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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몬스타엑스 강동원 김남길 성찬 엑소
분주히 전체글ll조회 4436l 2


 "아직 부족한 점들이 많지."



 지원이 겸손하게 내뱉고는 커피 포트의 불을 껐다. 부족한 점들이야 있긴 하지만,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손을 보면 될 터였다. 다른 모델들처럼 공격 기능은 없지만, 대신 방어 기능이 다른 모델들에 비해 유난히 뛰어난 모델이었다. 윤형은 커피 포트를 열고 커피를 컵에 따르다가, 지원을 보며 빙긋 웃어보이고는 대충 투명 테이프를 뜯어 실린더에 붙였다. 유성 매직의 뚜껑을 열고, 실린더에 붙인 테이프 위에 간단하게 적었다.


 F-Def. M-1, K H B.


 M-1이라니, 김지원 오래간만에 한 건 했는 걸. 윤형은 킬킬 웃으며 매직 뚜껑을 닫았다. 최초의 방어형 인조인간. 최초의 공격형 모델인 F-Att. M-1, K D H.만큼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성능은 완전히 반대인, 그러나 훨씬 뛰어난. 여태 개발된 공격 기능의 모델들은 총 삼백 개가 넘었다. 적진의 참전국이 어마어마한 양의 공격형 모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공격형을 보급하는 것이 시급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적진의 모델들은 훨씬 더 그 성능이 뛰어났다. 이것은 분명 원료의 문제였다. 그 비밀은 적진국의 연구소에 스파이를 보내지 않는 이상은 밝혀내기가 아주 어려웠다. 여전히 그 강력함을 따라가기 위해 끙끙대는 다른 연구원들과는 달리, 지원은 과감히 방향을 틀기로 결정한 것이다. 공격을 따라갈 수 없다면, 방어라도 제대로 하자는 취지였다.


 지원이 첨가한 기능들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방어형 모델 하나만으로 적진의 공격형 모델을 열 대 정도는 너끈히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이는 지원의 첫 성공작이기도 했다. 공격형 모델이 개발되고 보급이 시작된 이후로, 다른 연구원들로부터 더이상의 신작은 나온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개발된 모델들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에만 열중했던 지원으로서는 첫 도전이자 과제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불가능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지원은 그 우려를 보기 좋게 누르며 첫 신작 개발에 성공했다.


 그만큼 신작에 대한 지원의 애정은 각별했다. 윤형은 신작이 담긴 유리 실린더를 손 끝으로 매끈하게 쓰담어보는 지원을 흘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감격스럽지 않아? 네 손으로 만든 첫 F-Def야. 이니셜은 임시로 붙여놓았지만 원한다면 모델명은 네가 정하는 게 좋겠어."


 "그래…그렇겠지."



 지원은 유리관 속에서 호흡기를 달고 작게 살아 숨쉬는 생명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매끈한 피부에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제 손으로 구슬땀을 흘려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위협적으로 생긴 공격형 모델들과는 달리, 지원의 이 첫 방어형 모델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모호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등에는 호흡기를 비롯한 영양분의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선들이 마구잡이로 달려 있었지만, 소년의 나신은 희고 아름답게 여위어 있었다. 지원은 자신의 창조물에 혼이라도 빼앗긴 듯 넋을 잃고 물로 가득찬 파란 유리관을 올려다 보았다. 각설탕, 하고 중얼거리는 윤형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지원은 한참을 손 끝으로 매끈하고 딱딱한 유리를 쓰다듬었다. 일주일만 있으면, 이 유리관에서 신작을 꺼낼 수 있다. 더이상 유리관이 아닌 저 보드라운 피부를 직접 만질 수 있고, 아직 잠을 자는 듯 살풋 감긴 눈이 뜨여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지원, 각설탕은 두 개만 넣는다. 윤형은 그렇게 소리치며 커피를 조금 따른 찻잔 안에 각설탕을 떨어뜨렸다. 이름은 정했어? 윤형이 물었다. 지원은 빙긋, 웃으며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김한빈."


 "김한빈?"


 "그래."


 "전쟁에 쓰는 모델 치고는 이름이 꽤 예쁘네."


 "예쁘게 생겼잖아."



