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펀한 흙탕에서 노는 어린애
[exo/김준면] 천사의 탈을 쓴 악마 02 |
"아악!"
뜨거운 죽이 손등을 타고 진득하게 흘러 내린다. 그런 내 앞에서 작은 한숨쉬는 소리가 나고, 가볍게 내 손은 들려 올라가 죽을 손수건으로 닦아낸다. 잔뜩 힘주고 노려보는 내 시선에 닿은 건 쟁반에 거꾸로 엎어져 있는 죽 그릇 이었다.
"왜 먹지 않는 거예요."
손수건이 지나간 자리에 긴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다. 화다닥 거리는 쓰린 아픔과 이상한 느낌에 죽을 노려보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벌리려다 다시 꾹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다시 가져올게요."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너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내 머리위로 그림자가 덮어온다. 숨이 막힌다. 그림자가 내 목을 틀어쥔 것 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네 그림자라도 안 비쳤으면 좋겠다. 네 작은 흔적 하나라도 보이면 난, 왜이렇게, 숨을 쉴 수가 없는건지. 나는 더이상, 네 발걸음에도 수줍어하던 어린애가 아닌데. 나는 널 마음에 품고 좋아했던 시간을 후회해. 네가 오는 시간은 항상 정해져 있는데도, 난 언제올지 몰라 문 앞에서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널 기다렸다. 내게 만약 꼬리가 있더라면, 널 밀쳐내도 난 꼬리를 흔들고 있을거야.
"이번에도 먹지 않는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쟁반을 들어올리는 널 쳐다보았다. 흩날이는 꽃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 처럼, 네 냄새가 짙게 내려온다.
"팔도 부러뜨릴 거예요."
발버둥도 치지 못하게.
"식음전폐하고 죽을 생각은 아니죠?"
난 이미 배가 부르다. 네 숨을 먹고, 네 향이 베어있는 과즙을 코로 여러번 베어물었다. 많이 먹으면 질릴법도 한데. 넌 왜 아직도 입에 머금으면 코로 스며드는 단물에 감동해 버리는 건지. 나는 네 향에 질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향에 내 온몸이 흠뿍 젖어 너와 똑같아지고 싶었다. 작게 웃는 네 웃음에 내 입꼬리가 같이 올라갔다.
"난 여길 나갈거야." "다 나아서." "꼭 나갈거야."
너는 날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문을 닫았다. 부드럽게 닫힌 문 소리가 나자, 소릴 질렀다. 내 팔을 부러뜨려? 내 팔을?
"그 웃음은 뭔데!! 내가 못나갈거 같아! 내가! 내가!!"
네가 내 팔을! 두 손으로 팔을 긁어 내렸다. 링거가 뽑아지고, 뱃속이 뒤틀린다. 차라리, 예전처럼 희망을 주던 말을 해. 토기가 밀려온다. 다른 건 없었다. 네게 특별한 존재가 되려했던건 아니었다. 난 네 시선에 다 낫는것 같은 경이로움 마저 들었으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관리하는 환자 중에 하나라서 좋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틀어진 거지? 현기증에 풀썩 몸이 뒤로 넘어간다. 뚝뚝, 팔둑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숨이 막힌다. 아, 숨이 막힌다. 지겨운 눈물이 났다. 항생제 냄새가 났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무의미한 노이즈를 흘려보내는 티비를 쳐다봤다. 교육적인 영상과, 긍정적인 기류를 담고있는 드라마였다.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우리 부모님도 신경 안써주는 부분을, 넌 아침일찍 양손 가득 들고와 틀어놓고 갔다. 어제 저녁 링거를 마음대로 뺀 상태를 간호사가 기절할 듯이 반응하면서 널 불러내었고, 넌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여느때와 똑같이 표정이 없이 날 쳐다볼 널 생각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항생제를 맞는 팔둑은 지혈이 되지 않았고,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넌 얼굴을 새하얗게 일그러 뜨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선명하게 보이는 너의 표정에 나는 그만, 생각하는 것마저 멈추고 말았다.
[우주에 비하면, 저희는 먼지보다도 더 작은 존재겠죠? 작은 것 하나에 신경쓰지 마세요. 그 일 하나조차도 우주에선 너무나도 작은 일이니까요.]
"죽기라도 하려고 했어요?"
