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_깊어지고
(with.하성운)
"왜 연락이 안 되지."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머리를 쥐어 뜯을만큼 고민스러운 상황입니다. 어제 밤부터 오늘까지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고 있거든요.
평일이라 다짜고짜 찾아가기도 애매한 시기에 연락두절이라니,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잠깐이라도 연락이 끊길 것 같으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구구절절 늘어놓던 사람이었는데. 경험 해보지도 못한 일을 이렇게나 갑작스레 만들어버리다니요.
이젠 걱정을 넘어서 괘씸하기까지 합니다.
오후 늦게까지 기다리다 결국 바닥이 나버린 인내심에 겉옷 하나 챙겨들고 집을 나섭니다.
만나든 못 만나든 눈으로 지금 곁에 없다는 걸 확인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요.
함께있지 않아도 늘 곁에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이렇게 멀어질 수는 없습니다.
버스를 타고 여덟 정거장 정도 가면 도착하는 그의 동네에 발을 들일 때부터 보고 싶다는 마음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불어나는 듯 하네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고 중요했는지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고 해도 꼭 들어낼 생각으로 도착한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지도 벌써 네 번째. 집에 없는 걸까요?
다섯 번째 초인종을 누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찌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혼자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해. 생각이 쉽게 나쁜 쪽으로 흐르거든.'
그렇게 말해주던 사람이 아니었나요.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런 나에게는 무슨 말을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일어났어?"
"이름이?"
"네, 하성운씨 애인 되시겠습니다."
"왜 여기 있어?"
"왜긴."
한 시간 전.
마냥 초인종을 누르고만 있기엔 답답해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곤 급하게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한 때 둘 다 홈데이트에 꽂혀 꽤나 자주 와 익숙하게 느껴지는 곳에 발을 들이고 눈을 돌렸을 때 활짝 열린 방문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급히 걸음을 옮겨 얼굴을 확인합니다. 아무래도 잠에 든 것 같은데 말이죠.
나는 이렇게나 급한데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 조금 많이 따질 생각으로 어깨를 붙잡았을 때 그제서야 말이 없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유.
"아주 펄펄 끓어서 끙끙 거리고 있던 거 내가 해열제까지 먹여서 다시 재웠는데, 기억 안 나?"
"와, 진짜 기억 안 난다."
"내가 못 살아, 미련하게 그냥 있으면 어떡하냐? 바로 병원 가야지."
"갑자기 열 나고 그래서 갈 정신이 없었다니까."
잔뜩 뜨거운 몸을 만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할까요. 열이 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그 얼굴이 그냥 태평하게 자는 얼굴이 아니라 열에 들떠 앓고 있는 모습이라는 걸 알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평생 비밀로 할 생각입니다.
"내일 날 밝으면 일어나는대로 병원부터 가."
"오늘 자고 갈 거지?"
"말 돌리지 말고."
"말 돌리는 거 아니고 그랬으면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제 옆자리를 팡팡치는 얼굴에 다시 혼자 걱정했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이마를 톡 때립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하지 않으니 모르는게 당연하긴 하지만요.
누워서 마주한 얼굴이 서로 정반대의 표정을 하고 있는게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웃음을 터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열이 내려 한결 가벼워진 상태로 웃는데 그 모습이 마냥 사랑스럽긴 좀 힘들 것 같네요.
"왜 웃어."
"그냥, 나 보고 싶다고 집에서 여기까지 막 왔을 거 생각하니까 막 웃음이 나."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도 모르면서."
"왜 몰라, 다 알지. 나 네 머릿 속에 살잖아."
나긋하게 말을 꺼내며 머리를 넘겨주는 손길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쉽니다. 결국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이 분명하니까요.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영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지만 어제 오늘 우리 사이에 일어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일을 우리는 경험했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조금 더 침착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 없이 찾아올 수 있겠구나.
우리가 이렇게 더 깊어지는구나, 여전히 배우고 있구나. 하고요.
많은 경험이 빈틈없이 이루고 있는 관계는 쉽게 무뎌지지 않으니까.
-----------------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