 지원이 어린아이같이 중얼거리자, 윤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어나서 처음 선물 받는 인형을 쳐다보는 여자아이같다. 무슨 옷을 입히지? 무슨 이름을 붙여줄까? 머리를 땋는게 좋을까, 풀어서 빗기는 게 좋을까? 그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은 제 스스로 '김한빈'이라고 이름을 붙인 신작의 모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윤형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호로록 들이켰다. 무방비한 아이처럼 멍한 얼굴로 유리관을 올려다보는 지원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짧게 경고하였다.



 "너무 사랑해주지는 마, 김지원. 창조자의 지나친 사랑은 모델에게 인격체를 만드니까."





***





 "송윤형!"



 쾅,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고, 문이 미처 활짝 젖혀지기도 전에 지원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쳐 들어왔다. 왜, 무슨…윤형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옷 죽지가 지원의 손에 바싹 붙들렸다. 어딨어! 지원이 부르짖는 소리에, 윤형은 그저 멍한 얼굴로 눈만 말똥말똥 뜨고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윤형의 물음에,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한 것을 억누르며, 지원이 꾸역꾸역 그 이름을 뱉어냈다.



 "김한빈…김한빈 어딨냐고!"


 "김한빈?"



 윤형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름에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외쳤다. 네가 만든 방어형 모델 말하는 거야? F-Def. M-1…. 윤형의 대답에 지원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대답을 잘라먹었다. 어딨냐니까! 윤형은 왜 이리 서두르냐는 듯 킥킥 웃어보이며 제 멱살을 잡은 지원의 손을 뿌리쳤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지원은 타들어가는 촛불 심지처럼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윤형도 절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여태 적진을 배회하다가 정면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둘 중 하나는 피를 보는 것.


 윤형은 손을 싹싹 비비며 모델의 목록을 확인했다. 공격형 모델 F-Att 모델들은 총 300대. 적진의 모델 역시 300대 안팎을 웃도는 수였지만, 그 성능은 훨씬 뛰어났다. 이제 F-Def. 방어형 모델들을 내보내야 할 시간이다. 지원이 터득한 기술로 만든 복제 인조인간들의 수는 모두 100대. 공격형 모델들에 비해 조금 모자란 수는 맞지만 하나의 모델로 총 10대의 공격형 모델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엄청난 힘이었다. 정면 승부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윤형은 각 지대에 배치된 모델들의 목록을 화면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훑어가던 윤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째서 F-Def. M-2부터 시작하는 거지? 지원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한편 이상야릇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F-Def. M-1은 적진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 즉, 한빈은 그곳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에? 지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딱딱한 나무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윤형 쪽에서 애가 타서 지원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F-Def. M-1이 없지? 최초의 모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100대 중에서는 최고의 성능을 가진 놈이라고! 그 놈이 저기에 없으면 어떡하라는 거야?"


 "닥쳐! 설마 김한빈을 저기에 쓸 생각이었어?"


 "설마? 설마가 아니라 당연한 거야. 최초의 방어 모델이랍시고 네가 만든 것 아니었어? 지금 그 결실을 맺을 현장이 바로 저기에 있어. 그 녀석이 있어야 할 곳은 저기라고."


 "미쳤어? 김한빈이 잘못되면…."


 "김지원, 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닥치고 있어."



 윤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호출기를 눌렀다. 뭐하는 거야? 지원이 안색이 새하얘지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윤형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어디갔는지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호출기의 센서에 손가락을 대고 지문 인식을 하며, 윤형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떻게 마스터의 명령에 따르는 인조인간이 배치된 장소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인가? 


 윤형은 흘끗, 간이 상자를 주시하다가 그 안에 손을 넣어 무던히 쌓인 칩들을 뒤적였다. 작은 초록색의 칩이 하나 뽑혀나왔다. PL. 위치 분석의 칩이 분명하다. 이는 모든 모델의 두개골 쪽에 끼워넣은 것이었다. 칩 안의 정보가 입력된 이상 길을 잃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이탈했다는 말인가? 아니, 어떻게 모델이 스스로 이탈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스스로 자아가 있지 않고서야…. 잠깐만, 자아?


 치지직, 신호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24분 34초 후에 폭격합니다.]


