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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르 전체글ll조회 322l 1






또다시 시작된 아버지의 큰소리. 어눌한 발음 사이로 끝없이 뱉어져 나오는 자질구레한 욕설들. 제 방구석에 조용히 박혀 듣기에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기에 도연은 결국 대꾸도 없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뒤에서 “저, 저, 쌍년이……!”하며 물건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한 채 아파트 앞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속에 몇 개 보이지 않는 하얀 별이 떴다. 그 사이로 붉은빛을 내뿜는 가로등을 따라 공원에 도착하니 네다섯 정도 되는 사람들이 각자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길고양이 몇 마리도 보였다. 여유롭네. 이런 시간에 운동할 생각도 다 하고. 도연은 그들을 비아냥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자신의 시야를 가렸다.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뭐해?”

 
누구지? 무거운 손을 치우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꽤 건장하게 생겼으나 자신이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도연이었기에 잡고 있던 손을 떨구고선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는 듯해 불쾌했다.

 
“쌀쌀하네. 아, 나 처음보지?”

 
도연은 무시를 했음에도 성격 좋게 다시 말붙이는 그가 귀찮았다. 계속 무시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으나 자꾸만 “응? 응?”거리며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애쓰는 모습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그러네. 그러자 그가 또다시 말했다. 자신은 오늘 이사 왔다고, 804호라고. 이름은 차동우라고. 그의 말을 듣던 도연은 804호라는 말에 귀 기울였다. 804호? 804호……. 도연의 옆집이었다. 그래봤자 뭐하겠어.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을 건데. 그래, 그렇구나. 도연은 또다시 건성으로 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내 집에서 도망친 이후 얻은 자유시간을 누군가에게 방해받긴 싫었다. 그렇다고 일어나니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끝없이 늘려진 듯 길기만 한 시간을 흘러 보내려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 주위 아무 편의점에 들어갔다. 시간을 물어보니 새벽 세시란다. 어쩐지 주위가 조용하고 어둡더라니. 그제야 도연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그 인간도 자고 있겠지.

삐리릭. 조용한 복도에 도어락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혹시 이 소리에 아버지가 깨시면. 또다시 그 고약한 모습을 보아야한다면……? 쿵쾅쿵쾅. 도연의 가슴을 조용히 심장이 울려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안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조심스레 내디딘 발바닥에 갑작스러운 고통이 올라왔다. 초록색 날카로운 조각들이 박혀있었다. 고통을 참고서 조각들을 뽑아낸 후 휴지를 돌돌 싸매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부터 찾았다. 자신의 이런 삶이 너무도 불행하고 안쓰러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람이 울렸다. 도연은 선잠으로 인해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올렸다. 시계를 보니 5시 38분. 부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시간.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후 간단히 아침을 챙기고선 교복을 챙겨 입었다. 거울 앞에서 무표정으로 굳어있는 자신의 얼굴을 억지로 미소지어보았다. 어색했다. 한심했다. 맞아, 나에겐 이런 표정은 어울리지 않았지. 도연은 미소를 푼 무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6시 42분. 적당하게 도착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종이 울렸다. 아침조례시간. 담임선생님은 평소보다 늦게 들어온다 싶더니 남자아이 하나를 제 옆으로 데려왔다. 이름은 차동우. 오늘부로 3반에서 함께할 전학생이란다. 도연은 자기소개를 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엎어져 있던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어젯밤 자신의 시간을 방해하던 그 놈이었다. 같은 반이네. 심드렁하게 동우를 한 번 흘깃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제 품속에 숨겼다. 도연은 동우가 제 옆자리로 배치되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동우가 제게 또 어제처럼 말을 걸 가능성도 적거니와, 만약 그런다고 하더라도 무시하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 연유였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예상과 달리 이후 동우는 도연의 시간에 끊임없이 개입했다. 도연의 옆자리인 것이 이유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끔 자꾸만 겹치는 등하교 시 끈질기게 대화를 거는 것도 한몫했다. 도연은 그런 그가 황당하고 한심했다. 처음으로 계속되는 호의가 너무도 이질적이고 부담스러웠다. 께름칙하고 불쾌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은 평생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고, 바라지도 않았으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도연에게 동우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도연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익숙해지고 동요되어가기 시작했다. 동우에게. 동우와의 대화에. 처음 느껴보는 친구라는 사이에. 한 달이 지나갈 적엔 결국 등하교를 함께하게 되었고, 두 달이 지날 적엔 도연이 먼저 짤막하게나마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던 둘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우가 무단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3일이나. 그동안 함께 거닐던 거리나 아파트 앞 작은 공원에도 보이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몇 시간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있었더라면 연락이라도 해보는 것일 텐데 제 아버지가 술값으로도 모자라는데 전화비용까지 부담해줘야 하냐며 몇 년 전 해지시킨 탓에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담임이 도연에게 동우가 무슨 일 있었느냐 물었지만, 뭐라 답해줄 수도 없었다. 알았다며 다시 제 갈 길가는 담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새 학기 형식적인 상담 이후 처음 말을 걸어오는 담임과의 대화주제가 동우였다. 조금은 씁쓸했다. 학교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구석인 것 같아.

