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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시야를 흰 천으로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처럼 땅이 흔들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흐릿해 앞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위치도, 방향도 알 수 없어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던 중, 다소 빠르게 움직이는 덩어리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물체에 집중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려 하는 순간, 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라졌다. 이제 앞이 똑똑히 보인다. 잠시나마 덩어리로 보였던 사람을 응시했다. 그는 어느새 나를 지나쳐버리고 저만치 가버려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일단 두르고 있는 노란색 로브로 보아, 저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아마 그녀-로브 위로 밤색 고수머리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남자라면 묶고 다녔겠지- 는 고위 마법사이거나 예언자다. 그런데 점점 멀어지는데?

 서둘러 그녀를 쫓아 달렸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르는 얼굴일 것이 뻔한데 뭘. 나는 그보다 상황에 관심이 있었다. 원래 높으신 분들은 저렇게 빠르지 않다. 항상 천천히, 보는 사람을 안달나게 할 정도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내가 그동안 보아 온 귀족들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런 속보는 처음이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추월해 앞을 가로막았다. 정면에서 바라본 그녀는 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도 없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곧 그녀가 걸고 있는 목걸이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어차피 얼굴은 봐도 모른다니깐?

 사실 그 목걸이는 꽤나 투박한 편이었다. 나의 시선을 끌게 한 것은 줄에 매달려 있는 돌이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도저히 안난단 말이지. 정말 익숙한데. 불쑥 그녀에게 목걸이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난 오지랖이 좀 넓다. 엄마가 낄 때 안낄 때를 가리랬지, 참. 내 몸뚱이는 이미 그녀를 막은지 한참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내가 생각에 빠지기 전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려 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흐릿할 뿐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오히려 그녀가 나를 본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하지만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고 생각한 건, 문득 이곳이 무척 조용하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그녀의 금빛 로브가 바닥에 스치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외엔, 숨죽일 듯한 고요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내 뒤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 뒤를 돌아본 이유도 그녀의 시선이 꽃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그리고 그 곳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게 놓여 있었다.

 왕좌였다. 여태껏 아무 생각 없이 밟고 있던 바닥은 대리석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천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윽고 그냥 하얗게만 보였던 주변의 벽, 기둥들도 전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이곳이 궁이라는 확신이 점차 들었다. 이 사람은 왕족을 만나려는 건가?

그 때, 멀리서 또각거리는 발걸음이 울렸다. 방금 전까지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나타났다. 느긋하게, 그야말로 전형적인 귀족의 걸음으로 온 그는 내 곁의 여자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쯤되니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다시 왕족에게로 돌아가서- 그는 유명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 '벨랑카'는 엄연한 왕국의 별만이 지닐 수 있다. 그리고 내 추측은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왕국의 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을 만나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끼어들 자리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서도. 그들은 대화를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목소리만 인지될 뿐 대화의 내용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멍청한 얼굴로 듣고 있던 나는 그들이 외국어로 대화하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 내가 있단 것을 의식한 건가? 하지만 그럴 순 없을 텐데. 난 지금···.

어느샌가 그들의 대화는 끝나있었다.

*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것을 기다렸다. 넓은 대리석 홀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어쩌면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혼자 아무렇게나 생각하던 중, 그녀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자 움찔거린 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익숙한 울림이었다. 예언의 울림.

'왕국의 별은 영원했던 이의 딸과 맺어지리니.
그 순간 파멸은 잠재워질 것이며, 새로운 영원함이 깨어난다'

아, 그녀는 결국 짐작대로 예언자였다. 내용으로 보아 보통 중요한 사람은 아닐 듯 싶었다. 예언을 마친 대부분의 예언자가 그렇듯 그녀도 잠시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나서 으레 하는 인삿말을 덧붙였다.

"항상 그래왔듯, 예언은 불완전해요."

왕국의 별의 대답은 간결했다.

"더이상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은 또다시 천으로 가린 듯 시야가 흐릿해졌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
"야, 벨! 일어나! 도서관에선 자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음, 그랬던 것 같다. 막 일어난 머리는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지만, 에린이 화났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 꿈을 꿨는 걸. 이번엔 정말 뭔가 있을지도 몰라."
"너 또 날아다니는 배 젤리라던가 그런 이야기 할 거면···!"
"그건 배가 아니라 자두였다고! 어쨌든 그런 게 아냐. 오늘은 뭔가 달랐어. 왕국의 별도 나왔거든."
"왕국의 별이 뭘 어쨌는데?"

에린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꿈 속에서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그러나 왠지 왕국의 별의 눈동자는 보라색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침실에 가서 알려줄게. 지금은 도서관이잖아?"

잠시 주위를 살피던 에린도 눈치챘나 보다. 아까부터 우리를 주의깊게 노려보는 전학생이 있었다. 뭐 그에게도 이름이 있겠지만, 이름은 맨 처음 들은 뒤 잊어버렸고, 우리 학교는 전학생이 거의 없다. 그러니 호칭은 전학생일 수밖에.

"쟤 또 우리 쳐다보고 있네. 정말 우리 둘 중 하나는 좋아하는게 분명해."

에린이 속삭인 내용에 웃음이 터지자 전학생 외에 나머지 사람들까지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우리는 곧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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