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기(退行期) : B
w. 다원
여보. 나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무서운 꿈을 꿨어요.
처음엔 당신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그런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보며 사랑한다. 속삭이는, 그런 행복한 꿈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저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에 더이상 사랑이 비치지 않는, 그런 무서운 꿈이었어요.
처음엔 저를 향해 붉은 눈을 빛내며 저를 죽이려 했던 이상자들이, 더 이상은 저를 해하려 하지 않고,
어쩌면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했던 제가, 당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드는 꿈이요.
여보. 근데, 나 너무 무서워요. 이 꿈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다시 눈을 감았다 떠도, 아무리 당신의 이름을 울부짖어봐도, 당신이 돌아오질 않아요.
아무리 그들의 마른 팔을 붙잡고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 울음을 터뜨려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나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외쳐봐도,
나는 이미 사람들에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일 뿐이에요. 내가 그들을 바라봤던 것처럼.
여보. 제발 이 무서운 꿈에서 저를 깨워주세요. 저는 이 꿈이 정말 미칠 듯 두려워요.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당신이 없는 아침을 맞을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보. 제발. 선희야.
제발, 제발 그만 일어나서 나 좀 깨워줘.
- 102,988번 째 희생자의 편지 中
2019. 06. 27
7 : 42 pm
"야, 전정국. 그만하고 가자. 어?"
맑던 하늘이 어둑하게 내려 앉은 지 한참이 지났다.
연습이 끝났으면 조금 놀 법도 한데, 정국은 그럴 마음이 없는 건지 여전히 탕- 일정한 총소리만 뱉어냈다.
들뜬 얼굴로 미숙한 치장을 마친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의자에 기대 끊임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이제는 지친 건지, 쓰러질 듯 위태롭게 기대있던 태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무릎에 놓여있던 정국의 교복 마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교복을 입은 건지 사복을 입은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언발란스하게 차려입은 태형의 외형을 보고,
그의 후배들은 그를 아- 좀 노는 형. 이라고 칭했으며, 주변 어른들은 그를 막되먹은 놈. 이라고 칭했다.
물론, 태형 자신은 전혀 수긍하지 않는 말들일 뿐이지만.
야, 나 지금 5시간 넘게 기다린 거 알지. 집에 좀 가자, 어?
태형은 무뚝뚝한 정국을 향해 톡- 쏘아붙이려다가 그저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아무리 매달려봤자, 정국은 자신의 연습량을 채우기 전까지는 절대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국가대표, 그게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인건지. 어차피 연습을 하든 안 하든 금메달은 정국 자신이 가져올 것이 뻔한데.
태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정국을 바라봤다.
잦은 염색으로 부슬부슬해져 버린 자신의 머리완 달리, 정갈한 검은 생머리.
볼품없이 마르고 구릿빛 피부의 자신관 달리, 보기 좋은 근육이 자리 잡은 맑은 흰 피부.
처음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자신과 달리, 축 처진 순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
태형과 정국은 형제였다. 같은 성이 아닌 걸로 보아, 같은 핏줄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태형은 정국을 부러워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갖지 못했던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 어떤 행동을 하던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
좋아하고 또한 잘하는 꿈을 가진 존재. 그리고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망설임 없이 이뤄낼 수 있는 존재.
그렇다고 태형이 정국을 싫어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모자랄 것 없이 자란 정국이 자신의 앞에서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탕, 탕-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소리의 끝, 정국의 손을 떠난 총알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고,
그 일정한 소리에 질린 태형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던 그 시점.
지금까지 들려오던 총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쿵- 하는 소리가 그들을 휘감았다.
바닥이 꺼질 정도로 크게 울린 진동과 광음에 놀란 태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국을 바라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과녁판에서 눈을 떼지 않던 정국이 창문 밖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이 태형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야, 전정국. 방금, 그거...뭐야?"
"지진인가?"
"아님, 사고?"
밖에 뭐 있어? 겉보기와 달리 겁이 많은 태형이 한 발짝 씩 무거운 발걸음을 떼 정국에게 다가갔다.
야, 전정구욱- 태형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대답 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정국이, 태형의 손이 정국의 손을 꽉 붙들자마자
순식간에 태형의 팔목을 끌어 자신의 뒤로 숨겼고, 망설임 없이 총구를 창밖 어딘가로 들이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게 키워져야만 했던 정국의 촉이,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성의 모습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야, 무섭게 왜 그러는데..."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인 태형이 정국의 등 뒤를 빠져나와 창밖을 바라보려 했고,
그런 태형의 마른 몸을 손쉽게 제압한 정국이 태형의 두 눈을 한 손으로 가려버렸다.
깊게 팬 볼에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 걷는 걸음세. 정국의 기억 속 어두운 부분을 끌어내는 남성의 모습에,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정국이 힘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방아쇠를 잡아당겼고,
탕- 탕-
울리는 총성에 움찔움찔 떨리는 태형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그렇게 남성의 온몸이 피로 물들어 징그러운 형체를 띌 때까지,
정국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정국아, 내가 지켜줄게.'
'형, 믿지?'
정국이 아주 어렸던 어느 시점. 자신의 손을 꽉 붙든 채 눈을 마주하는 태형의 모습에, 오직 그만을 위해 살아가겠다 마음을 먹은 그때.
정국의 키가 태형보다 더 작았던 그때. 그때 했던 다짐들을 목 언저리까지 곱씹고 또 곱씹으며,
지독했던 과거에 나타났던 태형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정국이 태형의 떨리는 손을 꽉 붙잡았다.
내가 꼭, 지켜줄게.
태형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을,
그제야 입 밖으로 내뱉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