 "잠깐. F-Def. M-1의 행방이 불분명하다. 전근 주위에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니 그 후방부를 찾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호출기를 끄고, 윤형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주시했다. 정확히 24분 내지로 터진다. 하지만 F-Def. M-1이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배치된 자리까지 와주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다. 윤형은 5분을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5분 내로 오지 않으면, F-Def. M-1은 빠진 채로 폭격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공격형 모델들은 방어형 모델들과 차례대로 공격과 보안을 목적으로 배치된다. 즉, 200대의 공격형 모델이 선두부에서 달리고, 그 뒤는 100대가 전부인 방어형 모델들이, 그리고 맨 마지막에 방어형 모델들이 모두 무너졌을 때를 대비하여 나머지 100대의 공격형 모델들이 배치되는 것이다. 


 지원은 이를 모르고 F-Def. M-1을 만들었던 것일까? 애초에 지원이 아껴야 할 것은 제가 스스로 만든 첫번째 방어형 모델이 아니었다. 그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터득한 기술. 지원이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그것이었다. 지원의 기술로는 F-Def. M-1과도 같은 모델들을 무한하게 복제하여 만들 수 있었다. 공격형 모델은 말 그대로 공격을 목적으로 하지만, 방어형 모델은 공격형 모델을 지켜내고 시간을 끄는 역할을 한다. 즉, 목적이 다하고 나면 소멸한다. 공격의 기능이 없으므로, 버틸 때까지 버텨내고 나면 베터리가 수명을 다하거나 내부 조직의 파괴로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이다.


 지원은 그것을 몰랐나? 제가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 아닌, 그 기술로 만든 모델을 사랑했나? 아무런 감정도 없는 껍데기 뿐인 로봇 따위를? 윤형은 제 뒤를 덮쳐오는 불길한 기운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김지원은 F-Def. M-1를, 김한빈을 사랑했다. 제 스스로 처음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며 지극히 아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창조주이자 마스터로서의 사랑이었나? 설마 김지원의 사랑이, 그 딱딱한 몸체에 생명이라도 불어넣어 주었나? 주체적 자아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자아를?



 "김지원!"



 급하게 외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지원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는 텅 비어있었다. 굳은 쇠문은 덩그러니 열려있었다. 갔다. 김지원이. 김한빈을 찾으러. 윤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미친 새끼. 윤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다시 호출기를 켰다. 화를 억누르며, 윤형은 최대한 담담하게 공격개시를 명령했다.



 [정확히 19분 52초 후에 폭격합니다.]


 "됐어, 시간 낭비야. 그냥 지금 공격을 해야할 것 같다. 선두부의 F-Att. M-1부터 M-100까지 머리에 내장된 명령 개시 칩이 있어. 그 칩과 연결된 선은 L-B1. 선을 자르면 동시에 기능이 발휘된다. 지금부터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니까 자판 앞에 서."


 [L-B1, 파악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모니터를 확인해야 하니까."



 윤형은 호출기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모니터를 응시하였다. 순간 붉은 사이렌이 켜지며, 스크린에 분포 되어있었던 작은 센서들이 한 곳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오는 것이다. 윤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외쳤다. 카운트 다운을 시작할테니 선을 정확히 잘라내. 윤형은 그렇게 말한 후, 호출기 옆에 위를 향하고 있었던 스위치를 잡아당겼다. 스위치에 불이 켜지더니, 두 목소리로 갈라진 기계음이 터져나왔다.


10


9


8


7


6


5


4


3


2….



 지원은 품 속의 리모컨을 꺼내 몇 번이고 감지 신호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신호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한빈은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온 몸이 철사에 휘감긴 듯 따갑고 갑갑했다.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어. 네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너를 애초에 이런 목적을 두고 만드는 것이 아니었어. 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숙명으로 만들어버린 내가 죄악이다. 지원은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젓고, 침착하자, 침착하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였다.


 그 순간이었다. 쾅!!!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지며, 창문 바깥에 풍경처럼 펼쳐져 있던 숲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푸른 숲이 순식간에 붉게 번쩍이는가 싶더니, 뾰족한 빛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공격이 개시되었다. 저것은 적진의 불빛일까, 아군의 불빛일까? 지원은 애타는 마음에 리모컨이 부서지도록 감지 신호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한빈에게서는.


 한빈아, 제발. 지원은 리모컨을 품 속에 껴안고 급히 탑에서 내려갔다. 계단에서 넘어질 듯, 말 듯 발걸음이 위태로웠다. 한빈아, 대체 어딨어. 대체 어디에.



