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일곱, 여자 하나
─ 19
107. 공허함
"……아, 잘못 놨다."
석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늘 그렇듯 밥그릇 여덟, 숟가락도 여덟, 젓가락도 여덟 쌍. 석진은 빈 식탁 의자를 잠깐 보다 밥그릇을 들어 다시 밥솥에다가 넣었다. 아마 평일이었으면 석진은 버릇처럼 빵을 구웠을지도 모른다.
식탁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음식물을 씹고 삼키는 소리가 다였다. 불편해. 입에 남는 잔여물들이 마치 모래 한 줌과도 같았다. 평소 식탁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정국은 붕 뜬 머리만 대충 손으로 정리하고 멍을 때리고 있었다.
평일에는 빵, 주말에는 밥. 00의 습관인지라 아침을 챙겨 주던 석진도 습관처럼 굳어 버린 패턴. 석진은 식탁 위에 올려진 하나의 숟가락과 한 쌍의 젓가락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00은 구석진 곳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장 구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언제나. 항상. 벽에 머리를 기대고 빵 혹은 밥을 우물우물. 버릇처럼 00의 자리는 비워 두었다. 빈자리 옆에 앉은 지민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옆이 허전했다. 그래서 추웠다.
"……누나 보고 싶다."
헙.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으로 내뱉어 버린 정국이 놀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애써 식사에만 집중하던 남준이 결국 무너져 버렸다. 쥐어져 있던 숟가락이 스르르 흘러내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윤기는 눈을 감아 버렸다.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목이 아팠다. 삼키는 게 침이 아닌 날카로운 칼인 듯,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짜지도 않았는데 하나같이 00이 없는 빈 자리를 쳐다봤다. 그 빈자리가 넓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크기였다.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108. 말 좀 하자
"누나 보고 싶어요."
"……."
"안 보고 싶은 사람 없잖아, 여기."
"……바보야. 누나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할지, 보고 싶지 않을지 모르잖아. 넌 아직도 모르겠냐. 우리 입장 말고, 누나 입장으로 봐야 한다고."
이거 봐, 지금도 느낄 수 있잖아. 우리는 끝까지 이기적이야. 지민의 말에 태형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나한테 연락해 봤어요?"
"……아니. 무서워서 못했어."
무섭잖아. 우리 버리면? 누나가 팀이라도 나가 버리면? 같은 생각,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윤기가 입을 열었다. ……현오가 화난 게 이 부분에서잖아. 00이는 모든 걸 다 보여 주면서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했는데, 우리는 그 노력을 헛되이 한 거고. 우리가 잘못했어. 정국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누나한테 미안해서 어떡해요?
"……사과해야지."
"사과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
"누나는 끝까지 말 안 해 줬어요. 누나는 끝까지 힘들다고 안 했어요."
남준의 표정이 멍했다. 정말이었다. 00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외롭다고, 얽매이는 게 부담스럽다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00이 평소와 같이 숙소에 돌아왔다면 정말 아무것도 모를 수 있었던 거였잖아. 그럼 우리는 계속 똑같았을 테고. 소름이 돋았다. 지독한 배려에 정신이 멍해졌다.
말을 안 해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괜찮지 않은 건 아닌데 말이야. 실수. 명백한 실수였다.
"……우리가 연락해도 될까요?"
"……잘 모르겠어."
응, 잘 모르겠어.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주는 사람한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00이는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석진의 물음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109. 뭐 하고 있어?
"왜 말 안 했어."
"……."
"제발 말 좀 하고 살면 안 돼? 왜 그렇게 꽁꽁 감춰 두고 사는데. 나 너 가족이야."
"가족이라고 모든 걸 터 놓으라는 법은 없지."
"……너 말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무거운 게 좋은걸."
가벼워져 본 적이 없어서, 가벼우면 무서울 것 같단 말야. 무거운 게 좋아. 현오의 말에 대답을 해 주면서, 00은 트위들을 쓰다듬었다. 트위들은 누워 있어 졸린 듯 큰 눈망울이 감길락 말락 하는 상태였다. 아가 때부터 길들인 습관이었다. 오후쯤에 꼭 낮잠을 자는 거. 00이 트위들을 가볍게 껴안은 팔을 스르륵 놔 주었다.
"……금요일에는 누구랑 있었는데?"
"애들이랑. 술도 한 잔 하고, 어, 또 뭐 했지."
그 '애들'이 멤버들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00은 금요일을 회상하려 눈을 찌푸렸다. 그냥, 수다도 좀 떨고 했지. 보통 사람들처럼. 현오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확실히 00은 가라앉아 있었다.
"뭐가 문제야."
"누나가 '뭐가 문제야?' 라고 물으면 안 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거,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라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없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질문이란 말이야. 00은 갑자기 오는 문자들에 눈을 찌푸렸다. 친구들로부터 오는 문자들이었다. 물론 멤버들은 없었다. 그래, 무서울 거 알아. 머리로는 누구보다 이해하지. 00은 휴대 전화를 살포시 뒤집었다. 현오가 00이 힘들어한다고 말했을 것이 뻔했다. 친구들의 내용은 대개 비슷할 거다. 왜 말 안 했냐, 말해 주지 그랬냐. 그 말이라는 걸 한 번도 안 해 봐서 무서워 죽겠는데, 어떻게 말을 해.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평범한 게 제일이라는 말은 왜 나왔는데? 뒤틀어지는 속에 00은 얼굴을 베개에 묻어 버렸다.