 
“있잖아, 도연아. 너랑 동우랑 집 가깝잖아. 우리 동우랑 같은 조인데 연락처를 몰라서……. 미안하지만, 이 프린트 전해주면서 수행평가에 관해 설명해주면 안 될까?”
 

그래, 알았어. 도연은 그들이 주는 프린트를 받아들었다. 처음 제게 말을 걸어오는 무리였다. 하긴 저도 아이들과 딱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학기 과학 수행평가. 크게 적힌 문구를 괜히 읽어보았다. 무슨 일 있나. 예와 달리 누군가를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실소가 흘러나왔다.

가벼운 책가방을 정리하고서 교실을 나왔다. 고작 3일 하굣길을 함께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허전함이 자리했다. 애써 무시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파트에 다다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 아버지가 있을까 한숨부터 떨어졌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작은 놀이터. 그곳의 그네에서 동우와 나눈 대화가 불현듯 도연의 머리를 스쳤다.

 
“아, 맞다. 도연아.”
“응?”
“뭐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우리 집에 오고 싶다면 뜬금없이 찾아오진 말아줘. 나한테 미리 말하던가, 내가 부르면 왔으면 좋겠어.”
“응. 근데 왜?”

 
그에 동우는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동우 특유의 당황할 적 나오는 행동이었다. 음, 어……. 계속되는 당황한 모습에 비해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여 도연은 괜찮다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동우는 제가 긍정의 표현을 하기 전에는 제 집에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동우의 집에 들려 수행평가를 핑계로 만나보려 했던 도연은 고민했다. 갈까. 가도 될까? 아니야, 그래도 수행평간데. 수행평가가 더 중요하지. 결국 도연은 그네로 향한 시선을 돌려 아파트로 옮겼다. 띠링, 8층입니다. 고요한 복도 속에 잔잔히 인기척의 울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801호, 802호, 803호……. 그리고 804호. 동우의 집.
 
띵동. 잠시 망설이던 도연이 초인종을 눌렀다. 꽤 경쾌한 소리가 저를 반겼다. 띵동. 아무도 나오지 않자 도연이 한 번 더 벨을 울렸다. 띵동. 띵동. 세 번, 네 번을 더 울려도 결국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라도 계시지 않을까 싶었지만, 끝끝내 묵묵부답이었다. 갑자기 며칠 전 동우에게서 들은 묻지 마 살인사건에 관한 뉴스가 떠올랐다. 괜스레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걱정과 불안감이 뒤섞여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 걸릴 줄만 알았던 문이 가볍게 열렸다. 살짝 열려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을 메우고 있었던 건, 생각도 못 한 공허와 적막이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먼지,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가구의 행적. 오랜 시간 집이 비어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공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보이는 것은 먼지의 행렬 뿐. 도연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바로 옆 위치한 803호. 지긋지긋한 803호가 분명했다. 그리고 제가 문을 연 집은…… 역시 804호. 확실히 804호였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혼란이 도연을 휘감았다. 멍하니 문 앞에 위치하던 도연은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새벽 1시. 도연은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살랑이는 밤바람이 도연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마치 위로받는 듯 무언가 마음이 편해졌다. 뭐랄까, 동우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느낌. 고작 3일 보지 못한 것일 뿐인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동우의 얼굴을 도연은 지우지 못했다. 동우의 얼굴과 804호의 풍경이 도연의 머릿속에서 겹쳤다. 또다시 머릿속에서 혼란이 일렁였다. 그때, 갑자기 도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도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단지 내 작은 놀이터, 그곳의 그네에 동우가 앉아있었다.
 