 숲속에서 넓은 평야로 가는 발걸음이 힘겨웠다. 누군가가 고의로 전류량을 줄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전원이 차단 된 상태에서 당한 일이니, 한빈은 기억할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늑한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까운 곳에 첨탑이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 그리고 지원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제 숙명이 무엇인지. 뇌파에서 자꾸만 여러가지의 신호가 쏟아졌다. 신호가 100개라고 해도 모두 분석할 수 있지만, 전류량이 대폭 줄어 그것을 분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빨리 적진의 근처에 있는 배치 장소로 오라는 명령의 신호일까. 하지만 또 하나는 익숙한 신호다. 누굴까. 누가 부르는 것인가. 한빈은 물을 먹은 듯 점점 지쳐가는 몸을 이끌고 평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곧 폭격이 시작될텐데. 그 전에 미리 가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굼뜬 상태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곧 잠이 들 것 같이 몸이 나른하다. 이러면 안되는데.


 그 순간,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덜덜, 진동했다. 한빈은 멍하니 눈을 뜬 채로, 귓가에 손을 갖다 대고 짝, 손뼉을 쳐보았다. 삐이익―하는 수신 부작용 신호만 들려온다. 청각에 손상이 간 것인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가 불쑥 솟은 숲 위로 빛이 번쩍였다. 저게 뭐지? 한빈은 발걸음을 세우고 눈을 깜빡이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번쩍이는 노란 빛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뭐였더라, 저게. 한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내부 시스템에 입력된 단어는 아니었다. 내부 시스템에 태어날 때부터 입력되어있는 단어는 전쟁 중에 간단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코드화 되어있었다. 그러니까―이는 지원이 가르쳐 준 단어였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을 외우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한순간에 잊어버리는 것일까. 한빈은 느릿느릿 눈을 꿈뻑거리며 가까운 땅으로 쉬익,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빛무리들을 응시했다.


 아, 생각났다. 별똥별.



 "그럼 이건 다 별인가."



 한빈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이곳을 떠서, 고요한 산골에서 같이 보자고 했었던 그 별이라는 거. 태양의 빛을 받아야만 빛날 수 있다는 그 작은 돌맹이들. 네 눈을 만들 때, 별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팟, 하고 지원의 음성이 터졌다. 한빈은 그제서야 입가에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 그게 별이구나.


 그 별은 점점 땅에 가까워지며, 이내 쾅!!! 하고 대지를 가르고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 두개가 아니었다. 번뜩이는 빛무리들이 땅에 대못을 박듯 떨어지며, 그 사이에 금을 내고 제 몸을 밀어넣었다. 땅에서 폭발하듯 떠오른 바위 조각에, 한빈의 팔뚝에 생채기가 났다. 평소라면 거뜬히 막아낼 것이었다. 하지만 기력이 없었다. 한빈은 하얗게 움푹 꺼진 제 팔뚝을 들어 전류량을 확인했다. 13%. 이대로면 위험하다. 전류량이 급속도로 줄고 있었다.


 한빈은 힘겹게 몸을 이끌어 그 지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제 몸은 턱없이 굼떴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빛덩이들은 그 속도가 훨씬 빨랐다. 쾅!!! 한빈의 바로 뒤에 떨어진 빛이 그 주변부의 바위와 마찰하여 불똥이 튀었다. 가까운 금속인 한빈의 다리에 달라붙은 불똥이 점점 커지며 불꽃으로 밝아졌다. 한빈은 제 다리 사슬을 서서히 녹여가며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내려다 보았다. 어떡해. 한빈은 별안간 왈칵, 제 눈 주위에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스템에 무리가 가니 근육 조직에도 장애가 온 것인가. 한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까지도 뇌파에서는 끊임없이 신호가 오가고 있었다. 처음에 여러개로 잡혔던 신호가, 이윽고 하나로 줄어들은 것 같았다. 한빈은 그 신호를 분석해내려고 얼마 남지 않은 전류를 끌어 뇌파로 고정시켰다. 팟, 하고 규칙적으로 터져오는 것은 푸른색 신호였다. 푸른색? 한빈은 재빨리 답례의 신호를 보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전류가 얼마 없었다. 답 신호를 보냈다가는 전류가 대폭 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문을 두드리듯이 급하게 전달되는 신호는 푸른색이었다. 답해야 한다. 한빈은 제 눈에서 다시금 화산처럼 무언가가 밀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아, 되지 않는다. 신호를 보낼 수가 없다. 한빈은 황급하게 제 팔뚝에 모니터링되는 전류랑을 확인해보았다. 5%. 언제 이렇게 준 것인가. 눈 밑은 계속 간질간질하게 자극되며, 괴물이라도 뚫고 나올 것처럼 무언가가 터질 듯 솟구치고 있었다. 언젠가 지원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눈 끝이 벅차오르고 코끝이 찡해지면 눈물이 터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빈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한빈은 부드러운 육체와 살아서 끓는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필요없는 눈물은 애초에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밑이 절망적으로 벅차올랐다. 어떡해, 한빈이 작게 속삭였다.


