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윈터
[500] Days of WINTER
집애
* * *
오늘만큼 기가 빨린 날이 있었을까. 침대에 누워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아무 생각없던 내 머릿속은 방금 온 연락의 발송인으로 가득 찼다.
[ 집 잘 들어갔어? - 정재현 ]
[ 난 방금 도착했어, 푹 쉬고 또 보자 - 정재현 ]
참 거절하기 힘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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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졸업식 끝나고 바로 프랑스로 떠난거야?"
"응, 그래서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뒤풀이도 못 했어."
"그때 너만 없어서 얼마나 섭섭했는데!"
유난히 우리 반은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아이들끼리 사이가 돈독했다. 그래서 졸업식 당일까지 가족들이 아닌 다같이 교복을 입고 놀았던 것이었고. 물론 난 없었다, 교복도 못 갈아입고 꽃다발은 그대로 들고 바로 비행기를 탔으니까. 그때 추억에 젖어 살며시 웃음이 났다. 떠나는 비행기에선 나중에 이렇게 모일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재현이랑은? 어떻게 된거야, 너네?"
"..."
"야, 박세희.. 정재현도 없는데, 자자 딴 얘기 하자!"
"글쎄. 세희 너가 걔랑 더 친하지 않아? 둘이 친구잖아."
친구라는 받침이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꼭 깨문 세희였다. 분위기를 바꾸려해도 한 번 바뀐 분위기는 돌아가기 힘들었다. 수영이 웃으며 다들 잔을 들라고 웃어보였고 분위기는 덕분에 바뀌었다. 다시 시끄러워졌고 그 틈에 잠시 전화를 하고 온 재현이 들어왔다. 저기서 벌떡 일어나 제 옆에 와 팔짱을 끼며 섭섭하다며 제 마음을 토로하는 세희보다 일단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미안, 나중에. 지금은 저쪽이 더 급해서."
"..진짜 너! 몰라, 나 갈래. 나중에 연락해."
화가 나 룸을 나간 세희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지금은 저기서 해사하게 웃음을 짓는 받침이에게 인사를 하는 게 더 중요했다. 홀린듯 재현이 받침 곁으로 가자 하나, 둘 자리를 피해줬고 속닥거리던 수정, 수영, 슬기는 침을 삼키며 둘에게 집중했다. 받침이에게도, 재현에게도 소중한 친구였던 셋은 진심으로 바랐다. 마음이 전해져 물들어지길.
"..어?"
"프랑스어는 못 해서 한국어로 할 수 밖에 없네.
많이 보고 싶었어."
"moi aussi.(나도)"
"받침, 너 때문에 프랑스어 배워야 되나. 술 마실래?"
"그래."
너, 그거 알아? 너. 뭐 마실 때 양손으로 컵 붙잡고 마시는거. 지금도 그러네. 재현이 한 쪽 보조개를 움푹 들어가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알고있던 습관이지만 뭐랄까, 재현이 몇 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억해 말해주니까 느낌이 달랐다. 정재현은 ZA매거진 총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했다. 당연히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라 꽤 놀랐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을 하고 있어서.
곧 3분기 최고매출 매거진 결과가 나오는데 너무 떨린다며 이마를 긁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마를 긁는 행동은 정재현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하던 행동이다. 지금은 또 무슨 고민을 하고 있길래, 저러지.
"감독 일은 너랑 잘 맞아?"
"..아, 잠시만."
"왜?"
"..아니, 아니야."
방금 되게 위험했어, 정재현이 별 뜻도 안 담긴 질문을 하는 데 잘생겨 보였다고 하면.. 아니지, 얘 원래 잘생기긴 했잖아. 위험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어. 자기합리화를 하며 재현에 물음에 대답해줬다. "응, 곧 작품 들어갈거야. 기사도 날거고." 받침이는 손목을 쓸며 말했다. 재현 역시 알고 있었다. 저 행동은 받침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과연 둘은 무슨 고민을 했던 것일까. 같은 고민으로 망설이는 모습은 열일곱, 그때와 같았다.
* * *
"이번 '내게로 다가온 시간들' 총 연출을 맡은 이받침 감독입니다.
한국에선 첫작품이라 사실 많이 떨리고 이런 자리도 처음이라 떨리네요.
좋은 배우분들과 작가님, 스태프분들과 첫 작품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받침이 쑥스러운지 볼을 감싸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받침이의 행동에 작품의 시나리오 작가. 즉, 받침이 스튜디오를 차리고 가장 먼저 받은 시나리오의 주인인 태일이 호탕하게 웃었다. "작가님 떨린다면서 천재 감독인거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 너무 겸손하시네요. 그쵸?" 다들 그렇다는 동의를 보였고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도희주 역을 맡은 이동혁입니다.
저야말로 미모의 감독님과 일할 수 있게 되서 영광입니다! 각오보단 직접 연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몇 달 동안 박현지로 살게 될 김유정입니다. 뭐든 열심히하는 모습 봐주세요!"
