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반존대를 써요 시즌2 w. 채셔
07. 여우 꼬리가 살랑이면 2
"………네?"
"데뷔조 리더 레나입니다. 한 번씩 인사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지민의 첫사랑이라던 여자는 홍보팀 모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싱긋 웃었다. 시원하게 음료수 드시고 힘내시라고 음료수 좀 사왔어요. 여자는 사원들에게 음료수와 먹을거리들을 나눠주었다. …착하기까지 하니까, 더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여자의 등장에 괜히 나 혼자 찔린 건가 싶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다시 노트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시 타자에 손을 올린 순간, 여자가 내게 음료수를 쥐어주며 속삭였다. 언니가 지민이 오빠 여자 친구?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는 아주 침착한 표정으로 사원증을 가리켰다.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지르자,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네, 네."
무슨 얘기인 줄 아시나 봐요? 여자의 물음에 다시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는 어깨를 두어 번 주물러주었다. 이내 내게 음료수를 쥐어주며 '수고하세요.'하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나는 살짝 몸을 떨며 맨팔을 두 손으로 연거푸 쓸었다.
"여주, 회식 참여할 거지?"
"아, 네. 네."
여자가 건넨 음료수를 집중해 바라보다 옆자리 언니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곤 음료수를 책상에 놓았다. 빠르게 지민에게 회식에 참여하느냐 묻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중해야지. 오늘은 회사 전체가 참여하는 규모 큰 회식이니 야근은 없겠지만, 오늘 일을 끝내놓지 않으면 백 퍼센트 내일 야근이다. 몇 번 고개를 흔들곤 노트북 타자에 다시 손을 올렸다.
"자, 짠!"
지민이 얼마 전 크게 삐친 적이 있기에 되도록이면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헛개수는 기본으로 챙겨왔고, 술을 마시기 전 컨디션도 마셨고. 또 되도록이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주는 언니의 옆에 꼭 붙어 앉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2차로 옮겨 술을 마시는 중에 누군가가 합류했다. 윤기 선배와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엔지니어였다. 지민은 남준과 작업을 해야 해서 오지 못한다더니. 괜히 씁쓸해졌다. 엔지니어가 발을 들이고, 몇 분 되지 않아 …여자가 도착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이내 소주 잔에 소주를 채워 원샷을 하고는 쓴 알코올의 맛에 사이다를 다시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야."
"…네, 네. 선배."
"이거, 박지민이 전해주래."
"…아아."
"너 감시하랜다, 박지민이."
비어 있던 앞 자리에 윤기 선배가 앉아 컨디션을 건네주었다. 많이 마시지 말란다, 걱정된다고. …네. 지민이 챙겨줬다던 컨디션을 받아들고, 핸드백에 넣었다. 기분이 좋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는지 윤기 선배는 '왜.'하고 물었다.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지만 여자의 등장으로 시끄러운 틈에 우리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남자 사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에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자 윤기 선배는 이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박지민 첫사랑이라매."
"…네?"
네가 그 때 물어보길래 나도 물어봤어. 윤기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소주 잔에 담긴 소주를 원샷으로 넘겨버렸다. 빠르게 두 잔을 한꺼번에 넘기자 약간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이다. 지민이 챙겨줬다던 컨디션을 꺼내어 한 번에 따곤 컨디션도 원샷으로 꿀꺽꿀꺽 삼켰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라고 윤기 선배가 말하는 순간 여자가 우리 쪽으로 발길을 돌려 윤기 선배의 옆 자리에 앉았다. 윤기 선배가 '너 왜 여기 앉아.' 하고 무심하게 묻자, 여자는 '아, 홍보팀 분들한테 아까 인사 드렸거든요. 같이 술도 마시고 싶어서….' 하고 애교 있는 목소리로 사원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말해왔다. 물론 그 시선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가 내게 시선을 꽂는 순간, 왜인지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홍보 팀장님, 여기는 김민석 사원님, 여기는 이순규 사원님, 여기는………."
"……………."