 쿵!!! 한빈의 바로 옆에 가장 큰 빛덩이가 떨어지며, 깊이 금이 가있었던 땅이 뒤집혔다. 한빈은 제 몸이 함께 뒤집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몸이 공중 위로 붕, 떠올랐다가 이내 쿵!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투둑,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한빈은 간신히 눈을 떠 제 몸에서 분리된 부분을 확인했다. 팔, 팔이 떨어져 나갔다. 하필 전류랑이 기록되는 왼쪽 팔이었다. 한빈은 희미한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떨어져 나간 팔에 기록된 마지막 전류량을 확인했다. 2%. 그제서야 눈에서 그 눈물이라는 것이 줄줄 흘렀다. 물론, 뜨듯한 액체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은 제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으로, 그 뜨거운 액체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다른 모델들에게는 없는 그것으로, 마음으로.


 지원의 신호는 계속 뇌파를 타고 도착했다. 하지만 보낼 수 있는 신호는 거의 없었다. 한빈은 마지막 남은 2%의 전류를 최대치로 끌어모았다. 단 한 글자라도 짧게나마나 인사를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한빈은 제 시스템에 내장 되어있는 단어가 아닌, 지원이 가르쳐 준 단어를 떠올리려 애썼다. 전류량이 1%라도 더 닳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보이는 전류량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한스러웠다.


 아, 한빈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꼭 감고 신호를 보냈다. 제가 보내려는 세 글자를 완성하기란 어려웠다. 전류랑은 이제 2% 미만으로 바닥을 치고 있었고, 그 세 글자 마저 완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 글자. 딱 두 글자라도. 한빈은 피처럼 끓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신호를 보냈다. 팟, 하고 신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보내진 것일까. 한빈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랑. 보내졌을까? '사랑해', 그 마지막 글자를 보태지 못했는데. 지원은 알아들었을까? 지원이라면 두 글자를 가지고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늘 영특하고 지혜로운 주인이었으니까….


 한빈은 점점 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야뿐만이 아니라, 정신 마저도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정말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마지막이 너무 비참하다. 마지막은 불구덩이에서 굴러도, 함께 하고 싶었는데. 함께…. 한빈의 독백같은 생각이 멎었다. 쿵!!! 다시 한 번 폭격으로 떨어지는 빛덩이 속에서, 한빈의 몸이 지이잉, 기울었다. 희미하게 뜨여진 눈도, 스르륵 감기었다. 뜨거운 빛들 속에서, 납덩이같은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F-Def. M-1의 기능이 중단되었습니다. 내부 시스템의 파열로 인해, 가동을 중지합니다. 영구적으로 손상된 시스템은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삐――――――――――――.





***





 지원은 허탈하게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섰다. 방금 리모컨으로 받은 전파는 미약하게 끊겨 반복되지 않고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불분명하고 어색한 발음이었다. 제가 아는 그 목소리가 맞았다. 어딘가에 분명 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말이 아닌지. 데려오라고, 어디 있으니 빨리 와달라는 그 말이 왜 아닌 거야. 늘상 했던 말. 보고싶다는 말…그 말이 아니라, 평생 외우지도 못해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말. 왜 그 말인거야. 사랑, 두 글자만 자꾸 끊기는 연결음에 매달려 간신히 내뱉고서 잠잠해져버린 리모컨을 허망한 시선으로 내리치며, 지원은 숨이 턱 막혔다. 목구멍이 커다란 판자에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슴으로 울고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지원은 땅에 곤두박질치는 화약과 폭탄을 뚫고서라도 한빈을 구해야했다. 구하기엔 너무 늦었을까. 하지만 그 몸뚱이만이라도. 어디에 있는 것일까, 너는. 지원은 제가 어디로 내달리는 지도 모르면서, 첨탑을 벗어나 숲을 지나는 길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불구덩이로 변한 먼 평야에서는 F-Att의 모델들이 시스템에 입력된 대로 적진을 부수고 있었다. 저 속에 한빈이 있을까? 아냐, 송윤형이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정신을 붙잡아야해. 지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미 눈에서 눈물이 맵게 핑 돌았다. 어떻게,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어.



