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연애중 06 " 방가방가! " 집에서 나오는 내게 두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유치한 인사를 내뱉는 김태형때문에 순식간에 낯이 뜨거워졌다. " 아... 언제적 인사야. 초딩이냐? " " 방가방가는 초딩만 쓴다는 편견을 버려! 너 그런 편견 있는 사람이었어? " " 그냥 안녕이라고 하면 될 것을. " " 바라는 것도 많다. 그래, 안녕! 그나저나 오늘 나랑 데이트한다고 신경 좀 썼구나? " 어제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계속 톡으로 너랑 데이트할 생각에 설렌다고 주구장창 말하던 김태형이었다. 데이트가 아니라고 수없이 말해도 잠깐만 정정했다가 이내 기억 못 하는척 다시 데이트한다고 히죽거렸다. " 야! 데이트 아니라고 했지. " " 치, 되게 까탈스럽네. 그럼 뭐, 친구 없는 김태형 놀아주기 프로젝트? 이거면 돼? " " 오, 그거 좋다. 가자. " 뒤에서 따라오면서도 끝까지 그냥 데이트라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며 아이처럼 칭얼대는 김태형을 무시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 날씨가 참 좋았다. 가볍게 불어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파스텔톤으로 예쁘고 깨끗한 하늘의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눈이 부셨다. 하늘도 맑은데 오늘 밤에는 별이 잘 보이려나. 김태형과 함께 도착한 대학로 근처에는 화창한 날씨 덕분에 정말 데이트를 하러나온 커플들이 참 많았다. 어딜 가서 뭘 하길래 그렇게 행복한지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잘도 걸어가던 김태형이 갑자기 잘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의아함에 나 역시 그 옆에 멈춰서서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이 고개를 숙인채로 고뇌에 빠진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 뭐해? " 나 역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김태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물음에 김태형은 고개를 돌려 멍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있잖아. " " 어? " " 나.. 이런 짓 하면 너한테 혼날 거 아는데. " " ... " " 그래도 딱 한 번만 할게. " " 어? " 쭈뼛거리며 말을 꺼내던 김태형은 이내 결심한듯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자기의 큰 손으로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갑작스러운 김태형의 그 행동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하니까 힘을 줘서 내 손을 더 꽉 잡아온다. " 여기 다 커플이다? 심지어 너도 커플이잖아. 근데 나만 솔로야. 날씨도 좋은데 솔로라니, 외로워서 돌아가실 거 같다. " " 야. " " 이렇게 좋은 날에 좋아하는 여자랑 데이트하는데 커플들 사이에서 나도 커플 분위기 한 번만 내보자. " " ... " " 손만 잡을게. 응? 진짜 손만 잡고 걷자. " 그리고는 해맑게 웃고는 내 대답은 안중에 없다는 듯이 내 손을 꼭 잡고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결국 끌려가듯이 김태형의 약간 뒤에서 그 보폭을 맞추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나는 무심결에 김태형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잊고 지내서 그렇지 김태형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날 좋아한다고 했었고 내게 줄곧 그 마음을 표현했었다. 그런데도 단지 그냥 친구하겠다면서 나에게 부탁했고 나는 얼떨결에 친구가 되었으며, 그렇게 어느새 김태형과 꽤 많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김태형에게 장난치고 김태형과 같이 밥을 먹고 둘이 어딜 가는 것에 더 이상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김태형은 내게 친구였다. " 나 오늘 기분 짱 좋다. 날씨도 좋고 보는 연극도 좋고, 그리고 너도 좋고. " 고개를 살짝 돌려 정말 행복한듯이 나를 바라 보며 웃음을 보이는 김태형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 어정쩡한 태도때문에 다치고 상처받는 건 김태형일 것이다. 김태형은 어느새부턴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태형이가 나때문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랬다. 그랬기에 나는 김태형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 연극 진짜 꿀잼. 그치? " " 응. 완전 재밌더라. 인기 있을만해. " " 근데 남자배우 비주얼이 좀 아쉽더라. 못해도 나정도는 돼야지. " " 왜- 그정도면 잘생긴거지. " " 하긴, 나정도면 너무 잘생긴거다. " " 진짜 또 시작이네. " 방금 산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며 적당히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민윤기와 데이트 할 때는 정해둔 목적지에서 만나거나 바로 갔었기 때문에 특별히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이렇게 그냥 오래 걸어본 적이 없었다. 