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사는 도부자
24下
좋은 놀림감
우여곡절 끝에 도경수 씨 목까지 꼼꼼히 썬크림을 발라주고 나서야 겨우 밥을 먹으러 나설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점퍼의 지퍼를 올리고 앞장서서 걷는 김종인 씨에게 굉장한 맛집 정보가 있는 듯 싶어 군말없이 도경수 씨 손을 잡고 졸졸 따라나서는데 도로변으로 나온 김종인 씨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한다.
" 김종인 씨 어디가는거에요? "
" 그러게 "
...
내 저 인간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 나는 나오면 그냥 여기저기 식당이 있을 줄 알았지 "
" 아 뭐에요. 제가 도경수 씨 썬크림 발라줄 동안 뭐했어요? 검색 좀 해보지 "
스마트폰은 폼인가, 으휴- 꽁시랑거리며 놀고있는 한 손으로 폰을 꺼내니 뒤에 있던 오세훈이 건방지게 주머니에 양 손을 꽂아넣고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른다. 인상을 팍 쓰며 뒤를 돌아보니 순간 움찔하더니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 게 먹자.. 대게.. "
대체 게 먹자는 이야기를 이렇게 은밀하게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 크게 이야기해! "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내 옆에 딱 붙어서있는 도경수 씨의 눈치를 보더니 또다시 속삭이는 오세훈
" 대게 비싸잖아.. 먹고싶은데.. 내가 사는거 아니잖아.. 나 진짜 돈도 없이 몸만 온거란말이야... "
자랑이다. 그러니까 오세훈의 말은 여행 경비는 모두 도경수 씨가 부담하는거고 대게는 비싸서 먹으러가자고 하면 염치없어 보일 것 같고, 도경수 씨는 내 말은 잘들어주니까 내가 대게를 먹으러가자고하면 먹을 수 있다. 이 말인가,
이거 이눔시키 쓸 때없이 머리쓰네
" 도경수 씨, 오세훈이 대게먹고싶대요!! "
잡은 손을 격하게 흔들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도경수 씨에게 다 일러바치니 뒤에 있던 오세훈이 허, 하고 헛웃음을 친다. 그런 녀석을 힐끔 보고는 나와 눈을 꼭 마주치며 되묻는 그
" 대게요? "
" 아 네 경수형, 대게 어때요? 어? 대게 "
톡 말을 끼어들면서 자기 옆에서 멍때리며 서있는 박찬열을 툭툭치는 오세훈
" 찬열이도 대게 먹고싶다고 그러고 ○○○도 게 좋아하는데 "
???? 나는 너한테 게 좋아한다고 말한적 없는데요?
박찬열과 함께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자 사실을 확인하는 듯 도경수 씨가 빤히 나를 바라본다. 원래같았으면 내가 게순이라도 오세훈에게 엿을 먹이기위해 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을테지만 오늘따라 나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는 오세훈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하는동안 게가 많이 먹고싶었구나..
" 김종인 씨도 대게 괜찮아요? "
" 나야 좋지 "
김종인 씨의 오케이 사인도 떨어졌겠다 최종결재자인 도경수 씨까지 좋아요.하며 대게 먹방에 동의했다. 결국에는 오세훈만 개이득
얻어먹는 입장에 별 소리는 못하겠고 신나서 핸드폰 지도를 보며 길을 안내하는 오세훈을 따라가는데 휘적휘적 옆에서 걷던 박찬열이 말했다.
" 내일은 뭐 먹어? "
내일은 뭐 먹냐니.. 다음 날 급식 궁금해하는 고등학생인줄...
박찬열의 말에 아무생각이 없어보였던 김종인 씨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 그러게, 우리 내일 뭐 먹지? 회? 회 먹으면 매운탕은 기본아니겠어? "
" 오, 회 좋은데요, 형 회 좋아해요? "
" 없어서 못먹지, 찬열이 너도 회 좋아해? "
" 아 당연하죠, 저도 없어서 못먹어요. 초장에 듬뿍 찍어가지고 입에 ㄴ, "
회 소리에 연신 감탄을 하던 박찬열의 말이 끊기고 김종인 씨도 말수가 줄었다. 무슨 일인가싶어 도경수 씨와 입을 꾹 닫아버린 김종인 씨의 얼굴을 살피니 박찬열이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형 왜 그래요? "
" 찬열아 너 회 초장맛으로 먹어? "
.. 난데없는 질문에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나도 박찬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회 원래 초장맛으로 먹는 거 아니에요? 형은 무슨 맛으로 먹는데요 "
" 초장맛이라니, 그게 얼마나 독한데, 세훈아, 너도 회 초장맛으로 먹어? "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앞서가는 오세훈의 어깨를 툭툭치며 부르는 김종인 씨, 대게 생각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오세훈은 영문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 회는 초장맛이죠. 왜요? "
" 허.. 너네도 아직 애구나, 회는 씹는 맛이지! "
별걸가지고 병림픽이여... 괜히 저런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싫어 나와 동일한 마음인 도경수 씨와 슬금슬금 걸음속도를 늦추는데 그 새를 놓치지 않고 김종인 씨가 나를 붙잡았다.
" ○○씨는! 도경수 씨는!!? "
" .. 뭐가 말입니까 "
" 회 무슨 맛으로 먹어? 어? 씹는 맛이지? "
.. 씹는 맛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거람.. 그냥 각자 개취대로 먹는거지.. 약속이라도한 듯 도경수 씨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발을 동동 구르는 김종인 씨
" 왜 내 편이 아무도 없어!! 혹시 도경수 씨도 초장맛으로 먹어? ○○씨도?? "
대답할 가치를 못느낀 나머지 계속해서 회를 무슨 맛으로 먹냐는 김종인 씨의 말을 무시한 채 오세훈을 뒤따라걸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말하기 힘들어서 그만할 법도 한데 식당 도착하고 나서도 음식이 나올 때까지 박찬열과 회는 무슨 맛이냐로 100분 토론을 벌이는 김종인 씨가 이젠 웃기지도 않다.
" 아- "
내 관심은 오직 내게 먹을 걸 조달해주는 도경수 씨 뿐, 처음에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해하더니 오세훈이 호록호록 먹는 모습을 보며 금세 게살을 발라서 건내주는 그
몇차례 받아먹다가 생각해보니 정작 도경수 씨 입에는 아무것도 안들어가는지라 한 번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기도했다. 그러면 자기도 알아서 먹겠지,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로
" 다른 거 먹을래요?, 아니면 맛이 없어요? "
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게.
" 도경수 씨, 이거 먹어봐요 "
나도 도경수 씨처럼 똑같이 해주는 것, 그럼 또 잘받아먹는다.
보통은 자기껀 자기가 알아서 챙겨먹는데 우리는 서로 먹여주느라 바쁘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웃길지도 모르겠다. 그 다른 사람들에 전봇대 브라더스와 김종인 씨가 끼어있는건 함정
" 뭐해? 미쳤어? "
미쳤다뇨, 김종인 씨 말이 심하시네 (발끈)
" 아니 왜 굳이 손을 멀리 뻗으면서까지 못먹여줘서 안달이야 "
" 에이 형, 휴게소에서도 봤잖아요. 중증이라니까, 훈이가 백날 쪽줘봤자에요 "
" 진짜 무섭다 무서워 "
저도 제가 그 무섭다는 컾퀴벌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옛날에 밥먹으면서 이런 막대한 관심을 받았다면 진작에 체했겠지만 점점 도경수 씨를 닮아가는건지 이제는 조금씩 즐기는 부분도 없지않아있다.