 "한빈아!"



 그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쏟아지는 굉음에 네가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참하다. 내 손으로 만들고, 내 손으로 기르고, 내 손으로 가르치고, 늘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내가 미쳤었는지 너를 혼자 내버려 두었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네 몸뚱이만이라도 데려와야 한다. 설사 내가 직접 은을 연결하여 이어붙이고 만든 네 속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네가 이제는 껍데기 뿐인 무너진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나는 네 등을 끌어안고 울어야겠다. 지원은 그리 생각하며 바보같이 얼굴을 찝찝하게 뒤덮어버린 눈물을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손등으로 문질렀음에도, 눈을 부릅 떴음에도 시야가 홍수로 범람하고 입김을 분 유리처럼 흐릿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어서, 큰 길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려 목놓아 악을 쓰는 아이처럼 목에 선 핏대가 터질 듯 오열했다. 안 보여. 한빈아, 네가 안 보여. 눈물을 닦아내고 맑아진 시야에 보이는 것은 불빛으로 가득한 불구덩이였다.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옆의 마른 풀더미에 불이 붙어 처참해진 풍경으로 화르륵, 불타오르는 풍경. 그 사이에서 잔뜩 찌그러지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지원은 미친듯이 달렸다. 화르륵, 하면서 살을 녹이고 죄이는 불길에 발이 데였지만, 그 고통스러운 감각도 마비된 것처럼 잊고서 바위가 듬성듬성한 길을 가로질렀다.


 불길에 우그러지고 있는 몸. 사람의 피부처럼 보들보들한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제 자신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이은 조직들과 긴밀한 이음새들이 옆에서 끼쳐오는 뜨거운 열기에 흐물흐물 녹고 있었다. 지원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며 그 앞으로 달려갔다. 불길 속에서 그 녹아내리는 몸뚱이를 껴안았다. 손목에 기록된 전파의 수명은 모조리 닳아버린 것이 오래인지, 불이 꺼져 기록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너는 이 불길속에서 살이 녹고 근육이 팽창하여 찢어지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랑, 그 두 글자를 보내며 마지막처럼 감겨오는 눈으로 무엇을 보고, 셔터처럼 천천히 닫히는 귀로 무엇을 들었을까. 너는 내게 사랑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들려주지 못했다. 지원은 흐느끼며 이미 허물처럼 무너져내린 몸을 안고서, 불길을 빠져나왔다.



 이를 어째. 윤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빈의 상태를 살폈다. 지원은 옆에서 귀신이라도 본 듯 끔찍하게 멍한 눈동자를 하고 피부 조직 내의 그을린 이음새가 다 드러난 몸을 쳐다보았다. 총 200대의 공격형 모델과 84대의 방어형 모델이 폭파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은 이겼기 때문에, 윤형은 지금 막 한숨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다 터지고 망가진 모델을 안고 시체처럼 터벅터벅 걸어오는 지원을 보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새까맣게 타버린 부속품이 전부였지만, 윤형은 단번에 지원의 품에 들린 모델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망연자실한 지원의 표정을 보아서.


 고칠 수 있겠지? 지원은 간절한 질문마저 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치직, 소리를 내며 작은 불꽃을 터뜨리는 기계의 삐걱거리는 마찰음만을 듣고서 서있었다. 윤형도 차마 고쳐볼게, 하고 말하지는 못했다. 가망이 없었다. 고칠 수 없는 파손 상태였다. 전파기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내부 시스템이 모두 불이 붙어 폭파된 상태였다. 한참만에 윤형이 겨우 생각해 낸 말도, 지원에게는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네가 가진 설계도가 있어. 똑같은 걸로 만들 수 있어, 김지원."


 "……."


 "F-Def. M-1과 똑같은 모델을 찍어낼 수 있어."


 "그건 김한빈이 아니야."


 "……."