“여, 안녕.”
 

끼익, 끼익. 기분 나쁜 그넷줄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간단한 인사 후 자연스레 도연은 동우 옆 그네에 앉았다. 이젠 말 안 해도 옆에 앉아주네. 동우가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오랜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동우를 보게 되어 반가운 도연이었지만 정적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도 몰랐고, 아직은 둘 사이 차분한 그 느낌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뜻밖에 도연이었다.
 

“뭐 하고 지냈어? 학교도 안 오고.”

 
동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앞뒤로 살살 그네를 움직일 뿐이었다. 숙인 고개는 그대로 두고서. 그에 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까 너희 집에 가봤…….”
“뭐? 설마 들어가진 않았지?”
“미안. 열리길래…….”
“내가 부르기 전엔 오지 말라고 분명 말했었잖아!”

 
동우가 도연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어졌고, 이내 동우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처음 듣는 동우의 큰소리와 욕지거리에 도연이 당황했다. 이렇게 화낼 줄은 몰랐는데. 도연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동우는 한숨을 내쉬더니 도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말해야 하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어두웠는데. 밤하늘을 한 번 바라보던 동우는 이내 곧 자신의 이야기를 한 줌씩 뿌렸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어째서인지 도연의 미래.


도연은 조용히 학교를 졸업했다. 그 흔한 친구하나 없이, 사진 한 장 찍지 않고서. 애초에 대학은 바라지도 않았던 도연은 졸업 후 제 아버지의 품에서 도망쳤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금방 일자리를 찾아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대부분 퇴짜당하기 일쑤였다. 혹은 나중에 연락을 준다고 하거나. 물론, 집 연락처조차 알려줄 수 없었기에 매번 마음을 접고 나왔지만. 며칠을 밖에서 지냈을까. 한계를 느낀 도연은 결국 다시 제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들어온 집은 생각보다 꽤 편안했다. 지난 십 몇 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듯 안정감이 저를 감쌌다. 오랜만에 몸을 씻고 나와 개운함에 빠져 아버지 없는 제 집에 안도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도어락 풀리는 소리가 제 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풍겨오는 술 냄새. 불안감은 곧 현실로 바뀌어 모습으로 드러냈다.

 
“오~ 우리 딸 권도연이~”
 

비틀비틀.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도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뺨을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뭐하러 들어왔어, 우리 도연이? 자상한 손길, 순진한 미소. 그와는 상반되게 잠시 후 아버지가 도연의 뺨을 내리쳤다.

 
“그냥, 나가서…… 살, 지, 그랬……어!”

 
왜소한 체구에 비해 힘이 실려있는 폭력은 도연이 버티기엔 버거웠다. 정신을 붙잡는 것조차 힘들어질 무렵 눈물이 제 의사에 상관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훌쩍이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이미 이성이 사라진 아버지에게 먹힐 리가 만무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가늠이 어려울 때. 제풀에 지쳤는지 숨을 고르며 폭력이 멈추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만이 집 안을 메웠다. 아버지가 깊은숨을 내뱉더니 도연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이상했다. 평소와 다른 극도의 불안감에 도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돈…… 돈! 우리 도연이. 돈 있었으니까 나갔겠지. 어딨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버지가 도연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소름 끼쳤다. 더럽고, 추잡스러웠다. 얼굴을 들이밀며 거친 숨을 내뱉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밀쳤다. 아버지가 헛웃음을 날렸다.

 
“왜. 몸 굴리고 다녔을 것 아냐. 다른 놈들이랑은 재미 보고 네 아비랑은 안 되겠다, 이거냐?”