" 먹여주면 더 맛있나? "
허튼 의문을 품으며 탱글거리는 게살을 오세훈의 입가에 들이미는 김종인 씨, 휴게소의 악몽이 떠오르지만 오세훈은 또 그게 좋다며 받아먹는다.
" 어때 세훈아, 남이 먹여주면 더 맛있어? "
" 남이 먹여줘서 더 맛있는건 모르겠어요 "
" 그럼 "
눈동자를 위로 굴리더니 짭짭거리며 입을 크게 우물거리는 오세훈은 이내 입을 열었다.
" 그냥 대게가 대게 맛있어요 "
...
아... 저 쓰레기같은....
우주 핵폐기물같은 드립을 뱉고나서 한순간에 싸해진 상 위, 도경수 씨가 건내주는 게를 받아먹을 생각도 못하고 욕을 할 뻔했다.
" ㅇ.. 어 그래 세훈아... 대게가 대게 맛있구나.. "
" ...죄송해요 형 "
" 그래 좀 미안해해야겠다 "
" 빨리 먹고 바다보러가요 "
가끔 기분이 좋을 땐 무리수 중에 무리수를 던지는 오세훈은 자기의 드립을 깊게 반성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좋은 놀림거리죠
" 그래, 도경수 씨 우리 대게 맛있는 대게 빨리 먹고 바다 보러가요! "
등껍질에 비빈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먹여주며 은근슬쩍 오세훈의 쓰레기 드립을 받아쳐주자 이내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도경수 씨
" 그럴까요, 세훈군 대게 맛있는 대게 많이 먹어요 "
" 와 진짜 경수형!! 형마저.. "
여행 계획 할 때부터 오세훈 놀리기에 이미 맛이 들려버린 우리는 오세훈 아버지께서 오셔도 못막을 정도다. 도경수 씨까지 안하는 척 다 놀릴 정도니까
물론 대게 드립은 식당을 나서도 계속 되었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크게 기지개를 피던 김종인 씨는 박하사탕을 두어개 입에 넣고 나오는 오세훈을 짖궃게 바라보았다.
" 대게 맛있는 대게 잘먹었다. 그럼 이제 대게 멋있는 바다 보러가야지? "
" 아 종인이형, 형 제발 "
" 왜, 세훈이 대게 민망하니? "
흡ㅋ크큭픜 아랫 입술을 꾹 물어가며 웃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자기 대란때도 터졌던 김종인 씨의 언어유희는 오늘도 터진다. 길바닥에서 대놓고 크게 웃지도 못하겠고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을 가리기위해 옆에 있는 도경수 씨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뒤에서 웃든 울든 신경도 안쓰고 세훈이는 대게 키가 크구나, 세훈아 여행 오니까 대게 좋지? 하는 대게드립이 계속 되자 오세훈은 아아아 하며 되도않는 앙탈을 부린다.
옆에서 낮게 웃던 도경수 씨는 자신의 위팔에 얼굴을 묻은 날 이제야 발견하고 왜 그래요? 하며 물었다.
" 아니.. 너무 웃겨서.. "
웃음을 참는 나머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짝 들며 말하자 이쁘게 손깍지를 낀 손 대신 다른 손등을 조심스레 내 볼에 가져다대는 그. 시원한 기운이 얼굴을 조금 식혀준다.
" 그랬어요? 얼굴 빨개졌다 "
어후, 작게 숨을 뱉고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자 귀엽게도 나를 따라 함께 손부채질을 해준다.그러다가 찔끔 내 눈가에 맺힌 눈물도 닦아주고 또 손부채질 해주고, 벌써 저만치 가버린 김종인 씨가 뒤돌아 우리에게 외쳤다.
" 그만 꽁냥거리고 빨리 와, 둘이 커플 아니랄까봐 대게 꽁냥거리네 "
" 으아아아아아아ㅏㅏ 형!!! "
투닥투닥, 자기가 내뱉은 드립을 책임지지 못하는 오세훈과 그를 놀려먹는데 완전히 맛들린 김종인 씨, 찰칵찰칵 일몰을 배경으로 셀카 찍기 바쁜 박찬열 그리고 잃어버릴새라 손을 꼭 잡고있는 도경수 씨와 나.
이상하지만 너무 잘맞는 조합이다.
숙소쪽으로 향하다보니 어느덧 가까이 펼쳐진 겨울바다에 너나할 것없이 괴성을 지르며 모래사장으로 뛰어들어간다.바닷가라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이라 그런가 펄떡펄떡 뛰며 놀기바쁘다.
소듕한 커플 운동화에 모래라도 들어갈까 조심조심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내가 넘어질까 힘이 들어가는 도경수 씨의 손
" 아, 그러고보니 도경수 씨 카메라 안가져왔죠? "
사진 겁나 많이 찍어둘거라고 다짐했는데..
" 밥 먹고 숙소 들를 줄 알았어요. 지금 빨리 가서 카메라 가져올까요? "
" 내일 많이 찍어요 우리, 요즘은 폰카메라도 좋아서 "
솔로몬마냥 훈훈하게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돌계단 옆에서 한참 셀카를 찍어 인스타에 올리던 SNS 중독자 박찬열이 말했다.
" 좋아요 쭉쭉 올라간다. 경수형 저랑 셀카 한 번만 찍어요 "
" 싫습니다 "
역시 도경수 씨! 나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가차없지!
" 너무해, 그럼 ○○○! 같이 찍자 "
같이 찍는거래봤자 박찬열이 앞에서 폰을 멀리 들고 나는 뒤에서 빼꼼 얼굴만 내미는게 다지만 사진을 찍느라 뒷전으로 밀려난 도경수 씨는 표정에서 언짢음을 지우지못했다. 도경수 씨의 질투하나는 잘알고있는 내가 다시 그의 손을 잡고 강하게 이끌어 작은 핸드폰 화면 안에 우리 세 얼굴을 모두 담았다.
" 도경수 씨 저기 렌즈 보고 웃어요 "
항상 사진은 단둘이서만 찍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찍는건 많이 낯선 까닭에 미세하게 굳어있는 도경수 씨를 풀어주기위해 다정하게 팔짱을 끼니 사르르 풀리는 그의 얼굴
셔터소리가 다섯번정도 들리자 억지로 웃느라 점점 떨려오는 안면근육에 먼저 얼굴을 빼려고 하던 찰나 박찬열이 됐다! 하며 폰을 내렸다.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든 구워먹든 신나게 핸드폰을 두드리는 박찬열을 뒤로하고 어딘가에서 신나게 놀고있을 오세훈과 김종인 씨를 찾았다.
둘이 같이 놀고있을 줄 알았는데 저쪽 멀리 김종인 씨 홀로 모래사장에 쭈그려앉아있다. 자세히 보니 바다 가까이 뻗은 손에는 폰이 들려있다.