"말 좀 해 주면 안 돼?"
"……."
"이렇게 참고 산 게 몇 년도 아니고 평생이잖아."
"……무섭다고 했잖아……."
"……."
현오가 다급히 입을 막았다.
"가벼워 본 적이 없어서, 무거운 게 편하다고 했잖아. 무섭다고 말했잖아."
"……."
"이것도 겨우겨우 말한 건데 왜 자꾸 보채……."
"……."
"……무섭다고, 했잖아……."
얼굴을 묻어 뭉개지는 발음, 막혀 나오는 목소리. 그 희미한 목소리가 뭉글뭉글 뭉개지는 것, 그건 확실한 울먹거림이었다.
보는 사람마저 서러워져 버리는, 그 무게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00은 그 상태로 미동이 없었다. 한 번에 함부로 쏟아 낼 수 없는 무게의 서러움이었다.
110. 조심스러움
낯설었다. 00이 이렇게 연락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나. 아니, 상황이 이런 것뿐인가. 정국은 낯섦에 다시 눈물을 떨궜다.
어제부터 느꼈던 낯섦이었다. 현오가 말하는 것밖에 믿을 게 없는, 평소 00의 모습들과는 너무 달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랐다. 숙소가 조용했다. 00이 있어도 조용했던 숙소지만 느낌이 달랐다.
"……왜 울고 그래. 괜찮아."
호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정국을 토닥였다. 정국은 호석의 말에 대꾸했다. 누나는 안 괜찮을지도 몰라요. 호석은 한 층 더 당황했다.
모든 멤버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정국에게는 유독 더 큰 충격이었다. 때론 어머니, 때때론 에너지였던 00의 '괜찮지 않은' 모습은 정국에게 가히 아픔으로 다가왔다. 힘든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말 말 그래도 '괜찮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끝까지 버텨 냈어. 끝까지. ……누나는 그랬어. 정국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누나 목소리 듣고 싶어요."
"……형도 그래."
"연락해도 될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
"……누나가 내 연락을 받아 줄까요."
정국의 말에 호석은 힘 없이 살풋 웃었다. 누나는 그래도 우리를 외면하진 않을걸.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거야. 물론 앞으로도. 정국이 입술을 이로 짓이겼다.
111. 연락
"……음."
00이 휴대 전화 화면을 보고 억눌린 소리를 냈다. 액정에 둥둥 떠 있는 전화번호가 퍽 익숙해서였다. 내심 반갑기도 했지만 피하고 싶기도 했다. 아까 보낸 문자를 확인했음을 알고 한 전화일 것이 뻔했다. 00은 한숨을 쉬고 휴대 전화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아. 어."
"……준이구나."
정국이 전화번호라서 조금 놀랐었는데. 역시나 정국이는 애들한테 바꿔 줬나 보네. 남준이는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에 잔뜩 당황했을 테고. 눈을 감아도 훤히 보이는 상황에 00이 애매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너희를 잘 안다는 것에 대해 안도하기도 하지만, 가끔 이게 맞나 돌아보게 돼. 돌아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해도. 남준의 긴장된 숨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 정말."
"준아, 네가 사과할 이유는 없어. 우리한텐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
"그렇다고 사과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에요, 누나……."
"……."
"안 숨겨지는 거 알잖아요……."
"……."
그러니까, 우리한테 기회을 주면 안 돼요? 숨기려고 하면 우리는 멍청해서 몰라요. 그냥 숨기지 말고 있어 주면 안 돼요? 아니, 숨기지 말고 있어 주세요.
"……사과라도 하게 해 주세요."
"……."
"제발."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외롭게 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누나.
"보고 싶어요."
"……."
"……누나 없으면 안 돼."
"……."
00이 숨을 죽였다. 남준이 흐느꼈다. 숨을 쉬는 방법을 까먹은 듯했다. 시공간이 멈춘 듯했다. 손에 힘이 빠졌다.
"……어디야."
"……."
"어디야, 00아."
"……."
바람소리가 나다가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더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00은 이미 눈을 감은 채였다.
"……집이야?"
"……."
"목소리 들려 줘. 목소리 듣고 싶어."
"……집, 맞아."
"……그래."
숙소가 우리한테는 집이곤 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좀 생소하네. 윤기의 메마른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생각 정리하고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지? 그런데도 그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과 걱정이 잔뜩 담겨져 있어서, 그래서.
"미안해."
"……."
"너 보고 싶어 해서 미안해."
"……."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00아."
00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112. 그래서 화해한 거야?
"눈 좀 봐. 붕어가 따로 없네."
"……닥쳐."