내 어깰 잡고 흔들던 너는 잔뜩 화나 보였다. 피는 자꾸만 빠져나가고, 간호사는 널 말렸다. 멀어지는 정신속에서 너의 표정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만큼, 처음보는 표정은 없었으니까. 내가 죽을리가. 그저, 네 속을 뒤집어 놓기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자살하려는 줄 알았던 걸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너는 몇번이고 링거를 꼽아놓은 부분에 고정 테이프를 몇번이고 휘감았다. 피식, 그런 너를 쳐다보며 나왔던 내 코웃음에 날 꽉 끌어안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힐듯 꽉 끌어안은 압력에 눈을 꾹 감았다. 당장에라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게 꼬리가 있더라면 널 밀어내고도, 꼬리를 흔들겠지. 내 코 부근을 확인하던 네 손이 한동안 눈 앞에서 감돌았다. 두 눈이 멀쩡히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내 숨이 끊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행동을 다시 눈을 감기 전까지 계속했다.
"난 안죽어요."
잠결에 나는 그렇게 얘기 했고,
"다리 부러뜨린거 미안해요. 그것 때문에 화나서 그런거라면 내가 미안해요."
멍투성이인 내 팔에 입을 맞추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예요. 네가 있는 공간에서 너에 대한 첫 소개는 그랬다. 더이상 학교를 나가지 못한 아이는 학교 대신에 병원으로 들어왔고, 넌 내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으레, 사춘기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나는 익숙하게 환자 차트 이름을 적어갔고, 나는 네게 인사했다. 힐끔, 날 곁눈질로 살핀 너는 관심없다는 듯이 다시금 창가를 보며 제 링거를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학교에서 어쩌다가 쓰러졌니?"
최대한 부드럽게 널 대했다. 넌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에 부모님이 사정을 얘기했다. 평소대로 수업 중에 잠을 자다가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히 말하는 부모님의 말에, 나는 그냥 널 쳐다봤다. 그러자 너는 꼭 울것 처럼 입술을 꾹 물고 창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잔뜩 빨개진 채로.
"많이 힘들었겠네요. 다행이예요, 늦지 않게 와서."
그 날, 너는 날 한참동안 올려다 봤다. 작게 웃어주는 내 미소가 민망할 정도로 날 올려다 본 너는 내 웃음기가 지워질 때 쯤, 날 보고 웃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나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죽을만큼 그 순간을 증오해." "왜 예요?" "날 숨막히게 하니까요. 내가 숨을 못쉬는게 사실은 당신이 목을 졸라서 여기로 데려 온게 아닐까 생각도 해요. 너는 여길 벗어나지 못하니까, 내가 여기로 오게끔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내가 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악마니까. 악마는 정해진 곳만 갈 수 있어. 그러니까 날 여기로 데려온거야. 그러니까, 내가 다른 곳으로 가려 하니까 이렇게 만든거 아니야? 내가 이 곳을 벗어나게 되면 너는 꼼짝없이 그걸 지켜봐야 하니까. 너는 내가 죽을 때까지 숨을 못쉬게 할 거잖아."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야. 넌 원래 여기에 왔어야 할 사람이니까 온거야. 몸에서 아플대가 더이상 없으니, 이젠…, 정신까지 아플 생각이야?"
헉, 숨이 막힌다. 번쩍 떠진 눈 사이가 뿌옇다. 여전히 시끄러운 노이즈가 울리고, 나는 리모콘을 잡아 눌렀다.
"아니야, 아니야."
소리가 더 커진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내게 설교를 한다. 죽지 말라고, 가르치려 한다. 나는 죽을 생각이 없는데. 관자놀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난 정상이야. 리모콘 버튼을 계속 누르다 바닥으로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같이 휘둘리는 팔에 온기가 닿는다. 아.
"일어 났어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몸 좀 아껴요. 하마터면 링거가 또 빠질뻔 했어요."
내 팔을 부드럽게 쥐는 네 손가락 마디마디가 느껴진다. 티비 빛에 반사되는 네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웃으면서, 작게 휘어지는 것도.
"잠을 설쳤어요?" "약 먹을래요?"
내 입에 작을 알약에 들어가고, 네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뜨겁게 쓸고 내려간다. 아.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온 몸이 떨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