" 김종인 씨 뭐해요? "
전화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못했는지 내 말에 화들짝 놀란다. 그렇게 여자없다고 하더니 혹시 여자친구하고 전화하고 있었던건가 하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기니 화면에 뜨는 네 글자
우리엄마
" 에이 엄마, 여자친구는 무슨, 친구들이야 "
괜히 다정한 모자의 통화를 방해하면 안될 것 같아 조용히 도경수 씨와 발걸음을 돌리는데 김종인 씨가 잠깐만 하고 우리를 붙잡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의 모습에 저멀리 모래사장을 걷고있던 오세훈도, 열심히 인스타를 하던 박찬열도 슬금슬금 다가온다.
" 저번에 얼굴 봤지? 찬열이도 있고, 찬열이 친구 세훈이도 있고 도경수 씨도 있고 도경수 씨 여자친구도 있고 "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잔잔한 웃음이 김종인 씨 얼굴 가득 퍼졌다.
" 엄마 겨울바다 좋아하는데 소리만 들어가지고 귀 근질거려서 어떡해 "
왠지모르게 애틋한 마음에 찌잉- 거리는 코를 훌쩍이는데 박찬열이 나를 툭 치며 조용히 입모양으로 누구냐며 물었다.
" 김종인 씨 어머니 "
내 대답에 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박찬열은 냅따 크게 외쳤다.
" 어머니!!! 저 찬열이에요!!! 전에 한 번 뵀죠!!!! " ( 12화 참조 )
깜짝 놀란 나머지 박찬열의 등짝을 때리며 말렸지만 오히려 김종인 씨는 스피커 폰 모드를 해서 녀석에게 핸드폰을 넘겨준다. 박찬열이 신나게 어머니!어머니! 하며 전화를 받는 사이 뿌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김종인 씨를 의문스럽게 쳐다보니 한쪽만 올렸던 입꼬리를 양쪽 다 올리고는 말한다.
" 우리 엄마,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파도소리라도 들려주려고 "
카페에 있을 때 종종 병원 가야한다고 먼저 자리를 뜰 때가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의외로 효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김종인 씨에 내심 감탄했다.
" 조금있다가 도경수 씨도 전화 받아봐, 우리엄마 도경수 씨 엄청 좋아하던데 "
" 저를 말입니까? "
" 도경수 씨만큼 우리 엄마 챙겨주는 내 친구없다고 난리야 "
오~ 도경수 씨 완전 사랑둥이네.
머쓱하게 웃던 도경수 씨는 박찬열이 건내주는 폰을 받아들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익숙하게 통화를 하는 도경수 씨를 가만히 보는데 솨아 솨아, 시원하게 치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김종인 씨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작게 말을 걸었다.
" 도경수 씨가 괜히 좋은 친구가 아니야 "
*
좋은 친구, 종인이 경수를 확실히 좋은 친구, 좋은 사람, 된 사람이라고 느낀 건 조금 예전이었다. 잠깐 종인과 경수의 사이가 틀어졌다가 화해했을 때도 물론 경수가 좋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종인에겐 그 후가 더 인상에 확실히 틀어박혔다.
" 아깜짝이야! 뭐야 도경수 씨? "
" 안녕하십니까 "
토요일 낮, 집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엄마의 간호를 위해 병원에 도착한 종인은 병실을 열자마자 으악! 하며 소리를 질렀다. 원래는 간호사들도 다른 입원 환자도 없는 한적한 2인실 병실 안에서 홀로 티비만 보고있을 엄마였는데 오늘은 예상에도 없던 경수가 보란듯이 보호자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나야 안녕하지, 근데 도경수 씨가 왜 여기있어? "
" 왜 여기 있냐니 네 친구보고 말 그렇게 할래? "
" 엄마는 도경수 씨 언제 알았다고 "
서랍 위에 올려진 푸짐한 과일 바구니에 눈을 반짝이던 종인은 바나나 하나를 따서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경수를 만류하고 보호자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 진짜 깜짝 놀랐네, 우리 엄마 병문안 온거야? "
" 안됩니까 "
" 안되기는, 이렇게 와주면 좋지, 과일 들고오면 더 좋고 "
" 얘가, 안그래도 혼자 병실에서 있으면 심심한데 이렇게 종인이 친구라고 와주니 좋고말고 "
냠냠 맛있게 바나나를 다 먹은 종인은 다시 과일바구니를 뒤적거려 사과를 꺼냈다.
" 도경수 씨 그거 이야기했어? "
서랍에서 깨끗하게 닦여 번쩍번쩍 광이 나는 접시와 과도를 꺼내는 종인의 질문에 경수는 어깨를 으쓱 거렸다.
" 엄마, 도경수 씨가 바로 병원ㅂ "
병원비 다 부담해준 사람이야,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경수는 종인의 팔목을 잡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종인은 눈을 굴려 경수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말을 삼키고 발걸음을 옮겼다.
" 사과 씻어올게 "
" 저는 물 좀 더 떠오겠습니다 "
달칵 병실 문을 닫고 경수는 빈 물통을 들고 배선실로 향하는 종인을 따라나섰다. 손바닥 위에서 사과를 굴리던 종인은 다시 경수에게 물었다.
" 왜, 우리 엄마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
" ..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단순히 저를 김종인 씨 친구로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
말이 없던 종인은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내며 왼쪽 옆에 크게 난 배선실 문쪽으로 몸을 틀었다. 혹시 자신이 말을 잘못한게 아닐까 불안감을 느낀 경수는 어.. 하며 목 뒤를 긁적였고 잠시 후 묵묵히 싱크대에서 사과를 씻던 종인이 입을 열었다.
" 지금 도경수 씨 나한테 멋진척 하는거야? "
" 예? "
멋진척이라니, 그렇게 생각 할 줄은.. 당황스러운 나머지 급히 변명할 거리를 찾는 경수를 힐끔 쳐다보던 종인이 푸스스 웃었다.
" 그런거면 성공했어, 완전 멋있네 "
" ... "
" 나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다른 사람 돕고 써먹어야겠다. 존멋인데 그거 "
단순히 저를 김종인 씨 친구로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크~ 경수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사각사각 사과를 깎는 종인의 손길이 능숙하다. 그릇에 이쁘게 담긴 사과 한조각을 정수기에서 물을 뜨는 경수의 입에 물려주는 종인
" 진짜 내가 도경수 씨한테 여러모로 고마운게 많아 "
사과를 물고있는 터라 입이 묶인 경수는 그저 픽 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종인이 굳이 찾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주말에 종종 시간이 날 때면 경수는 과일이나 병원에서 홀로 심심해하실 종인의 어머니를 위해 책을 사다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간호사들은 자주 보이는 경수를 김씨 가문 둘째아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너무 경수의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 종인은 그만 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경수는
" 부담스럽거나, 싫으신게 아니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
라고 대답을 일축했다.
종인은 처음에 10년동안 알고지낸 친구조차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온 적이 없는데 이제 안지 1년 가까이 된 사람이 그것도 친해진 시간은 더더욱 얼마 안되는 사람이 이러나 싶었지만 가끔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자리를 비울 때면 조용조용 자신의 엄마와 말동무를 해주는 경수의 모습을 보고있으면 알고지낸 시간이 무슨 소용이랴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경수는 여기저기에 치여 만신창이가 된 종인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
도경수 씨의 전화를 받는 사이 조용히 김종인 씨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감동이다. 이거시 바로 남자들의 우정...!!