 "…김한빈과 똑같이 생긴 방어형 모델일 뿐이지, 그건 김한빈이 아니야."



 지원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은 설계도를 가지고 기계로 찍어내지만, 한빈이는 내 손으로 만들었어. 기계도 하나 없이, 내 손으로 모든 부품을 다듬고, 조각하고, 잇고, 닦아냈어. 인간의 것과 똑 닮은 단단한 근육도, 그 위를 덮는 살결도 다 내가 만들었어. 실험관에서 나왔을 때, 내 이름을 가르쳐주었어. 그리고 이름을 주었어. 한빈아, 하고 불러본 것도 내가 유일했고, 최초였어. 내가 말을 가르쳤어. 시스템에 입력된 것 이외에 수많은 아름다운 말들을 가르쳤어. 입력된 정보가 아니라서 기억도 못할 줄 알았는데, 용케도 마지막 메시지를 그것으로 전달했어. 사랑한다고 그랬어. 지원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입가를 바르르, 떨었다.


 윤형은 착잡한 기분으로 그 말을 들으며, 잔뜩 훼손된 한빈의 내부에 손을 집어넣고 긁어보았다. 공격형 모델 10대를 대적할 수 있는 방어형 모델이라도, 폭격기의 옆에서 오래도록 있었다면 이 정도로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윤형은 이마를 구기며 그 내부를 조심스럽게 뒤지다가, 문득 손에 무어라도 데었는지 악! 하면서 손을 꺼냈다. 그 짧은 비명에, 지원이 퍼득 고개를 들었다. 뭐지? 윤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뭐가 번쩍, 했는데. 윤형은 맨손 위에 감전 방지용 장갑을 끼우고, 제 손을 따끔하게 때리던 곳에 다시 손을 넣어보았다. 계속 멍했던 지원이 벌떡 일어나 윤형의 옆으로 걸어왔다.


 윤형은 다시 장갑 위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서 얇은 실린더 형의 유리관을 빼냈다. 유리관 내부로 작은 철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부품이었지? 분명 무언가를 연결하는 것 같기는 한데, 철심이 유리관 밖으로는 끊겨져 있어 당연히 그 무엇과도 반응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유리관 내부로 푸른 불꽃이 번쩍, 일렁였다. 철심이 다른 조직과 이어져 있지 않아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그 유리관 내부에서만이라도 푸른 불꽃은 홧홧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푸른 빛. 지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뭐하는 거야?"



 윤형은 지원이 리모컨을 품 속에서 꺼내 분리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지원은 윤형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리모컨의 겉 껍데기를 뜯어내고 그 속에 정교하게 이어진 철심들을 조심스럽게 헤집었다. 제가 한빈에게 신호를 보낼 때 쓰는 푸른 버튼과 이어진 철심을 핀셋으로 휘어잡고 빼냈다. 그리고는 아직 푸른 섬광이 번쩍이는 유리관에 자잘하게 붙은 철심을 놓고서, 그 위에 핀셋으로 건진 리모컨의 철심을 대었다. 순간, 번쩍이던 푸른 빛이 연결된 선을 찾고 리모컨의 철심을 타고 흘렀다. 윤형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기가 무섭게, 리모컨의 신호광이 반짝이며 미약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



 윤형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지원은 핀셋을 쥐고 그 철심을 유리관에 연결시킨 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푸른 섬광이 다시금 빛나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사랑.]



 사랑해. 지원은 미라처럼 굳혀진 손을 유리관에서 떼지 못한 채,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사랑해. 가르쳐놓고, 네게 평생 못해줘서 미안해. 지원은 결국 푸른 빛이 따끔거리는 유리관을 제 심장에 품고 고개를 숙였다. 몸에 힘이 풀리고, 무릎이 꿇렸다. 미안해. 윤형은 지원의 쇳소리에 시큰해지는 코끝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고, 연구실 밖으로 향했다. 둘이 있을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비록, 겉 껍데기부터 내부까지 모조리 타버리고 그을린 부품밖에 남지 않은 차가운 몸체일지라도.