 
도연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정말 자신이 들은 말이 제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연신 들려오는 저를 향한 온갖 더러운 말들. 그리고 엄마를 향한 증오를 담은 수치스러운 표현들.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엔 너무도 고약했다. 끝없이 욕을 내뱉던 아버지가 다시 도연에게 다가왔다. 순간 멍해 있던 도연이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다시 밀쳤다. 넘어진 아버지가 제게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애써 무시하곤 가방을 들고 다시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아버지의 고함이 들려왔다.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더 이상 집 또한 자신에게 평안을 보장할 수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미 아파트 단지에서 한참 멀어진 지 오래였다. 숨을 멎게 할 심산인 듯 자꾸만 심장이 요동쳤다. 몇 번이나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또다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비하하다 갑자기 가방 안주머니 속 명함이 떠올랐다.

 
“학생, 일 구해?”
“네? 네…….”
“혹시 생각 있으면 이리로 연락 줘.”
 

지하철에서 구인광고를 훑어볼 적, 한 남자가 주고 간 명함. 지금 같은 세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그 일이 어떤 일인지 대략 감잡히긴 했다. 그래서 끝까지 회피하고 싶었던 명함. 곧 버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서 넣어두었던 그 명함. 이젠 자신의 자존심보다도 일자리가 더욱 절실했기에 결국 지하철까지 걸어가 공중전화를 찾았다. 달그락. 오랜만에 잡아보는 수화기. 두려움과 수치심. 불안감과 절실함.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정서를 이끌어냈다. 심장이 또다시 옅게 요동쳤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누르니 통화음이 울렸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가게에서도 선임보다 새내기가 한참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름 더러운 손길과 언행에 웃음을 팔며 지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아니, 오히려 제가 유혹해오기도 했다. 점차 머릿속엔 돈으로만 가득 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유독 매니저가 모든 언행에 조심하라고 노심초사하며 보내던 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 중앙에 앉아있던 한 남자. 깔끔한 정장을 입고 여러 사람과 하하호호 웃음을 주고받던, 유독 옆에서 들이미는 제 손길을 자연스레 치우던 남자. 하지만 결국 술이 더욱 들어가며 본능을 거부하지 못하고 저와 관계를 해버리고만 남자. 술에서 깬 남자는 유독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사랑받고 있구나, 저 사람의 부인. 부러움도 잠시 도연은 천천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갈 채비를 끝냈을 무렵. 남자가 저를 불렀다.
 

“잠깐.”
“네?”
“연락처 줄 테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줘.”
 

무언가 데자뷰가 이는 듯했다. 도연이 알았다며 메모를 받았다. 그리곤 또각또각 모텔을 나왔다. 흠, 이런 적은 처음인데. 보기완 다르게 순진하네. 도연은 그의 호의를 한심하다며 비웃었다.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이상하리만치 매니저는 제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룸에 보내기는 했지만 2차는 절대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다. 딱 웃음을 팔고 가벼운 스킨십만을 참아내는 정도에서 끝내라 했다. 덕분에 한동안 그런 편한 돈벌이가 계속됐다. 막무가내로 도연을 끌고 나가려는 손님도 적잖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매번 매니저가 막아섰다. 야, 매니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아니야? 언니들과 있을 적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웃음으로 넘겼지만 사실 도연이 내키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남자.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 유독 편해진 일자리. 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을 것 같던 그 남자. 에이, 그래도 누가 이미 지난 술집 여자한테 돈을 쓰겠어. 그런 의심이 생기더라도 도연은 곧 지워버렸다.

그리고 대망의 오늘. 생리 기간이 지난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생리를 하지 않았기에 설마 하며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결과는 두 줄. 아, 또 지워야 하나. 다시 시작될 고통이 떠올라 소름 끼쳤다. 슬슬 안 생길 때도 된 것 같은데……. 한숨을 내쉬고 임신테스트기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불현듯 남자가 떠올랐다. 분명 그 남자의 아이겠지. 여전히 부인이랑 잘 사려나. 순간 심보가 뒤틀렸다. 어디, 부인이랑 사이 좀 망쳐볼까. 아니지, 아냐. 그래도 골려는 보자. 지난밤 남자가 준 메모가 떠올랐다. 반듯하게 적힌 번호로 다이얼을 눌렀다. 조금 긴 통화음이 들리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오빠, 나 임신했어~”

 
일부러 한껏 톤을 올려 방정맞게 말했다. 수화기 속에서 정적이 흘러내렸다. 딱 봐도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입가에 비웃음이 묻었다. 역시 쓸데없이 순진하네. 사실 도연은 돈을 뜯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술집에 박혀 사는 몸인데 굳이 돈이 필요하다곤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남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당황할까? 나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까? 언니들이 종종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한심할까, 이 남자.