감동적인 영화를 한 편 본듯이 찡해지는 마음에 네, 다음에 꼭 모시고 올게요. 하며 전화를 끊는 도경수 씨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도경수 ㅆ... "
" 맥주먹고싶다 "
우리 커플의 꽁냥거림은 더이상 보기 싫다는 듯이 말을 끊는 박찬열에 쯧, 혀를 차고 눈을 흘겼다. 대게집에서도 그렇게 한 잔만 마시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바다 보러갔다가 취해서 바다에 뛰어들면 어떡하냐고 말렸던게 화근이었다. 계속해서 옆에서 맥주~ 맥주~ 노래를 부르는 박찬열
" 술도 못마시는게 무슨 맥주야 "
" 야 나 요즘 주량 늘었거든? 자고로 이렇게 놀러왔을 때 마시는 술이 진짜지 "
" 그럼 서울에서 먹던 술은 가짜냐? "
" 그렇지! 그건 가짜야 "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못마셨던거니..? 그런거니..?
" 훈이도 마시고 싶은데, 조금 있다가 올라가면서 몇캔 사들고 올라가자 "
평소에 먼저 술 마시자고 안하던 오세훈까지 술타령이다. 한 명이 술타령을 시작하니 김종인 씨도 좋다며 술파티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금세 술로 대동단결이 되었다.
어휴
술꾼들은 무시하고 쓸때없이 시간을 빼앗겨 거의 다 져가는 일몰을 찍기위해 팔을 쭉 뻗어 해에 포커스를 맞추자 우왘! 하며 카메라 렌즈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오세훈
" 아 미친! 심쿵했잖아 또라이야!!! "
" 사진은 다같이 찍어야지 "
" 비켜봐, 바다 좀 찍게 "
도경수 씨 앞에서 나쁜 말은 안쓰기로 했건만... 단호한 내 말에 오세훈은 툴툴거리면서 얼굴을 치운다.
찰칵찰칵 붉은 노을과 하얗게 빛이 반사되어 넘실거리는 바다를 찍고나서 찍힌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바람에 날린 머리를 정리하고 고개를 내리는데 옆에서 산만하게 왔다갔다 거리는 발이 신경을 건드린다.
어떤 미친자가 이런 날씨에 맨발로.. 하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맨발의 주인은 다름아닌 사진은 다같이 찍어야한다는 오세훈이었다.
" 야, 지금이 한여름도 아니고 맨발로 다니긴 왜 맨발로 다녀? "
" 진짜 이게 또 낭만 없는 소리를 하네, 바다에 왔으면 자고로 겨울이라도 한 번쯤 물에 발은 담궈봐야지 "
네, 낭만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오세훈을 보자 바지를 걷고는 보란듯이 당당하게 물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들어간다.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있던 도경수 씨도 눈이 동그래진다.
양발 모두 다 물 속에 담구고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편안한 미소를 짓는 오세훈에 정말 괜찮나 싶었지만
" 자 이것 봐 괜ㅊ, 으아ㅏㅇ아ㅏ아ㅏㅇ!!!!! "
역시나 10초도 안돼서 소리를 지르며 물 속에서 뛰쳐나온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래사장에 철푸덕 주저앉은 오세훈은 쓰읍거리며 빨개진 발을 미친듯이 비볐다.
" 아 존나 추워, 얼어뒤질뻔 "
너무나도 한심하고 무모한 녀석에 그를 치켜보던 우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 바다에 왔으면 자고로 한 번쯤 물에 발은 담궈봐야한다며, 물이 대게 차갑니? "
" ... 취소 취소 대게 드립도 취소 "
오늘따라 병신미 포텐을 터뜨려주시는 오세훈 덕분에 웃을 일이 많다. 저건 동영상을 찍어뒀어야 하는건데
오세훈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던 김종인 씨가 오세훈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며 말했다.
" 해 거의 다졌으니까 사진 몇장 찍고 바다는 내일 또 보자 "
김종인 씨의 말에 모두 좋다 이렇다 저렇다 대답도 없이 뽈뽈거리며 나와 도경수 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진은 꼭 자기 폰으로 찍어야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하는 박찬열의 의견에 지나가는 중년 부부 한 쌍을 붙잡았다.
사진 좀 찍어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준 아저씨께 핸드폰을 맡기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자 도경수 씨 옆에 있던 김종인 씨가 싹싹 자리를 비켜준다. 그렇게 남자를 둘둘씩 양 옆으로 끼고 서서 의자왕이 된 기분으로 잔뜩 이쁜 표정을 하는데 몇번 셔터 소리가 들리니 왼쪽 맨끝에 서있던 박찬열이 잠깐 하고 외쳤다.
" 하나, 둘, 셋 하면 손들고 높이 뛰는거야 "
뭐 그런걸 찍냐고 한 소리하려고 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찍으랴 먼저 슬쩍 도경수 씨 손을 잡자 마음이 통한 듯 이쁘게 눈을 휘어보이는 그가 손에 단단히 힘을 준다.
시동을 거는 것마냥 하나~ 둘~ 박찬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우리는 셋이 들리자마자 일제히 와!! 하며 뛰었고 사진을 찍어주시는 아저씨는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오케이 사인을 보내주셨다.
다리가 긴 박찬열이 성큼성큼 달려가 감사합니다! 하며 핸드폰을 받아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 보여주기 시작했다.
역광때문에 살짝 어둡지만 가만히 서있는 사진엔 각자의 밝은 얼굴들은 그대로 이쁘게 담겨있었고 대망의 점프 사진.
" 오세훈 초사이언인인줄 "
" 너도 만만치않거든. 어, 찬열이 배나왔다 "
" 내 하얀 속살이 드러난 사진이라니.. 이 사진에서 유일하게 잘나온건 경수형밖에 없는 것 같은데 "
인정.. 센터에 있는 나보다 독보적인 미모를 뽐내고 있는 도경수 씨
" 찬열군 그 사진 저한테 좀 보내줄래요 "
" 조금있다가 단톡방파서 뿌릴게요 "
점프하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내달란다. 그리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카메라를 키는 그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뭐가 그렇게 힘든지 겨우 말을 꺼낸다.
" 우리 사진 찍을까요? "
" 우리 둘이서요? "
먼저 사진 찍자고 말하는게 그렇게 힘들었나
" 못찍을게 뭐있어요. 도경수 씨 사진 실력 많이 늘었나 봅시다!! "
내 말에 좋다며 곧바로 팔을 뻗어 사진을 찍는데 우리 사이에 놓여진 손때문인지 이상하게 거리가 멀어보인다.
" 도경수 씨 내 어깨에 손 올려볼래요? "
내 어깨에 손을 올려보라고하자 네? 라고 당황한 그가 살포시 가까이 맞댄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린다.
" 아니! 그쪽말고 어깨동무하듯이! "
" ㅇ.. 어깨동무요? "
전에는 그렇게 잘하더니 막상 멍석깔아주니 밍숭맹숭한게... 도경수 씨 내재된 선수아니야?