눈은 빨개서 팅팅 부어오른 게 연예인이라니. 새삼 놀라움을 느끼며 현오는 00의 밥을 차려 주기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게 밥도 혼자 못 차려먹고. 현오가 혀를 쯔쯔 찼다.
"0현오 너는 뭐 먹을 거야."
"나 햄버거 먹을 건데."
"……햄버거 김태형이 좋아하는 건데……."
"얘가 미쳤나. 누나 너 울어?"
"쭈꾸미 돼지고기 저거 석진 오빠가 해 줬었는데……. 0현오 네가 방금 쳐먹은 샐러드는 지민이가 먹었던 샐러드고……."
……하. 현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한바탕 울고 나니까 마음이 다 풀렸나 보네. 그래서, 화해는 정식으로 한 거야?
"흐어……."
"……야. 울지 마……."
"흐……."
"……안아 줄 테니까 울지 마.
……이게 애 하나지 뭐냐고.
113. 숙소는
"……누나아……."
"누나 보고 싶어요……. 내가 못됐었어……. 누나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봐요, 근데……."
"……형, 저기 휴지 좀……. 흐엉……."
"……."
"정호석 넌 또 왜 울어……."
난장판이네. 석진은 진이 다 빠지는 표정으로 휴지를 찾는 태형에게 티슈를 던졌다. 울 사람은 00인데 왜 너네가 울고 그래. 윤기는 00과의 통화에서 잡아 낸 00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을 되새겼다. 울었을까. 울었겠지. ……많이 울었나. 울면 머리 아플 텐데. 갈수록 00에 대한 걱정을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석진은 멍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긴 윤기의 팔을 내리쳤다. 쟤네 좀 어떻게 해 봐. 윤기는 잠깐 울고 있는 넷을 보더니 귀를 긁적였다. 아까 00이도 울더라.
"……네……?"
"누나 울었…… 흐어……. 누나 울었어요……?"
"……누나가 울었다고요?"
"……."
"00이 울었어?"
"……소리 내서 울었어요?"
"……아니."
응. 절대 소리 내서 울지는 않더라. 윤기가 아니었으면 알아채지 못했을 떨림이었다. 거실을 울리던 코를 훌쩍이던 소리조차 없어졌다.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너무 무거워서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00은 그동안의 무게를 어떻게 버텼나. 이걸 어떻게 숨겼나. 이 무게 때문에, 숨기려 전전긍긍하는 것 때문에, 얼굴 한 번 찡그려진 적이 있던가?
감정이 넘쳤다.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였다.
114. 동생은 그래
"뭐가 문젠데."
"……."
"서로 보고 싶어 하니까 보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
"왜. 보려니까 쪽팔리냐."
"너는 네 여자 친구랑 헤어질 위기까지 오고 하루 아침에 다시 만나는 게 쉽냐?"
"어. 겁나 쉬운데."
가끔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00처럼 막 숨기는 거 말고, 적당히. 현오는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짓고 혼자 떠들어대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돌렸다. 아예 무심한 척을 하고 싶으면 휴대 전화로 시선을 돌리는 게 좋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사실 00이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해도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현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서였다. 나도 안 울려 본 하나뿐인 가족을. 다만 표현하기가 조금 부끄러울 뿐이지. 운 탓에 부어 버린 00의 눈도, 손으로 계속 닦아 내어 짓무른 볼도, 그 막대한 울음을 꾹꾹 참아 쉬어 버린 목소리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그렇다고 꿋꿋이 멤버들이 보고 싶다는 제 누나를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멤버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가지 말라고 떼를 쓸 수도 없고. 차라리 성인이 아닌 어린 아이였으면 와앙 울어 00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처음으로 현오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가면 또 혼자네, 너."
"왜. 새삼 미안해?"
"아니. 우리 현오 많이 외로웠겠구나 싶어서."
"됐으니까 잘 좀 지내. 이렇게 매번 갑작스레 와서 사람 심장 철렁하게 만들지 말고."
"응. 미안해."
"내 말 뭘로 들었어. 이렇게 삽질하고 있지 말라니까?"
어? 00이 고개를 들었다.
"쌍방으로 뭐 하는 짓이냐고. 서로 보고 싶어 죽겠으면서 왜 안 움직이는 건데."
"……."
"짝사랑이라도 해, 서로?"
"……말이 왜 그렇게 돼."
"바보야, 좀. 생각 없이 행동해도 되잖아."
무서워도 좀. 혼자 아니잖아. 너 흔들리면 손 잡아 줄게. 그러니까.
"생각 없이 굴어 봐."
"……알았어. 그럴게."
현오가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아. 쟤 가면 나 또 혼자겠네.
연재 공지2 |
19화 겨우겨우 써서 올렸다. 근데도 아직 애들은 화해를 못했어요...ㅋㅋㅋㅋㅋㅋㅋ 으앙. 다음 편에 화해하겠죠, 아마? 근데 다음 편은 시험 끝나고 올릴 것 같아요. 쓴 게 하나도 없어서. 미안해요. 으헝.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엉엉. 그럼 진짜 시험 끝나고 봐요, 우리! 선물들 많이 들고 올게요! 좋은 밤 되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