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6. 28
2 : 20 pm
"아, 씨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은 윤기의 발끝으로 아직 반도 채 피우지 못한 담배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윤기의 성격 탓인지 매번 깔끔하게 다려져 있던 가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저 멀리 던져진 지 오래였고,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하얀 셔츠 밖으로 드러난 윤기의 흰 피부조차 진득하게 엉겨붙은 핏자국으로 만연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려던 윤기가 자신의 손에 잔뜩 묻은 피를 발견하곤,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소엔 한산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던 병원이 피로 물들어버린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꽤나 큰 병원 덕에 많은 수를 자랑했던 의사들이 사라져버린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고.
대충 눈대중으로 세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하게 줄어버린 의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꽉 깨물자,
저 멀리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도 환자의 생명 어쩌구, 가족들의 심정이 어쩌구, 착한 척은 다 하며 오지랖 떨어대더니,
이렇게 거지 같은 상황에 닥쳐와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못했나 보다.
저렇게 발에 땀 나게 살아봤자, 병신 되는 건 자신 하나일 뿐일 텐데도.
"윤, 윤기씨! 여기 좀 도와, 주세요!!"
눈이 마주쳤나, 했더니 금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석진의 모습에 귀찮스레 뻐근한 목을 매만진 윤기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꺼내 든 담배를 입에 문 채, 불도 지피지 않고 질근질근 깨물었다.
타박 타박- 급박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가자, 피와 눈물로 얼룩진 그가 아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그에 괜한 연민 심이 들었다.
저 멍청한 눈으로 단 한 번만 주위를 둘러봤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이렇게, 미련한 얼굴로 남 걱정이나 하고 있는 의사는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아, 윤기씨. 일단, 여기 피. 지혈 좀...-"
"선배."
울먹이는 얼굴로 허둥지둥 상처 난 부위를 치료하던 석진의 얼굴이, 차분한 나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런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를 바라보자, 치료하던 손을 멈춘 그가 움찔 떨며 나를 바라봤다.
"손 떼요. 거기서."
무섭도록 시린 목소리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였지만, 끝까지 환자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는 모습에 헛웃음이 허- 하고 튀어나왔다.
아까부터 잘근잘근 씹었던 담배의 끝은 침이 잔뜩 묻어, 이제는 찝찝한 기분만을 안겨주고 있었고,
처참한 얼굴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 체념해 버린 의사들 사이에서, 홀로 외롭게 수많은 환자들을 살리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 또한,
이제는 나에게 불쾌한 기분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선배, 선배는 이게 참, 쉬운 일 같나 보다. 그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라도 더 살 수 있겠다 싶고,
발 빠르게 뛰어다니다 보면, 누구 하나 선배한테 감사하며 살 것 같고. 그래요?"
평소라면 남 일이다 하고 넘겨버렸을 일이, 그게 아니라면 그 빌어먹을 선배라는 이름 때문에라도 참았을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비수가 되어 그에게로 날아갔고, 날카로운 말에 완벽히 굳어버린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그 말들을 주워담을 마음도 없이 더욱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남의 생명보단 나의 생존을 위해 의사를 택한 나와, 자신의 생존보단 남의 생명을 위해 의사를 택한 그.
자신의 얼굴에 비릿하게 튀는 피들을 무시한 채, 항상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수술대에 올랐던 그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피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을 집어던지던 나.
"근데, 이게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환자, 신원정보 확인해봤어요?"
진정 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었기에, 이성적이기보단 감성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그에게,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그에게 따지고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 해봤을 리가 없지. 환자는 의식도 없고,
보호자는 살아있을지 죽었을지 알 수도 없는데."
"그 환자, 만약 그 환자가 에이즈라면 어쩔 거에요?"
"아니, 굳이 그 환자가 아니더라도,
선배가 지금까지 그 같잖은 노력 운운하며 쑤셔놓은 이 많은 환자 중에 에이즈 환자가 있다면요?"
결국 끝엔 그가 아니라, 내가 맞을 거라고 쐐기를 박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