이제야 말귀를 알아먹고 쭈뼛쭈뼛 따뜻히 내 어깨를 감싸주는 그. 비로소 제대로 된 커플 같아보인다. 천천히 초점을 맞추고 찰칵 하는 도경수 씨 핸드폰 카메라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셔터 소리가 하나 더들린다. 도경수 씨가 찍은 사진은 확인할 틈도 없이 뒤를 돌아보니
" 바퀴벌레 커플, 업로드 , 좋아요 , 성공적 "
아닐까다를까 인스타계의 좋아요부자 박찬열이다.
" 뭐하냐? "
" 우리의 바퀴벌레 커플 "
우리 사진으로 어떤 헛짓거리를 싸지를까 냅따 달려가 박찬열의 핸드폰을 뺏어보니 나란히 사이좋게 서있는 나와 도경수 씨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 게시되어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짧은 문장은 바퀴벌레 커플, 커플지옥도 아닌
real_pcy 우리 귀여운 커플. 경수형 ♥ ○○○ #사이좋은커플 # 결혼해라
심지어 벌써 좋아요 세 개가 달렸다.
" 그렇게 꼴보기 싫어하는 것 같더니 귀여운 커플? "
" ..그럼 역겨운 커플이라고 할까 "
베실베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길 새없이 옆에 선 도경수 씨에게 박찬열이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보여주자 가까이 볼을 맞대며 눈을 반짝이는 그
" 사진 이쁘게 잘 찍었네요, 조금있다가 이것도 보내줄래요? "
사진 이쁘게 잘 찍었다는 도경수 씨의 칭찬에 신이 난 박찬열이 네!! 하고 대답했다. 군말없이 핸드폰을 돌려주고 멀뚱히 서있는데 그가 조금 전 찍은 거라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가로등 밑에서 찍었던 것 보다는 훨배 낫지만 내가 못생겨보인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본판 불변의 법칙인가..?
그래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경수 씨를 져버릴 수가 없어 훨씬 잘찍었네요~ 하며 그를 칭찬했다. 한참을 그가 남몰래 찍은 내 사진을 보며 이게 뭐냐며 수다를 떠는데 벌렁 열고다녔던 점퍼 지퍼를 올려 온몸을 꽁꽁 싸맨 김종인 씨가 도경수 씨!! ○○○ 씨!! 하며 우리를 불렀다.
" 해졌어!! 이제 들어가자!! "
뭐했다고 벌써 해가 졌네... 네! 하고 외치는 내 대답과 함께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이쿠야 하며 도경수 씨에게 팔짱을 꼭 끼니 많이 추워요? 하고 묻는다.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깔끔하게 잔머리까지 내 귀 뒤로 넘겨주고는 그럼 빨리 들어가요 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막 해가 지고난 뒤라 아직까지는 푸르스름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찬바람 때문에 코가 빨개진 도경수 씨도 한 번 보고 술 생각에 흥겨운 발걸음으로 깡총깡총 뛰어가는 전봇대 브라더스도 보고 형이라고 챙겨준다며 전봇대 브라더스들이 나대다 넘어질까 뒤쫓아 달려가는 김종인 씨도 보고 새삼스레 나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먹고, 사진 찍고 한게 전부인 오늘 하루 잘 놀았다.
*
"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어!!!! "
...
편의점에서 자신의 카드로 다 계산하겠다고 큰소리 치던 김종인 씨는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할 만큼 맥주와 중앙 시장에서 각종 튀김부터 안주거리들은 모조리 쓸어담아왔다. 김종인 씨가 술에 강한지는 항상 먼저 필름이 끊겨 알 길이 없기때문에 그저 씻고 나와 젖은 머리로 김종인 씨가 주는 맥주캔을 묵묵히 들이키는 그녀를 살폈다.
" 오늘은 뻗으면 그냥 바로 누워서 자면 되니까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어!! 도경수 씨도 빨리 마셔!! "
" 드디어 우리 경수형 ○○○ 술주정 보겠네 "
거실 테이블 주변으로 도란도란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지만 신경이라는 신경은 모조리 ○○씨에게 향해있다. ○○씨 술 먹이기에만 집중되어있는 까닭에 내가 술을 먹든 안먹든 관심이 없다는 건 좋지만...
" 마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돼요 "
주변의 강요에 무리하는거 아닌가 싶어 캔을 잡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하자 오히려 세훈군이 아우성이다.
" 에이, 마시기 싫은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쟤 술 약해서 지금부터 주정 부릴지도 몰라요 "
" 니가 나보고 술 약하다니 웃긴다 진짜, 내기 할래? "
" 내기? 무슨 내기 "
" 술 내기, 먼저 취하는 사람이 지는 거, 진사람이 내일 이긴사람 노예해주기 "
" 오 콜콜콜 나도 나도, 열이도 할래 "
안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걱정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고있으니 닭강정을 입에 물고 웃던 김종인 씨가 두 눈을 찡긋거리며 입모양으로 가만히 있어, 하고 말한다.
누가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말 없이 쭉쭉 맥주를 들이키는 전봇대 브라더스와 ○○씨사이에 껴서 늘어가는 빈 캔만 세는데 찬열군에게 슬슬 끼미가 보였다. 주정을 할 끼미. 코를 한두번 훌쩍거리더니 양손으로 포크를 쥐고 닭강정을 야금야금 먹는 찬열군의 주량은 두 캔. 아니 한 캔 반인가? 짤랑짤랑 찬열군에 마시다 만 캔을 흔드니 꽤나 묵직하다.
" 천사 누나 보고시포... 천사 누나 조화... "
" 찬열이 벌써 취했어??? "
" 조닌이 형도 조화ㅠㅠㅠㅠ 조닌이횽ㅠㅠㅠㅠㅠㅠㅠㅠ 켱수형은 나랑 같이 셀카찍기 실타코ㅠㅠㅠㅠㅠㅠㅠ "
찬열군이 풀린 혀로 찡얼찡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잔을 놓고 소리치는 김종인 씨와 드디어 완전히 술주정을 시작하는 찬열군
" 벌써 취하면 찬열이가 제일 꼴찌인데 "
" 힝유유ㅠㅠㅠㅠㅠ ㅠㅇ유ㅠ 열이 탈락이야? 어떠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핰ㅋㅋ 박찬열 탈락!! 탈락!!!!!! "
솔직히 내가 봤을 때 찬열군에게 삿대짓을 하며 호탕하게 웃는 ○○씨는 진작에 취한 것 같다. 다만 대놓고 티를 안내서 그렇지. 찬열군은 야금야금 뜯던 닭강정은 다먹었는지오징어 다리 하나를 물고 거실 바닥에 내가 탈락이라니.. 하고 칭얼거리며 뒹굴었다.
혹시 까딱하다가는 ○○씨도..
" 괜찮아요? 무리해서 더 안마셔도돼요 "
" 괜차나여! "
그리고 마주앉아있는 세훈군을 죽일듯이 노려보는 그녀는 저건 꼭 밟을거에요... 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막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던 세훈군은 킬킬 웃으며 들고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 허얼 야 ○○○ 취했냐? 취했어? 얼굴 빨개졌대요!!! "
" 안닥치냐?? 내가 너는 기필코 이긴다 "
" 나 주량 완전 늘었거든~ 넌 나 못이겨 에벱벱베ㅋㅋㅋㅋㅋㅋㅋ "
과연 세훈군은 오늘만 사는것일까? 주량이 늘었다더니 안색 하나 안바뀌는게 정말인가보다.