영화를 이끌 주연배우들의 인사를 끝으로 대본리딩이 시작됐다. 청춘의 위태로움에 서있던 소년의 흔한 성장 이야기였다. 흔했지만 달랐다. 소소한 것부터 감정선이 뚜렷하고 세심한 대본과 그걸 잘 소화해준 배우들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대본리딩 뒤풀이용 회식을 가는 길이었다. 도희주 역에 이동혁 배우가 내게 다가와 거리낌없이 말을 걸었다.
"감독님 감독님!"
"네?"
"에이, 말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6살 누나잖아요.
감독님은 외국에서 오셨으니까 개방적! NEO 알죠?"
"..예?"
네오보단 open이 더 어울릴 거 같은데.. 이 말은 꾹 삼키고 그냥 되물었다. "아차, 이게 아니지. 저 감독님한테 섭외 왔을 때 진짜 신나서 감독님이 보조로 들어간 영화도 전부 다 정주행하고 그랬어요! ...그니까.. 음, ..그냥 감독님 팬이라고요!" 힛 웃으며 햇살처럼 도망가는 동혁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받침이었다. 20대 초반에 풋풋한 동혁의 모습이 마냥 귀여우면서도 부러웠다. 저 나이 때, 난 저렇게 맑았었나. ..그리고 넌 그때도 맑았을까.
* * *
펑!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ZA의 1위 독주를 축하합니다! 편집장님 초 얼른 부세요!"
자켓을 팔 한 쪽에 걸친 재현이 초를 불며 제 기쁨도 같이 불었다. 그렇게 불었는데 기쁨은 아직도 속에 꽉 차 흘러 넘치고 있었다. 팀원들이 그렇게 좋으시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먼저 많은 대중들한테 ZA의 매거진은 여전히 탑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분이 좋았다. 둘째는 그것을 증명하듯 3분기 역시 1위를 당당히 보여준 것이. 마지막으로는 그때 고민하던 것을 너에게 당당히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 좋아죽네? 일 얘기하려고 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10분 조금 안 됐나? 어쨌든 축하해. 받침이한테도 얘기해줘ㅇ.."
"안 돼, 하지마!"
"..음?"
"들어가서 얘기하자."
수영의 등을 툭툭치며 들어가라는 재현이었다. 편집장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팀원들이 케이크를 내려놓고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사이지? 저 여자 분, 편집장님 여자친구야?" "엥. 설마. 편집장님 표정이 여자친구 보는 표정이 아니었는데?" "그 표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편집장님한테 저렇게 막 대하는 건.." 밖에선 수영이 재현의 여자친구라는 소문이 사실화되고 있었다. 재현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노발대발 화를 냈겠지. 그러면 옆에 있는 수영이 제가 기분이 더 나쁘다며 한 대 퍽 때릴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활발히 오고갔다.
"왜 왔어?"
"말했잖아, 일 얘기. 인터뷰하러 왔어."
"허, 죽어도 난 인터뷰 안 할거라면서."
"마음이 바뀌었는데 어떡해. 추가로 축하 선물도 주려고."
선물이 뭐냐고 물으려던 재현의 말을 막고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진행한 수영이었다. 40분이 지나고 인터뷰가 끝이 났을까 심통 난 표정으로 수영을 쳐다보는 재현이었다. ..이런 애가 뭐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어휴. 수영이 속으로 생각하며 포스트잇 하나를 뜯어 뭘 쓰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8시. 늦으면 죽는다. ㅇㅋ?
마지막은 이런 말을 쓰고 이만 간다며 수영은 나름 쿨하게 나갔다. 그리고 아차차! 하며 다시 돌아와 한 마디를 더 말했다. "그 뭐냐, 너 동창회 때 향수 뿌렸어?" "엥 그걸 어떻게 알아, 너가. 너 내 향 맡고 그러냐..?" "뭐래, 그거나 뿌려. 누가 그 향을 참 좋아하더라고."
* * *
"그래서 못 와?"
- 으유ㅠㅠㅠㅠㅠ 미아내 받침아ㅠㅠㅠㅠ
"아니야, 나도 그냥 가지 뭐. 나중에 봐.
갑작스러운 약속이 취소돼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아직 들어가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뒤를 돌았을까 누군가가 어깨를 탁 집었다.
"약속? 여긴 무슨일이야?"
"아, 약속 맞아. 근데 방금 취소, 그래서 가려고. 넌?"
"나도 똑같은데..
그럼 우리,
약속 취소된 사람들끼리 저녁은 어때?"
"..좋아."
[500] Days of WINTER 03 Fin.
약간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다 피식하고 웃는거..ㅠㅠㅠ
원하는 짤이 없어서 그냥 사담에 추가했서용.
♥내 사랑들♥
재휸쓰 일이칠 아름재현 윤오해 얏호 윙윙
윤오야! 자몽쥬스 빵자 0226 뿌꾸빵 우리
뚜든 감자감자 열렬 리처 복숭 복숭재디
어드 0229 아이님
암호닉은 가장 최신편에서만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