생소한 느낌에 낯설기보단 새롭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 너도 아까 그 뮤지컬 여자배우보다 훨씬 예뻐. 오늘 잘 차려입어서 그런가. " " 알아. 내가 좀 예뻐. " " 지금, 아니 평소에도 우리 완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인데. 그치? " " ... " " 우리 둘이 마트 가면 딱 아주머니들이 어머 신랑신부가 참 잘 어울리네- 할 그런 케미야, 우리가. 와, 그 소리 들으면 기분 짱 좋겠다. " " ... " " 내가 너를 더 먼저 만났어야하는건데. 아깝다, 진짜 아까워. " 그 순간 걸음을 멈추고 김태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김태형과 같은 속도로 발을 맞추어 걷던 내 발이 걸음을 멈추자 김태형도 같이 걸음을 멈추고는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나 때문에 놀란듯 허공에서 만난 그 시선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고, 가뜩이나 큰 두 눈은 동그랗게 더 커져있었다. " 태형아. " " 헐. 너 지금 내 이름 부른거야? 그것도 성 떼고? " " ... " " 와, 대박.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 " 야. " " 또 불러줘, 내 이름. 응? " " 김태형. " " 응! 왜? " 불러놓고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해 애꿎은 신발코만 바닥에 툭툭쳤다. 혹시 많이 상처받으면 어쩌지. 기대에 차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니 앞서는 걱정되는 마음이 내 입을 가로 막으려 했지만 결국 용기 내어 호흡을 가다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나... 좋아하지마, 태형아. " " ...어? " " 나 너한테 아무것도 못해주는 거 알잖아. 나 남자친구도 있고, 넌... 나한테 친구야. " " ... " " 난 너한테 아무것도 못해주는데 니가 혹시 나한테 기대했다가 상처받을까봐 나 겁이나. 나한테 넌 소중한 친구인데 그런 친구를 잃을까봐 무서워. 그러니까, " " 아니, 싫어. " " 야. " " 너 아무것도 못해주는거 아니야. 너가 나한테 왜 아무것도 못해줘. 오늘도 나랑 이렇게 놀아줬는데. 지금도 내 옆에 있어주는데. " " ... " " 알아. 너 혼자 아닌거, 나도 잘 알아. 그래서 나 너한테 하나도 기대 안 해. 그니까 나 너한테 실망하고 상처받을 일 같은거 없어. 내가 너한테 실망할 이유도, 넌 나를 잃을까봐 걱정 할 이유도 없는거야. " " 김태형. " " 짝사랑 하는 사람은 그 상대방한테 많은거 안 바래. 그냥 옆에 있어주고 나랑 같이 있을 때 웃어주고 행복해하면 다 되는거야. 그거면 돼. 나한테 아무것도 못 해주는게 아니라 다 해주고 있는거야, 넌. " " ... " " 그니까 넌 지금처럼 그냥 내 옆에 있어주고 나랑 있을 때 즐거워하고 나 때문에 웃어주면 돼. 내가 너한테 기대하는게 있다면 그거, 그거뿐이야. " " ... " " 내가, 너 안 불편하게 티 안나도록 혼자서 꼭꼭 숨기고 있을게. 그냥 넌 모르는척 해줘. " " ... " " 오늘은 너 못 데려다 주겠다. 지금 너랑 있으면 나 조금 화나고 속상할거 같아. 나 먼저 갈게. 조심해서 가. "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고 건네는 손 인사를 건네는 김태형에게 차마 손을 흔들어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김태형의 바라는대로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김태형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난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겨 길을 걸었다. 옆에서 조잘거리던 김태형이 없이 혼자 걷는 길은 조용했다. 김태형의 잔뜩 울상인 표정으로는 애써 밝은 척하며 돌아서던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참 아프게했다. 사실 난 요즘 많이 헷갈려하고 있었다. 민윤기에게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편안함을 요즘엔 김태형에게도 느끼고 있었다. 민윤기와 김태형을 비교하는 나의 모습이 두려웠고, 그리고 민윤기에게 상처받을까봐 두려웠으며 나 역시 김태형에게 상처를 주게될까봐 두려웠다. 어느새 김태형이 끼어버린 나와 민윤기의 관계가 어쩌면 김태형과 민윤기와 나, 모두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 끝에 내린 내 결론은 김태형을 밀어내자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거뿐이라고 생각했다. 김태형에게 선을 긋고 단지 친구로만 지낸다면 우리의 관계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김태형이 간 후에 그냥 발이 이끄는대로 한참을 걸었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였지만 복잡한 머리속에 주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 한참을 걸어서인지 발목이 아파왔고 잠시 겸사겸사 머리도 식히며 쉴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던 나는 주위의 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들어선 한 카페에서 우연히도 나는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민윤기와 그 앞에 마주 앉아있는 한 여자.