옆에서 씨익거리며 성난 숨소리를 뿜던 ○○씨가 땅콩 하나를 집어들고 세훈군의 이마에 딱!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꽂아넣었다.
" 이 그지같은게! "
아! 하고 땅콩에 맞은 이마를 어루만지던 세훈군은 한동안 죽었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 잠잠해질 때쯤 훌쩍 하고 코먹는 소리가 들렸다. 세훈군이었다.
" 아씨.. 진짜.. "
촉촉한 눈가로 고개를 드는 세훈군. 땅콩이 장정 한 명을 울릴 수 있는 무기였을 줄은 몰랐다. 역시 비행기를 리턴시킬 정도였으니... 세훈군은 더욱 서럽게 코를 훌쩍이며 이마를 매만졌다. 조용히 소리를 죽이고 세훈군의 눈치만 보는데 주륵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 세훈군 괜찮아요? "
정말 땅콩이 많이 아팠나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켜 세훈군에게 가려고하자 하, 하며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하지만 이마는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땅콩의 충격파로 뇌가 다친건가... 다시 자리에 앉아 세훈군의 안색을 살폈다.
" 하... 진짜... 어떻게.. "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받치던 세훈군은 몇번 더 하, 하고 숨을 내뱉다가 입을 열었다.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 "
" ... "
신나게 맥주를 들이키던 김종인 씨도 난데없는 진지한 상황에 손을 멈추었다.
" 어떻게!! 슈퍼스타가 될 오세훈님 이마에!! 땅콩을!! 종인이 형 제 이마 좀 봐요, 피 안나요?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 "
" ... 어.. 깨끗한데.. "
깨끗하다는 김종인 씨의 말에도 세훈군은 아랑곳하지않고 분노를 표출했다.
" 저 이제 망했어요.. 제 이마에는 땅콩모양 흉터가 남을거고.. 제 팬들은 저를 땅콩 왕자라고 불러주겠죠.. "
순간 멋대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세훈군은 조용히 잠드는게 술주정인줄 알았는데 건들면 이렇게 되는구나.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넣기도 꾹 물어보기도 했지만 웃음을 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옆에서 대놓고 크게 웃는 김종인 씨의 웃음소리가 들려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서는 어떡해요.. 하는 세훈군
" 어떻게 슈퍼스타가 한순간에.. 땅콩 왕ㅈ.. 어.."
" ... "
" 그러고보니 슈퍼스타보다 왕자가 더 높은 거 아니에요? "
실신 직전으로 웃던 김종인 씨는 어휴, 하고 심신을 달래며 테이블 위에 고이 모셔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대게 이후로 좋은 놀림거리가 탄생할 것 같다.
" 그래 세훈아, 슈퍼스타보다 왕자가 더 높은거야 "
" 허얼! 그럼 저 왕자할래요!! 땅콩 왕자!! "
" 큽ㅋ..ㅡ 그...그래 세훈이 땅콩 왕자해 "
땅콩 왕자 하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는지 세훈군은 우와!! 하며 내 앞에 놓여진 땅콩 봉지를 들어 하나하나 꺼내 허공에 뿌린다. 위에서 떨어지는 땅콩에 정수리를 맞아도 웃음을 끊지않는 김종인 씨는 그 모습을 생생히 영상으로 담았다.
" 이제 저를 슈퍼스타 말고 땅콩 왕자로 불러주세요!! "
정말 기쁜 듯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땅콩을 한움큼 쥐어 입 안에 넣는 세훈군을 보며 더이상 웃음을 참지못하고 터뜨리자 무언가 툭 가볍게 내 어깨에 기대오는 느낌이 든다.
" 지가 땅콩 왕자래요..? 미친놈.. "
술이 들어가 풀린 눈으로 내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댄 그녀였다. 어쩔 줄 몰라하다가 좀 더 편히 기대게하기 위해 어깨를 감싸주자 거부하지않고 오히려 몸을 웅크려준다.
" 졸려요? 들어가서 잘래요? "
뻔히 눈커풀 가득 잠이 달라붙었는데도 꿋꿋이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잠 참는 것도 힘들텐데
열심히 땅콩을 뿌려대다가 이내 지쳐서 땅콩들과 함께 뻗어버린 세훈군을 보며 다시 한 번 더 웃는데 꾸벅꾸벅 이제 잠에 고개도 못가누는 그녀. 훨씬 편하게 침대 위에 재우려고해도 싫다며 도저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떡하지 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데 꾸벅 기우는 그녀의 머리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
어...
음...
" 도경수 씨, 괜찮아? "
" ... 괜찮은 것 같습니다 "
" 안괜찮아보여 "
순식간에 굳어버린 내 표정을 눈치 챈 김종인 씨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힐끔 내 무릎 위에 누워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니 진짜 죽을 맛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게 머리까지 핑 돌 지경... 아 진짜 어떡하지... 후하후하 작게 심호흡을 해도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심장에 연신 입술을 축이는데 김종인 씨가 부스럭부스럭 편의점 봉지에서 사이다 한 캔을 따 내게 건냈다.
" 딱봐도 힘들어보이는구만, 그냥 ○○씨 방에다 재워놓고 나와서 한 잔 해 "
그럼 깨워야하는데... 나는 그저 꾹 입을 다물고 김종인 씨가 건내준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원래는 목이 따가워 잘 마시지않았지만 이거라도 안마시면 안 될 것 같다. 찬 기운이 속으로 들어가자 미친듯이 뛰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된 느낌이다.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후- 하고 깊게 숨을 내뱉고 채 마르지 않아 헝클어진 그녀의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정리해주었다.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자 새근새근 들리는 숨소리부터, 작게 떨리는 속눈썹까지 이제야 모든게 제대로 보인다.
곱게 뻗는 속눈썹부터 금방이라도 밝게 웃으며 도경수 씨! 라고 외쳐줄 것만 같은 입술까지 하나하나 다 만져보고싶은데 잠을 방해할까 차마 그럴 수 없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그저 거실의 밝은 전등을 가려주기위해 그녀의 눈 위로 양손을 모아 작은 가림막을 만들어주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종인 씨가 낮게 웃었다.
" 내가 인정할게, 도경수 씨는 사랑꾼 중에 사랑꾼이야 "
" ... "
그러며 손에 쥐고있던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거실 바닥에 나뒹구는 찬열군이 앙 물고있던 오징어 다리를 뺏어 뜯는다.
" 보통 다 내 여자다! 싶으면 콩깍지가 벗겨질 조짐이 보이거든? 이게 내가 한 두번 본게 아니에요 "
" ... "
" 근데 도경수 씨는 그냥 저냥 ○○○씨 다좋다고~ 아주 그냥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김종인 씨는 냅따 바닥에 드러눕고는 두 팔을 허공에 쭉 내뻗으며 소리쳤다.
" 그래!! 그렇게 좋으면 결혼 해라!!! "
장인어른도 아니고 결혼 해라 라니.. 참고있던 웃음이 피식 터져버렸다.
