어영이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영아, 너는 만약에.”
“네 아씨.”
“내가 이동혁이랑 사귀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어영이는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이 들려왔다.
“놀라겠지.”
“...”
“이곳 사람이 아닌데, 이곳 사람과 교제를 한다는 것에.”
어영이 목소리가 아님에 놀라,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니, 어영이보다는 내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던 건지도 모르지. 내 뒤에는 따라오던 어영이는 온데간데 없고,
웬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곧 얼굴에서 표정을 모두 빼내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곤 말했다.
“너 여기 사람 아니지.”
네, 드디어 민형이가 나왔네요!! 길지 않은 시간 이내로 세계관을 설명해서 올릴 것 같아요! 저번 화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너무 급전개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직 풀어나갈 이야기들이 많아요! 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물어봐 주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암호닉 신청은 항상 받고 있어요! !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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