 
“……내 애 확실해?”
“응, 당연하지. 오빠가 나 일 못 하게 손 써놨잖아?”

 
수화기 너머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뭐야, 떠본 건데 진짜였나 보네? 키득키득. 소리 없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알았다고,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결국 여느 남자와 다름없이 회피인가. 일말의 재미 따위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의 말과 달리 일주일가량 연락이 없었다. 문자를 여러 번 하며 초조하게끔 하여줄까 싶었다가 그동안 편히 일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기에 참기로 했다. 슬슬 산부인과를 알아보려 할 쯤 매니저가 아무 일도 안 시키더니 푹 쉬라고까지 했다.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말. 당황스러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냐며 캐물어도 아니라고만 대답할 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도연을 찾아왔다. 자신은 그 남자의 비서라고,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그리곤 갑작스레 부산 끝자락 어느 마을로 데려갔다. 그곳에 자리한 한 집.

 
“이 집은 뭐죠?”
“회장님께서 준비하신 집입니다.”
 

도연은 당황스러웠다. 뭐지? 나한테 왜? 설마, 임신한 것 때문에? 머릿속에서 생각이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비서라는 작자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회장님께 온 전화란다. 도연이 휴대폰을 잡아들었다.

 
“여보세요.”
“앞으로 거기서 지내. 한동안 술집 사람이랑 연락도, 왕래조차도 하지 말고. 조용히 살면서 애도 낳아.”
“뭐야, 오빠. 애 낳으라고 집까지 마련해 준거야? 우리 오빠 능력 있다~”
“길게 말 못해. 앞으로 휴대폰도 이거 쓰고, 따로 통장 줄 테니까 생활비 주는 걸로 생활해. 아, 이유가 어찌 되었건 내 애라는 건 무조건 숨겨.”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비서가 통장과 집 열쇠를 주고서 차를 타고 떠났다. 도연이 문을 열고 집안을 훑어보았다.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있으나 깨끗한, 혼자 살기에는 너무도 널따란 집. 손에 쥔 통장을 열어보니 3천이라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버티고 모아놓은 돈이라고 해봐야 5천이 꼴랑인데. 인생역전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네.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꽤나 인생길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또 남의 인생을 망쳤구나. 이젠 나름 냉정해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인생이 물 흐르듯 편안하게만 흘러갔다.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동우로 지었으며, 제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두뇌는 꽤 명석했다. 어머니밖에 없는 가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결국 서울대에 입학했다. 삐뚤지 않고 유순하게 자라준 탓에 친구도 나름 많았고, 학교생활도 잘 마쳤다. 도연은 그런 동우가 자랑스러웠다. 저를 닮지 않고 착한 아버지를 닮아 태어나준 게 너무도 고마웠다. 앞으로도 이런 삶과 같이 평탄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은 갑작스레 터졌다.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가 급작스레 동우를 찾아왔다.

 
“네가 권동우?”
“네? 네, 그런데요?”
“따라와. 할 말이 있어.”
“……누구세요?”
“아, 처음 보지. 내가 네 아비다.”