" 아무렴!!! 김종인 님의 연애 코치를 받은 첫커플이니까 결혼해야지!!!! "
" 많이 취하셨습니다 "
" 내가? "
많이 취했다는 말에 벌떡 허리를 일으켜세우는 김종인 씨
" ..내가 많이 취하긴 했나보네.. 도경수 씨한테 그런 말까지 듣고 "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묵직한 맥주캔을 홀짝이다가 튀김 하나를 낼름 집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많이 취했으면 들어가서 자야지 "
배를 드러내고 코를 고는 세훈군의 옷을 정리해주던 김종인 씨는 딱히 전봇대 브라더스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발로 성의없이 슥슥 밀어두었다.
" 이눔시키들, 맨날 술에 꼴아가지고 "
" 아 혹시 그쪽 방에 침대 하나 남으면 제ㄱ "
방에 들어가려는 김종인 씨를 부르자 느리게 꿈뻑거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본다.
" 나는 말이야 "
" ... "
" 문을 안잠그면 잠이 안와 "
그리고는 술 취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잽싸게 방 안으로 달려들어가 들으란 듯이 달칵 하고 문을 잠근다.
... 도대체가 김종인 씨의 속은 알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깨울 수 밖에, 무릎에서 곤히 잘 자고있던 ○○씨를 조금씩 흔들어 깨우니 밝은 전등에 살풋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
" 다 자니까. ○○씨도 이제 들어가서 자요 "
" ...내기는요.. "
아무리 술을 마셔도 내기만큼은 못잊겠다 이건가. 하긴 내기때문에 세훈군에게 강력한 땅콩을 던질 정도였으니까
" ○○씨가 이겼어요. 그러니까 이제 가서 잘까요? "
" ...좋아요.. "
잠기운에 취해 지긋이 눈을 감고 말하는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위태위태한 모습에 얼른 옆에서 부축해주자 작게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 도경수 씨.. 우리.. 손만 잡고 자요.. "
...
이건 보통 남자들이 하는 대사가 아니었던가? 나는 기분나빠할까 털끝조차 건드리지 않을 심산이었는데 손만 잡고 자자니.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혼자 자는게 습관화 되있었는데 다른 이와, 그것도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자는 느낌은 어떨까. 침대에 누워 비몽사몽한 그녀의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이제 나도 자야하는데 선뜻 침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냥 같이 자기만 하는 건데 왜 이리도 긴장이 되는지, 손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다.
안절부절, 방 안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침대 주변만 왔다갔다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거실 쇼파에 나가서 잘까 하고 거실로도 나가봤지만 어느샌가 세훈군이 긴 기럭지로 쇼파를 독차지하고 있고 또 거실 바닥에서 가만히 누워 자기도 웃기고.
그래 ○○씨가 손만 잡고 자자고 했으니까, 그래...
억지로 합리화를 한 후, 살짝 이불을 걷었는데 진짜 떨려서 미쳐버릴 것 같다. 그런데 또 올라가는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안한다.
후- 오늘만 몇번이나 심호흡을 하는지 모르겠다. 침대가 흔들려 ○○씨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위로 올라가 눕는데 어둠 속에 오래 있느라 밝아진 눈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띈다. 곧게 침대 위에 누워 ○○씨만 바라보는데 그녀가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내 쪽으로 몸을 틀자 숨결이 내게 닿을 정도로 가깝다. 같이 눕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떨리는데 다른 부부들은 어떻게 한 침대를 같이 쓰는걸까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속눈썹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자 조금 크게 떨리는 눈커풀에 괜히 만져서 깨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을 먹었지만 곧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녀. 아까까지만 해도 손 '씩이나' 잡고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손 '밖에' 못잡고 자는 현실이 안타깝기만하다.
○○씨의 볼을 매만지던 나는 멍하게 있다가 작게 벌린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커지는 마음에 마른침을 삼키던 나는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했다. 얕은 술냄새가 우리 사이를 메웠지만 나를 막지는 못했다.
손만 잡고 자자고 했는데.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용히 고개를 틀어 촉, 하고 입술을 맞추었다.
미안해요. 약속 못지켰네요.
그리고 저 오늘 밤 잠은 다잤어요.
*
밝은 햇살도 아니고, 짹짹 우는 새소리도 아닌, 띠띠띠띠띠- 본래 카페 출근시간데 맞춰 머리를 울리는 알람소리가 내 꿀잠을 깨웠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뚝하고 끊기는 알람에 일으켰던 머리에 힘을 빼는데 촉감이 이상하다. 부드러운 베개도 아닌 것이 따뜻한게.. 황급히 눈을 떠보자 내 눈 앞을 가로막는 무언가. 이 익숙한 향기는.
도경수 씨다.
그렇다 내 머리를 소중히 감싸고 있는 건 다름아닌 도경수 씨의 팔. 나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팔베개를 하고 잠을 청한 것이었다. 이와중에 나를 죽부인 안듯이 꼭 안은 도경수 씨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있다.
" 일어났어요?... "
내 꿈틀거림에 깬건지 도경수 씨는 한쪽 눈을 겨우 떠가며 입을 열었다.
" 대박, 저 이러고 잔거에요? 도경수 씨 팔 안저려요? "
잠 때문에 살짝 갈라진 그의 목소리는 내 청각을 자극했다. 괜히 사람들이 갈라진 목소리가 섹시하다고 하는게 아니었어..!
내 말에 한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던 도경수 씨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 안저린데, 그러면 이러고 조금 더 있을까요? "
..!!
나야 거부 할 이유가 없다. 조용히 쓱쓱 몸을 당겨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뿐.
일어났을 때보다 더 강하게 안아주는 도경수 씨와 함께 그의 진한 향기가 코 끝에 맴돈다. 탁 트인 시원한 향기는 아니지만 선선하고 계속 생각나는 향기라고 해야하나.난생 처음 맞아보는 남자친구와의 아침에 기분이 좋다. 이런 날은 평생 안올줄 알았는데.
도경수 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있으니 콩하고 내 머리에 턱을 찧는 그
" 머리 안아파요? 어제 많이 마시던데 "
" 괜찮아요 "
이러고 있으니까 다 힐링되는 것 같네
" 저 잠 하나도 못잤어요 "
" 왜요? "
" ○○씨때문에 "
" 그럼 앞으로 도경수 씨랑 나랑 같이 자면 안되겠다 "
" ... 잠정도는 못자도 괜찮을거 같아요 "
내 한마디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도경수 씨의 태도에 실없이 웃으니 그도 날 따라 웃는다.
" 좋다.. "
" 뭐가 그렇게 좋아요 "
" 그냥,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도 좋고, 일어나자마자 ○○씨 얼굴 보는 것도 좋고 다 좋아요 "
나도 좋아요.