 그 날 이후로, 지원은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끔 조수가 밀어넣어주는 식사조차도 거를 때가 대부분이었다. 한빈을 처음 만들던 그 방이었다. 그곳에는 처음 조립을 시작한 부품들의 원료가 남아있었고, 현 모델에는 쓰지 않는 옛 재료들이 남아있었다. 지원이 가장 처음 설계한 설계도도 벽에 붙어있었다. 윤형은 지원이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따끔 불투명한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번쩍이는 푸른 유리관의 섬광만이, 지원이 쓰러지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원은 한빈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제가 제일 처음 손에 쥐었던 부품, 재질, 이제는 쓰지 않는 재료들을 다시 손에 쥐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본래 한빈의 몸에 있던 것은 아직도 미약하게 푸른 불꽃이 팟팟 터지는 유리관밖에 없었다. 지원은 그것을 철심으로 리모컨과 연결시켜놓고 작업에 몰두했다. 사랑. 유리관은, 아니, 한빈은 쉬지 않고 내뱉었다. 사랑. 지원은 처음의 한빈과 티끌 하나 다르지 않게 눈에 불을 키고, 초기에 설계했던 부품들의 조각을 이었다. 한빈을 재조립하는데 공을 들이고 시간을 보낸지 이제 다섯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부는 거의 다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그 표피를 덮을 피부 재질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처음 한빈을 만들고 남은 실리콘은 충분했다. 지원은 한빈의 머리에 전파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들어가는 철심을 1mm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구부려 밑으로 내렸다. 철심에 은을 얇게 두들겨 패서 만든 관을 매달고, 그것을 호흡기를 지나 가슴께로 내렸다. 윤형은 슬쩍 문을 열고 지원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먹을 것도 거르면서 어떻게 저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지. 윤형은 혀를 차며 말을 걸어보았다.



 "잘 되어가?"


 "응. 이제 표피만 붙이면 돼."



 지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다가, 아차! 하며 리모컨에 연결시켜놓은 푸른 섬광의 유리관을 떼어냈다. 그거는 뭐하게? 윤형이 묻자, 지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보면 알아. 지원은 다시 연결이 끊어져 유리관 안에서만 파삭하게 터지는 푸른 섬광을 흘끗, 쳐다보고는 방금 전에 가슴께로 끌어당긴 은으로 만든 관에 쾅, 하고 구멍을 뚫어 이음새를 만들었다. 지원은 유리관 속에서 뻗어나온 작은 철심들을 일일이 은관속에 연결을 시키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작은 철심들은 보기만 해도 수백개가 넘는 것 같았다. 저걸 손으로 다 하겠다고? 윤형은 혀를 내둘렀다.


 몇달 간 식사도 제대로 못한 지원의 얼굴에는 슬슬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작업의 마무리 단계라도 밟고 있는 듯이 반짝거리는 얼굴이었다. 윤형은 기가 차면서도 나름 밝아진 지원의 얼굴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저도 피식, 웃었다. 유리관의 푸른 불빛이 슬슬 연결되는 철심들을 하나 둘씩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지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지원이 정성스럽게 하나 하나 연결하는 유리관의 철심들을 보며, 윤형은 유리관을 턱짓으로 가리켜 물었다. 저 유리관은 대체 어느 부위인데 그렇게 정성스럽냐?


 지원은 그제서야 유리관에서 눈을 떼고, 윤형을 바라보면서 활짝 웃었다. 피곤한 듯 하면서도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목소리가, 초췌하지만 맑은 웃음을 띤 얼굴이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대답했다.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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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진짜 몰입 대박이에요.... 잘읽고갑니다
9년 전
독자2
사랑ㅠㅠㅠㅠㅠㅠㅠㅠ어느 부분부터 펑펑 울면서 봤ㅅ습니다 진짜 대박ㄱ이에요 작가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사랑함니다
9년 전
독자3
와..작가님 완전금손이세요!!ㅠㅠㅠㅠㅠㅜㅜ신알신하고가요!!
9년 전
독자4
허류ㅠㅠㅠ 금손이세요ㅠㅠㅠ보다가울컥울컥했어요ㅠㅠㅠ
9년 전
독자5
ㅠㅠㅠㅠ
9년 전
독자6
...작가님ㅠㅠㅜㅜㅜㅜ 금손이세요ㅠㅠㅠㅠ 헐ㅠㅠㅠ 진짜 몰입해서 봤어요ㅠㅠㅠㅠ
9년 전
독자7
진짜 이건 팬픽이... 와... 벙쪄서 봤네요... 최고입니다 실제로 글 쓰시는 분인가 봐요ㅠㅠㅠㅠ 진짜 다음 글들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알신 해요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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