 
동우는 혼란스러웠다. 제 어머니가 술집 여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본 아버지는 생각보다 컸고, 듬직했으며, 점잖아보였다. 그런 생각도 잠시 동우는 그에게 끌려갔다. 제 어미에게 이미 연락을 해뒀다는 말을 믿고서 혼란과 불안을 잠시 잠재웠다. 한동안 표면적인 즐거움이 이어졌다. 같이 영화를 본다던가, 카페에 가 짧은 대화를 즐긴다던가. 엄두도 못 내본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함께한다던가. 늦게 갈 것 같다는 연락조차 잊은 채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며 향한 곳은, 너무도 멀고 먼 타 지역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끔뻑거리며 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앞으로 이곳에서 말 잘 들으며 지내거라.”
“집은…….”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하긴 했어도 상냥하던 제 아버지가 동우의 뺨을 내려쳤다. 두뇌회로가 끊긴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이곳에서 잘 생활한다면 보내주겠다 했다. 동우가 정신을 차리고 그럼 아까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냐 묻자 누군가를 불렀다. 건물 내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나왔다.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종이뭉텅이를 동우에게 건넸다. 과거 여행 프로젝트. 크게 적힌 문구를 천천히 읽고 있을 때 제 아버지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차로 향했다. 여기서 소리치며 그를 잡아본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직감적으로 안 동우는 남자들을 따라갔다.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창문 밖 햇빛만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연구소 내에는 달력도 시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연구원들의 공간에만 존재할 뿐. 들어오며 휴대폰을 뺏긴 탓에 어머니께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연구소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 준비단계라며 여러 외국어 및 컴퓨터에 관련된 기술들을 배우도록 했다. 미친 듯이 밀려들어오는 정보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끝내고 어머니를 보러 갈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먹으라하면 먹고, 배우라하면 배우고, 자라하면 자고. 분 단위로 나뉘어져있는 일정에 따라 살아가는 제 인생이 마치 울타리 안 가축들의 삶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평소와 달리 늘 닫혀있던 방으로 향했다. 밖에서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도록 창문도 없었던, 비밀로 싸여있던 방. 낯선 방 안은 여느 학교 강당보다도 훨씬 넓었다. 그 곳은 하얀 기계들로 가득했다. 하얀 기계를 캡슐이라고 지칭하는 듯, 어느 캡슐 안으로 들어가라며 동우를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여러 전선 및 갖가지를 제게 연결했다. 캡슐이 닫히고 모퉁이에 적힌 숫자가 보였다. 183. 이 캡슐이 183호인 듯했다. 자잘하게 많다 싶었더니 숫자가 꽤 클 정도로 있었나보다. 시간이 지나고 캡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됐죠? 그동안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난 오랜 시간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에 가담해주신 여러분 모두가 과거여행 체험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목소리가 끊기고 동우는 코웃음 쳤다. 웃기네. 체험은 무슨 체험이야, 우리로 실험할 요량이면서. 어떤 부작용이 제게 들이닥칠까 조금 겁나기도 했다. 하지만 제가 돌아가 볼 과거는 2015년 5월의 시흥.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과거의 날짜를 쓰라했을 적, 동우는 그 날을 적었다. 제 어머니의 과거로 돌아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를 위로하고, 지옥 같았을 삶에서 그녀를 구제하고 싶었다. 매번 눈물 섞인 그녀의 과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다. 제 어머니이기에 더욱 그랬다.

곧 수면가스가 캡슐을 메웠다. 몽롱한 정신상태가 이어지며 램수면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낯선 공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급하게 뛰쳐나오는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익숙한 생김새. 제 어머니, 도연이었다. 처음 과거의 도연을 보며 동우가 한 생각은 ‘예쁘다’였다. 예뻤네, 우리 엄마. 일순 고약한 어지러움이 지속되더니 캡슐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깨어난 것이다. 직접 실험을 진행해보는 것은 초기인지라 불안정한 듯 했다. 여러 번 실험이 반복되자, 시간단위로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몇 주가 지나자 최대 2주일까지도 가능했다. 한동안 행복한 나날이 흘렀다. 과거의 도연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변해가는 도연의 모습에 행복했다.

몇 달이나 과거의 시간을 탐했을까. 한동안 데이터정리를 한다며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지만 끝없이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캡슐에 들어가 수면을 기다리고 있을 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이번이 마지막 실험이라고. 갑작스레 들려온 마지막 통보에 당황스러웠다. 당황도 잠시, 동우는 램수면 상태에 돌입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익숙한 놀이터가 보였다. 지난날 도연과 그네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네에 앉아 천천히 움직이니 그리운 마찰음이 귀에 들어왔다. 곧 아파트에서 나오는 도연이 보였다. 도연도 동우를 발견했는지 저를 향해 걸어왔다. 우리 엄마 예쁜 과거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괜스레 추억에 젖어 도연을 바라보았다.