도경수 씨와 떨어질줄 모른채 몇십분을 서로 부둥켜안고만 누워있는데 방 밖이 갑자기 시끄럽다. 어제 선크림때문에 곤혹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생각없이 설마 또 매너없이 문을 열려나 싶어 가만히 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또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 일어나!!!!!!!!!!! "
아 또 오세훈 저 새키, 어? 저거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야. 진짜 저 괘씸한 놈
여기서 깜짝 놀라며 일어나 오세훈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기보다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자는척을 하자 터덜터덜 침대 가까이 다가온 놈에게 쉬잇, 하며 내 상황극에 맞장구를 쳐주는 도경수 씨
" 뭐야 뭐야, 대박이네, 얘 아직도 안일어났어요? "
" 네, 아직도 자고있어요. 조금있다가 일어나면 같이 나갈게요 "
사근사근 내가 정말 자고있는 것처럼 작게 말을 하는 도경수 씨에 속아넘어간 오세훈은 아쉽다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제 같이 사온 컨디션이에요. 경수형도 줄까요? "
" 아뇨. 가봐요 "
" 늬엥 "
귀를 세우고 오세훈이 방에서 나가는 문소리까지 들은 후에 슬며시 눈을 뜨자 도경수 씨가 읏챠하며 힘을 주어 날 꼭 안은 채로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세훈이 준 컨디션을 직접 따서 내미는 그
" 하여튼 오세훈 매너 더럽게도 없어요 "
" 그래도 어떻게 이번에는 잘 넘어갔네요 "
" 그러게요 "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마냥 도경수 씨와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 담았다.
+
지난 밤 무슨 일 없었어?
도경수 씨와 나란히 거실로 나가자 거실에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던 세 남자의 시선이 따갑다.
" 좋은 아침이에요 "
하하 억지로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내는데 특히나 김종인 씨의 시선이 따갑다.
" 무슨 일 없었어? "
" 네? 뭐가요? 지진이라도 일어났나요? "
능청스럽게 질문을 받아쳐주자 바닥에 있던 땅콩을 줍던 김종인 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어제 뭘했길래 바닥이 땅콩 천지야..
" ...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
" 뭐 어디 아틀란티스 대륙이 솟아났나요? 저는 평화롭게 잤는데요 "
"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세훈아!! "
" 야!! 구라치지마!! 내가 들어가서 둘이 꼭 안고있는거 봤구만!! "
저 c... 입이 헬륨 풍선이야. 있는 힘껏 오세훈을 째려봐주고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뒤에서 조용히 도경수 씨에게 말을 거는 김종인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작게 말해도 이상한건 다 들리기 마련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 도경수 씨 "
" 네 "
" 혹시 고자야? "
아니거든요
+
땅콩 왕자 오세훈
씻고 나오니 김종인 씨가 오두방정을 떨며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고 나를 불렀다. 대체 얼마나 재미난거길래 이렇게 못보여줘서 난리인걸까
볼륨 크기를 최대로 올려놓고 한 동영상을 틀기시작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오세훈. 화면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알콜 냄새가.. 아주그냥.. 어젯밤 술마실 때 찍은 동영상인가보다.
“ 그래 세훈아, 슈퍼스타보다 왕자가 더 높은거야 ”
웃음기가 가득한 김종인 씨의 목소리가 들리고 영상 속 거실 한중간에 서서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하는 오세훈은 이내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 허얼! 그럼 저 왕자할래요!! 땅콩 왕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뭐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땅콩 왕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푸핰 웃음을 터뜨리며 옆에서 나는 모른다는 표정을 하는 오세훈을 보았다.
“ 큽ㅋ..ㅡ 그...그래 세훈이 땅콩 왕자해 ”
그리고는 땅콩 봉지를 집어들어 꽃가루 뿌리듯이 허공에 땅콩을 집어던진다. 여전히 세상을 가진것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 이제 저를 슈퍼스타 말고 땅콩 왕자로 불러주세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땅콩왕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세훈을 뺀 나를 포함한 4인은 땅콩 왕자에 자지러지고 말았다.
박찬열은 눈물까지 흘리며 땅콩왕자ㅠㅠㅠㅠ하며 웃었고 어제 땅콩 왕자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한 김종인 씨와 도경수 씨는 조금 절제된 웃음으로 큭큭거렸다.
“ 땅콩 만세!! ”
바닥 여기저기에 널린 땅콩들 위로 누운 오세훈은 양 팔을 파닥거리며 땅콩 만세! 를 외쳤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김종인 씨의 웃음소리를 끝으로 영상이 끝을 맺었다. 지금 김종인 씨가 치우던 땅콩이 모두 우리 땅콩 왕자의 작품이었던 것이었다.
" ㅇ.. 이것 거짓말이야!! 조작이죠!!!! 형 조작은 아주 나쁜 짓ㅇ "
" 내가 조작할 능력이 어딨다고, 부정하지마 땅콩 왕자 세훈아 "
" 땅콩 왕자라고 부르지마요!! "
" 왜. 이제 저를 슈퍼스타 말고 땅콩 왕자로 불러주세요!!! 라고 했잖아 "
어제는 대게가 있었다면 오늘은 땅콩 왕자 대란이다. 잽싸게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오세훈의 이름을 땅콩 왕자로 바꾸는 김종인 씨를 따라 모두 오세훈을 땅콩 왕자로 바꾸기 시작했다.
" 아아ㅏㅏ아ㅏㅏ!!! 하지 마!!!!!!!!!!! "
이제 오세훈의 카톡 상태메세지만 땅콩왕자 오세훈이라고 바꾸면 될 것 같다.
+
그런 거 아닌데요!!!
회는 무슨 맛으로 먹냐, 하는 김종인 씨의 100분 토론과 바다까지 열심히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차를 타는데 때마침 앞쪽 거치대에 놓여진 도경수 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운전 중 받기 좋게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놓여진 핸드폰 액정에는 엄마 딱 이 두글자가 떴다.
우리 엄마는 정작 집 나올 때는 그렇게 걱정하다가 막상 나오니까 연락 한 통도 없는 건.. 아니야 원래 딸이 먼저 연락해야하는거지.. 근데 그래도..
모두 다 입을 꾹 다물고 도경수 씨가 전화 받기만을 기다리자 머쓱하게 거치대에서 핸드폰을 빼 받는 그
" 이제 출발하려고 "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매다가 나를 힐끔 보던 도경수 씨는 어깨로 핸드폰을 받쳐받으며 내 쪽으로 몸을 쑥 뺐다.
" 단둘이는 무슨, 다 있지, 김종인 씨도 있고 "
전화를 받으면서도 내 안전벨트를 매주기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도경수 씨에 그저 히히 웃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목을 세게 꼬집었다.
" 아!! "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아! 하며 큰 신음을 내자 철컥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주던 도경수 씨가 얼빠진 표정을 했다. 전화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던 어머님의 목소리도 끊겼다.
" .... ㅇ.. 여보세요? "
" ... "
" 아니 김종인 씨도 있고 찬열군도 있고 세훈군도 있고, ○○씨만 여자라ㄴ "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끊겨버린 전화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도경수 씨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얼얼한 목을 만지며 눈을 크게 뜨자 뒤에 나란히 앉아있던 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 미안, 나는 목에 뭐가 묻었길래 떼주려다가 그만 "
" 타이밍이 거시기해서 그렇지 세훈이가 뭐 떼주려다가 그런건 사실이야 "
이럴 때마다 특히 쿵짝이 잘맞는 전봇대 브라더스
진짜 죽여버리고싶다.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기류를 감추지못하는 도경수 씨가 방황하는 눈동자로 말했다.
" 서울 가서 잘 설명하면 될 거에요 "
나는 안됐거든요!!
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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