"…김여주 사원님, 지민이 오빠 여자 친구."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한 명씩 짚으며 제가 외운 이름을 대다, 마지막에 여자가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특별히 지민이 오빠 여자 친구라는 부연 설명까지. 나는 작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고, 사원들은 뜻밖의 부연 설명에 의문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윤기 선배가 테이블에 팔을 놓고 제 얼굴을 기댔다. 뭐, 다 아는 거 아닙니까. 얘 박지민 여자 친군 거. 윤기 선배가 능글스럽게 말하자 몇 명이 웃음을 흘렸다. 꽤 많이, 불편해졌다. 이 자리가.
"근데 아는 사이야?"
"네?"
"오빠라니?"
아무래도 인터뷰어들도 많다보니, 상대방의 말 실수도 쉽게 잡아채는 능력들이 아주 대단하다. 한 여사원이 묻자, 여자는 민망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이 상황이 급작스럽게 답답해져서, 다시 소주를 원샷했다. 술이 식도를 타고 위로 들어간다. 속이, 타는 기분이다. 여자는 부끄럽게 웃다 '제가 지민이 오빠 첫사랑이에요.'라고 다시 덧붙였다. 이내 우리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여자가 크게 호들갑을 떨며 내 손을 잡아왔다. 언니, 기분 나쁘셨으면 미안해요. 그냥 여쭤보시길래 사실대로 대답해드린다는 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가 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이내 눈치없기로 소문이 난 남사원 하나가 내게 '에이, 여주 씨, 그런 거 쿨한 사람 아니었어?'하고 능글맞게 물어왔다. 애써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끌어 올리고 웃어주자, 여자가 나를 따라 다시 웃는다. 다시 시선이 여자에게로 모이자, 나는 재빨리 소주 한 잔을 들이마셨다.
"야, 그만 마셔."
상황을 지켜보던 윤기 선배가 내 잔을 뺏었다. 윤기 선배도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옆에서 소란스럽게 '첫사랑 얘기 좀 들려줘 봐.'와 같은 얘기가 들리자마자 나는 윤기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지민이 너 술 마시면 필름 끊긴다더라. 마시지 마. 윤기 선배가 달래는데도,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마음이 와장창 무너지는 게 보였는지, 윤기 선배는 '하….'하고 소주잔을 다시 손에 쥐어주었다. 끊어 마셔. 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네, 노력할게요.'하고 소주 잔에 소주를 붓곤 반 만큼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윤기 선배의 눈에 걱정이 가득하다.
"뭐, 그래서 사귀게 됐었죠."
"와, 진짜 음악하는 고딩 커플이었네. 완전 영화에 나올 스토리 아냐?"
…기분이 더 엿같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마치 지민이 제 남자친구라도 된 양 러브 스토리를 일러주고 있고, 사원들은 둘이 커플이라도 된 듯 말하고 있으니. 진짜 여자친구인 내가 더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개중에 제일 비참했던 이야기는. 둘이 얼짱 커플이었겠네, 레나도 예쁘고 지민 씨도 한 미모 하지 않아? 라는 말. 괜히 여자의 빛나는 외모에 내가 한껏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소주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비워버리자, 여자가 다시 손을 잡아왔다. 이제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 언니. 미안해요. 지민이 오빠 이제 제 남자도 아닌데."
"에이, 재밌기만 한걸. 여주 기분 나쁘냐?"
"…………아니요, 괜찮아요."
다시 억지로 웃어보이자, 윤기 선배가 한숨을 쉬며 굳은 얼굴로 여자에게 일침을 가했다. 넌 꼭 말해놓고 미안하다 그러냐. 윤기 선배의 말에 민망하게 웃던 여자는 이내 사원들의 성화에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윤기 선배가 작게 입 모양으로 '나갈래?'라고 물었다. 이내 나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훌훌 털고 나가야 한다. 지민과 더 이상 여자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얘기를 하면서 당사자인 지민에게 위로받기는 더더욱 싫었다. 여자의 얘기는 이제 막… 헤어지고 이후의 얘기로 흐르고 있었다. 웃긴 것은 제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은 귀신 같이 빼놓고 말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춘기 때문에 헤어졌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자, 이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보다 우스웠다. 다시 소주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입 속에 털어넣었다.