 
동우의 이야기가 끝났다. 도연은 당황스러운 듯 동공이 흔들렸다. 거짓말이지? 연신 물었지만 진지한 동우의 모습에 장난이 아닌 진실임을 자각했다. 혼란스러웠다. 미친 듯이 혼란스러웠다. 생각을 정리하러 나왔다가 오히려 생각이 얽히고설켰다. 밤바람이 불었다. 가벼웠지만 저희를 떼어낼 듯 날카롭게만 느껴졌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야?”
“글쎄. 오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며칠 뒤가 될 수도 있고. 몇 주까지는 아닐 것 같아.”

 
고요가 흘렀다. 아쉬움이 가슴 한편에 남아 먹먹했다. 도연도, 동우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라며 동우가 도연을 보냈다. 오늘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함께 등교하자고. 그러려면 또다시 일찍 일어나야하지 않겠냐고. 오늘 볼 수 있는 거야? 응, 당연하지. 그니까 얼른 들어가, 늦었어. 함께 8층으로 향했다. 803호 앞에서 멈추었다. 도연은 도어락을 풀고 조용한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문밖에서 동우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잘 자. 좋은 꿈 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억지로 잠에 들려 눈감고 있기를 몇 시간. 겨우내 잠들었으나, 학교에 가야해 곧 깨어나야만 했다. 일어났을까? 언제쯤 나올까. 평소보다 일찍 나와 동우를 기다렸다. 7시까지 기다려보았지만 동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면 지각이기에 포기하고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무거웠다.

교실에 들어섰다. 종이 울리고 조례가 시작됐다. 평소와 같은 무료함에 엎어져 있으려다 어제 동우에게 들은 자신의 미래가 떠올랐다. 역시 이렇게 살면 안 되겠지. 도연은 입학하고서 처음으로 책을 펼쳤다. 자신의 의지로. 공부할 요량으로. 누군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기…… 동우자린데?”
“동우? 동우가 누군데?”

 
멈칫. 도연이 동우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며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답하고서 오히려 도연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반 어느 아이를 붙잡고 물어도 대답은 같았다. 어제 자신에게 수행평가 설명을 해 달라 부탁했던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 며칠이 지나도 동우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영화에서 과거로 온 주인공이 미래로 돌아갔을 때와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아무도 동우를 기억하지 못했고, 동우의 흔적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 동우와 함께했던 오랜 시간이 마치 사막 속 신기루처럼 흩어진 듯.

시간이 흐르고 도연은 동우 없는 시간에 익숙해져갔다. 자신이 동우에게 동요되어가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도연은 변화했다. 놓았던 연필을 잡고 천천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에게 어색하게나마 먼저 말을 걸으며 반에 천천히 소속되어갔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고 싶었고,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자신의 미래가 바뀐다면 볼 수 없을 동우였지만 그에게 자랑스럽고 싶었다. 노력한 만큼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도연은 지방의 어느 대학이라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제 아버지도 도연이 변화하는 모습에 술을 천천히 줄이더니 보건소와 상담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도연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 날, 유년시절 이후 처음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가족관계도 서서히 개선되어갔다.

그리고 도연은 대학에 입학했다. 지금 사는 곳보다 멀찍한 곳에 위치해 어쩔 수 없이 자취방을 잡았다. 하루 한두 번씩은 꼭 전화하는 조건으로. 여전히 어색하고 어려운 아버지였지만 서로 노력해야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알겠다며 약속했다. 여전히 가끔씩 동우가 떠오르곤 한다. 바뀐 미래 탓에 사라진 건 아닐지, 아니라면 잘 지내고 있을지. 그때의 나는 어땠는지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한 번 머릿속에 그려진 동우는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종강 후 한창 술에 빠질 무렵. 새로운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남은 숙취에 고통스러워하며 물을 마시고 있는데 바깥이 여간 소란스럽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깥을 둘러보니 여러 사람이 짐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닫았을 적보다 크게 들리는 소음에 다시 문을 닫았다. 이사 왔나 보네. 이사…… 이사? 작년 동우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뇌리에서 얼핏 본 남자의 얼굴에 동우의 얼굴을 자꾸만 겹쳐냈다. 혹시나 싶은 기대감이 자꾸만 가슴을 헤집었다. 다시 문을 열었다. 남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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