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윤기와 여자는 서로의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 없는 두 사람의 공간에 왠지 모를 적막과 어색함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었다. 민윤기의 친구의 여자친구였다. 나도 소개 받았었던 사람이었고 민윤기와 나 그리고 그 두 사람이 함께 모인 적도 있었다. 여자는 아마 커플들끼리 만나자고 제안을 했을것이며 민윤기는 뒤늦게서야 혼자 뭐라 떠들던 내 카톡을 보고 내게 연락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마 곧 민윤기 친구가 오겠지. 내 생각과 동시에 친구가 쟁반을 들고 테이블에 도착했고 내내 침묵 속에서 말 없이 핸드폰만 응시하던 두 사람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왠지 그 장면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 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뒤를 돌아 문을 열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민윤기를 만났지만 차마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가슴이 답답했다. 민윤기가 오늘을 잊어 서운한것도 아니었고, 민윤기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어서 화가 난것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민윤기와 함께 있는 그 여자의 모습에 내가 겹쳐져 보였다. 내가 바라본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우습게도 나와 민윤기와 매우 비슷했다. 같이 있어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할 일을 하는 그런 모습. 그 입장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바라보는 입장에선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관계가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인가를. 민윤기와 나는 오래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늘 햇수로 9년째가 되었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듯이 우리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나는 우습게도 변해버린 우리의 원인을 새로운 인물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멀리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본 오늘, 이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상하게 변해버린 우리의 관계와 헷갈려하는 내 감정의 원인은 김태형이 아니라는 것을. 원인은 민윤기와 나, 우리였고 문제 또한 우리에게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두 사람 다 그것이 이성으로서의 감정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으니 나는 민윤기에게 점점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고, 확신이 없는 민윤기는 내게 쉽사리 그것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런 민윤기에게 나는 상처받았고, 그런 민윤기를 보며 나 역시 김태형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두려웠다. 문을 열고 뒤돌아 나와 목적지 없이 발길 가는데로 걸음을 옮겼다. 아픈 발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또 한참을 걸으며 생각했고 스스로 결론 지으려 노력했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어두워졌을때가 되서야 마침내 오래 된 방황 끝에 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늘 고민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수수께끼를 이제야 해결한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어쩌면 난 더 오래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계는 모두에게 위험했다. 상처받고 원망 할 나에게도, 원망을 받을 민윤기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민윤기와 나의 우정에게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민윤기와 나의, 우리의 연애는 여기서 끝나야만했다. 태꿍입니다ㅠㅠㅠ 확실히 3월이 되니 연재텀이 길어지네요... 죄송합니다ㅠㅠ 기다렸던 주말도 끝이 나고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네요! 늘 행복하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길 바랄게요!! 항상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보고 있다는 댓글 하나가 참 큰 힘이 되요~~^0^ [암호닉] 슈웁 / 석진센빠이 / 샘봄 / 루리 수대 / 윤기부인 / 부릉부릉 / MSG BBVI / 전정ㄱ국 / 전정국부인 / 충전기 밤열한시 / 슙 / 달달 / 초딩입맛 / 설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