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을 도대체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 즐길래야 즐길 수 없는 이 술자리의 끝은 보이지 않고 술잔과 짠 하는 그 마찰음만 더욱 많아지고 커졌을 뿐이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자 어느새 열두 시를 가리키는 바늘에 놀라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벌떡 일어나서는 생글생글 웃던 표정을 굳히고 아무 진동 없는 휴대폰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며 저, 부모님께서 걱정하셔서요. 먼저 일어날게요. 이 말을 툭 던지고 급히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변백현, 얘 좀 데리고 가라. 손가락으로 가리켜진 사람은 바로 미워할래야 할 수 없는 후배 오세훈이다.
"시발! 오세훈 왜 이렇게 무거워"
훨씬 큰 세훈을 업으려니 힘이 남아나질 않아 결국 질질 끌다시피 집으로 향했다.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질질 끌리는 세훈의 다리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엘리베이터가 바로 열렸고 앞으로 쓸 힘까지 다 쓰며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야 삑삑 소리나는 도어락처럼 표정도 풀렸다. 이 표정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문을 열자마자 뻗은 세훈을 봤을 때와 같이 굳었다. 그 이유는?
"변백현"
"..."
"왜 이제와"
"아, 그게.."
"걘 누구야"
복실한 하얀 꼬리와는 반대되게 무척이나 사나운 표정 그리고 옆집 말순이의 개껌을 뺏었을 때 들리는 으르렁 소리, 바로 내가 키우는 아니지 룸메이트 박찬열 때문이다. 일단 이 무거운 상태에서 혼나느니 가벼운 마음으로 혼나는 게 훨 나을 것 같아 웃으며 세훈이를 쇼파 위에 내동댕이를 치고 여전히 으르렁대는 찬열에게 다가가 팔을 꼬옥 껴안고 없는 꼬리라도 나올 모양으로 이리저리 온갖 애교를 떨며 화 풀어주기에 바빴으나 보이는 송곳니에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찬열의 모습에 많이 화나서 물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자존심이건 뭐건 첫 여자친구한테도 세웠던 자존심을 무릎과 함께 날렸다. 나는 파리다. 윙윙거리는 똥파리. 변파리. 손을 싹싹 빌어가며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그제서야 찬열의 입이 열렸다.
"너 어디 갔었어"
"응? 나 그, 호프집.."
"호프? 그게 뭐야"
"술 마시는 데!"
"너 바보되는 거? 그거 마셨어?"
"아니, 안 마셨지"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던 복실한 꼬리는 온데간데 없고 졸린 표정의 박찬열 밖에 없었다. 입이 째져라 하품을 하며 싹싹 빈다고 올라가있던 손을 잡아채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더니 인형 껴안고 자는 애마냥 백현을 껴안고 사납던 눈이 가라앉았다.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고 부들부들한 갈색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러니까 내 룸메이트 박찬열은 우리집 개다. 겉만 사람, 영화나 그런 곳에서 나오는 반인반수다. 무엇에 분노, 화가 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꼬리가 나온다고 한다. 늑대도 아니고 개라는 점이 너무 귀엽지만 그 뾰족한 송곳니는 어찌나 무섭던지. 찬열과 첫 만남은 밤 늦게까지 알바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이 한 겨울에 반팔에 반바지, 추위를 잘 타는 백현은 꽁꽁 싸맸음에도 불구하고 추워지는 것 같았다. 대충 열한 살? 많아봐야 열세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여기서 벌벌 떨고 있는 게 너무 불쌍해 자신의 코트를 벗어 걸쳐주자 느릿하게 백현을 올려다보았고 거기에 미소를 지었다.
형이랑 같이 집에 갈래?
...
나쁜 사람 아니야
그제서야 내밀었던 손길을 받아들였다.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맞잡은 손마저 차가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백현의 웃음만큼이나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잡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게 백현과 찬열의 첫 만남이었다.
도어락을 풀고 들어가 신발을 벗고 피곤함을 씻어내리려 욕실에 가려는데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에 쭈그려 앉아 강아지마냥 낑낑대는 것에 놀라 재빨리 달려가 찬열을 살폈고 아까까지만 해도 손을 잡았던 찬열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으르렁대는 사나운 찬열 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다 결국 용기를 내어 그 앞에 쭈그려 앉았고 예상 못한 백현의 행동에 더욱 당황한 건 찬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백현은 찬열을 끌어안았다. 낯선 곳이라 그런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무언가에 걸렸다. 백현이 놀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으악!
너 이거 뭐야? 귀? 이거 강아지 귀 아니야?
...
너 뭐야?
개
응?
개라고
그래, 개면 어때. 그냥 조그만 강아지 하나 키운다고 생각하자 백현아. 쟤는 강아지야. 강아지. 강아지.. 처음엔 조그맣고 키가 작아서 좋았다. 말도 잘 듣고 그러나 그것도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무럭무럭 크는데 어떻게 된 애가 단 2주만에, 자신은 20년 넘게 겨우 이정도 밖에 안 컸는데 찬열은 말 그대로 폭풍 성장. 키 크다던 후배 오세훈보다 더 노출증 환자 김종인보다 더 커버렸다. 어깨도 넓어지고 얼굴도 성숙해지고. 훨씬 잘생겨졌지만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야, 변백현"
"우유 꺼내와"
"변백현"
"야"
"오늘은 닭고기 먹자"
그래도 화를 눌러가며 박찬열을 챙겼다. 그 결과 백현에게 돌아온 것은?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우유곽이 떨어졌다. 명중!! 바로 박찬열이 다 마신 우유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