"지민이 오빠가 많이… 보고 싶어 했었죠."
"…………."
"편지도 정말 많이 보내고, 집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고."
이미 주량은 넘겨버린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엿 같은 얘기를 계속 듣다가는 소주 병이라도 던지고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날 것 같아서. 여기는 회사고, 내 사회 생활이 달려 있으며, 내 인생이 걸려 있는 자리니까. 이 자리에 지민이 있었다면 여자가 과연 이렇게 당당하게 제 얘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나 제 추억이 아련해져서 여자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을까.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다 소주를 다시 털어넣었다. 윤기 선배의 눈이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다. 잔뜩 취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안심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다시 소주를 입 속으로 부어넣고, 몇 번을 반복했다. 제발, 제발 취해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되길.
"그 정도로 많이 좋아했으면, 서로 엄청 특별했겠네."
"………."
"근데 회사에서 이렇게 딱 만난 거고? 운명 아냐?"
운명이라는 말에 집고 있던 과자를 놓쳐버렸다. 몸이 이미 흐물거리곤 시야도 흐릿한데 오직 운명이라는 말이 귓속으로 강하게 박혀들었다. 눈물이 고이는 순간, 여기서 울면 지는 거라는 생각에 다시 억지로 술을 입속으로 들이밀었다.
"듣다 보니 심하네. 너 그만 쫑알거려."
"……피디님?"
"예의부터 갖추고 여기 따라온다 만다 해."
"………."
"지금 박지민 얘랑 잘 사귀고 있는데, 그딴 첫사랑 얘기 하는 거 안 구질구질하냐. 너."
윤기 선배의 말에 여자가 눈을 크게 떴고, 이내 테이블 전체가 조용해졌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야, 야, 민윤기 그만해. 사원들이 윤기 선배를 말리기 시작했고, 여사원들이 티슈를 꺼내 여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다시 귀에 '여주 너 이런 거 이해 못하는 거 아니잖아, 응?'하고 말이 직접적으로 들려온다. 이해를 강요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줬다. 결국 여자를 울려버린 예민한 현 여친이 되기는 싫었다. 괜찮아요, 제가 잘못한 거잖아요, 하고 울먹이는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은 아냐. 비틀거리자 팀장님이 '들어가게?'하고 물었다. 네, 하고 다시 비틀거리자 팀장님이 얼른 잡아주었다. 들어가. 술에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팀장님은 바로 들어가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발을 천천히 옮겼다. 택시까지만 정신 차리자, 라고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었다. 이내 탁, 하고 내 팔을 잡아주는 윤기 선배가 있었다.
"야, 집까지 데려다줄게."
"…택시까지만 데려다주세요."
"………그래도 박지…."
"선배."
"………."
"저 쪽팔려요."
끝내 울먹이자 선배는 입을 꾹 닫았다. 천천히 내 팔을 잡고 택시 정류장까지 같이 걸은 선배는 멀리서 달려오는 택시 하나를 잡아 나를 태웠다. 윤기 선배는 기사 아저씨에게 내 집을 대신 말해주었고, 이내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속이 쓰리다, 많이. 휴대폰으로 통화 목록을 뒤지자 제일 먼저 뜨는 '망개♥'라는 애칭에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내 윤기 선배가 택시 번호를 외워뒀다는 카톡을 보내주었고, 동시에 지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자기."
"…………네에."
"자기?"
"………으응."
"자기 술 취했어요?"
"……………아니요."
"취했잖아."
급작스레 지민의 목소리가 굳었다. 첫사랑 때문에 술을 잔뜩 마셨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술 마시면 각방이라고 했잖아요. 지민의 굳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덧붙임
암호닉 확인해주세요.
마감 이후에 올려주신 암호닉은 포함시키지 못했습니다.
9화 쯤에 암호닉 물갈이 예정이구요,
10화나 11화 쯤에 마지막으로 암호닉 받으니까 그 때 꼭 신청해주세요.
오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삐들.
항상 고맙습니다.
1 + 2 =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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