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엿 같게 날씨 겁나 좋네.”
여주가 벤치에 등을 기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러는 건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누군가 커다란 붓으로 푸른색을 칠해 둔 것 같았다. 꿀꿀한 제 상황과 달리 좋아도 너무 좋은 날씨에 여주가 인상을 팍 썼다. 긴 벤치에 혼자 앉아 고갤 젖히고 발을 까닥이던 여주가 간호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봉사 해주시는 분이 오실 거예요.’
‘여주씨하고 동갑인 분이 있길래 여주씨한테 배정했는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이러면 내가 여기로 들어온 이유가 없잖아.”
정작 간호사는 듣지 못할 진짜 대답을 옥상공원에 토로한 여주가 깊은 숨을 뱉어냈다. 맑은 하늘을 보며 꿀꿀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친구에게서 온 문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제가 여행을 간걸로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역시 잘 가고 있냐는 말과 함께 재밌게 놀고 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문자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여주가 벤치에서 일어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은 조용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
조용함 속의 민폐가 되기 싫어 발꿈치를 들고 병실 앞에 서 문을 열자 아무도 없어야 할 공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실 한 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자가 여주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여주에게로 남자가 다가왔다.
"여주씨 맞으시죠? 저는 봉사하러 온 김석진이에요.”
“아! 기억났다. 잘 생긴 반장!”
“네?”
여주가 손뼉을 치며 소리치듯 말하자 석진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반장이라는 말에 석진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학창시절 반장은 딱 한번 해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 이후로 반장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깨닫고 반장 선거에는 출마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제게 반장이라니….
석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스쳐지나갔다. 곰곰이 그 누군가를 생각하던 석진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혹시 그- 자퇴한?”
“와- 기억하긴 하네. 자퇴한 애로 기억하는 게 좀 아쉽긴 하다만.”
여주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로 걸음을 옮기자 석진의 시선이 여주를 따라갔다. 흐트러진 이불을 한번 털고 침대 위로 올라가려는 여주의 뒤로 석진이 말했다.
“근데 네가 왜 여기에….”
놀람과 믿을 수 없다는 마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친구들이 제 병을 알게 되었을 때 저런 목소리를 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주는 예행연습 하는 겸 뒤돌아 석진을 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는 너는 여기에 왜 있어?”
“나? 나는 봉사하러….”
“무슨 봉사?”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을 돕는….”
석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석진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 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떠는 모습에 친구들에게 여행 간다고 거짓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석진은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여주는 그런 석진을 한번 보고 마른 입술을 물로 적시고 말했다.
“나는 네가 그 봉사하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거든.”
“….”
“원래 도우미 필요 없다고 하려 했는데 넌 괜찮겠다.”
“….”
“잘 부탁해. 반장아.”
여주가 석진에게 손을 내밀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저의 괜찮다는 웃음에도 아까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이는 석진에 크게 웃어버린 여주가 여태 내밀어진 제 손을 보란 듯 흔들었다.
“반장아- 잘 부탁한대도. 팔 아파, 얼른.”
그 말에 석진이 황급히 제 앞에서 팔랑거리는 여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어오는 여주에 석진도 조금은 긴장이 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기분에 잡은 손을 슬며시 놓은 여주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석진을 슬쩍 올려다보다 제 병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간이의자를 끌고 왔다. 석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여주가 간이의자를 제 손으로 툭툭 치며 앉으라고 얘기했다.
“내가 해도 괜찮은데.”
“오늘만 해주는 거야, 오늘만.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뒤 따라 나오는 여주의 말에도 석진이 제가 하겠다며 제가 있는 쪽으로 향하자 여주가 손을 저으며 기어코 제가 하겠다며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다. 계속해 제가 하겠다고 하면 끝이 날 것 같지 않을 입씨름에 고개를 끄덕인 석진이 제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간이의자에 앉았다. ##여주는 석진이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서야 꽤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침대위로 올라가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어색했던 기류가 사라지고 둘 사이에 어쩌면 고리타분할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바닥에 내려진 석진의 가방을 흘긋 본 여주가 묻자 석진이 골똘히 생각하다 긍정의 표시를 했다. 대학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다고 했다. 군대는 1학년 입학과 동시에 들어가, 복학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교수님들이 내는 과제에 아직도 적응하기가 어렵다며 우는 소리를 했고, 과제 탓에 3일 밤을 꼬박 샜다고도 했다. 얼마 전엔 중간고사를 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던 전공시험에 저를 비롯한 동기들 모두 물을 먹었다고도 이야기해왔다.
여주는 석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딱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랬냐며 답하는 저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여주고, 눈을 맞춰주며 이야기 해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공감은 되지 않더라도 석진의 말끝에 따라붙는 웃음소리에 따라 웃을 수 있었다.
제 친구들을 통해 간혹 듣곤 했던 대학생활은 애초에 꿈을 꿔본 적도 없어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그것도 아니었던지, 석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대학생활에 그렇지. 하고 공감할 수 없는 마음이 오늘따라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 말았다. 제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저도, 석진도 각자 대학교에. 아니, 어쩌면 같은 학교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었을지도.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같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울적한 적이 실로 오랜만이라, 여주는 그 기분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석진은 여전히 즐거운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여주는 그런 석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애랑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더라. 손으로 꼽기엔 이제 너무 멀어진 그 날, 그 때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웃는 너를 따라 웃고 나니, 기분이 괜찮아지는 것도 같기도 하고.
이런 여주와는 다르게 석진은 제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다 제 앞에 보이는 여주의 모습을 보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 하고선. 아픈 사람 앞에서 신이나 떠들어대고 있는 제 모습이 조금 우스웠고, 뒤늦게는 제가 조심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석진은 제 입을 닫았다. 신나게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입을 닫는 석진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 아, 그래서….”
아까완 다르게 뜸을 들이는 석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여주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모습을 보니 고등학생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비식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여주가 말했다.
“나 때문에 그래? 나 이런 이야기 듣는 거 좋아해.”
사실은, 너랑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좋아.
.
“아니, 그래도….”
석진은 여주의 괜찮다는 말을 여러 번 듣고서야 여주의 안색을 살피다 다시 제 이야기를 조금 더 꺼내 들었다. 석진이 조금이라도 웃긴 이야기를 하면 유쾌한 듯 웃어 보이는 여주 덕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다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각대마왕에 민폐쟁이 침벌레가 셋째홍일점님과 함께 쓴 석진이 글입니당'ㅁ'...
셋째홍일점님께 조용히 묻어가지만...1화는 제가 올리는 영광을 주셨어여...
이번주내에 올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슬아슬하게 오늘에 와서야 올립니당....끼잉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