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닿은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이렇게 엇갈리는 발자욱이 서글프다.
그대 다시 돌아오신다면 부디 당신을 연모하는 나비 한 마리를 찾아 주소서.
"내 몸에 손대지마."
"……."
"아, 어쩌면 처음부터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환아. 비가 세차게 내리는구나. 몸이 더 아프기 전에……. 어서 가자."
더 이상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
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구나.
결국 이렇게 엇갈리는 건가. 눈물이 터진다.
다행이구나. 그가 나의 흉한 모습을 보지 않도록 장대비가 나의 눈물을 가려주노니.
재환이 일순간 숨을 헐떡거리며 휘청거렸다. 택운은 그에 놀라 재환의 팔을 잡았다.
재환의 눈빛이 사정 없이 흔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초조하다.
재환은 택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뿌리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장이 아파 그런게 아니라, 네가 아파서. 택운이 너의 무너지는 모습이 아파서 떨린다.
택운이 어머니의 이야기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택운이 어떤 사람의 아들인지 그게 무슨 상관인지, 오히려 택운을 유별나게도 혐오하는 마을 사람들이 싫었다.
한심했다. 겨우 그런 것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무지함이.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아이에게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몹쓸 짓을 하고 있다.
이 아이의 상처를 끌어내어 마구 휘젓는다.
아아, 나는 죽고 나서도 천벌을 받으려나.
"너와의 연은 없었던 걸로 하고 싶다."
"……."
"나라 사람들을 홀리던 창기의 아들이랑 함께 했다는 게 수치스러워."
"재환아. 비가 차가워. 너, 아프니까. 비 부터 피하자."
빗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택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두렵다.
나에게 이런 말을 듣는데도, 어찌 너는 나의 걱정을 하려 드는 것이냐.
새빨갛게 붉었던 너의 입술은 이제 파리하게 식어 나를 책망하듯 숨을 죽이고 있다.
"뭐,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다."
"……."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재환아."
"그동안, 꽤나 즐거웠다고 해 두지."
배신감과 원망, 그리고 차마 떨치지 못한 애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슴 속에서 뒤엉킨다.
돌아가는 재환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럴 리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무겁고 슬피 울고 있는 것 같아서.
왜 네가 그러는거야. 정작 울며 아파야 할 사람은 난데.
택운에게 이별을 고하고 뒤를 돌았을 때 문득 예감했다.
내가 너를 지우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운아.
평생 운이 너를 가슴에 품고서, 그렇게. 나는…….
차가운 빗소리에 가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의 작디 작은 소리 없는 울분은 내 귀에 지독히도 선명히 들리는구나.
미안하다, 운아.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라 미안하고 미안해.
찰박찰박거리며 걷다 뒤를 돌아보면, 너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다.
예전의 그 때처럼, 너는 아직도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구나.
당장이라도 달려가 너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연모한다고 말 하고 싶어.
장대비야, 택운이가 춥지 않게, 택운이를 피해서 내려다오.
그리고 택운이에게 나의 사랑이 흘러가지 않게, 나의 가슴을 빗소리로 메워 다오.
하인은 문을 열고 들어 온 흙탕물 투성이인 재환에 경악했다.
"마…마님! 도련님께서!"
"……하, 하아."
"아, 아니……. 환아!"
허겁지겁 달려 나온 재환의 모친과 부친은 눈물을 흘리며 재환을 부축했다.
대체 이 몸을 이끌고, 어딜 다녀 온 것이냐. 대체 어딜! 어디를! 진탕이 되어버린 흙탕물에 주저앉을 듯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친을 바라보는 재환의 눈이 서글프다.
그러나, 이내 재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굽은 몸뚱아리를 곧추 세웠다.
"어머니. 아버지. 부탁이 있습니다."
……강에 가고 싶습니다.
-
재환을 태운 가마는 어느새 잔잔한 가랑비가 된 빗속 사이를 뚫고 천천히 나아갔다.
가마가 흔들릴 때마다, 재환의 곁을 지키는 이들의 눈물이 한 두 방울 씩 떨어진다.
그리고, 머지 않아 강자락에 다다른 가마에는 서글픈 정적이 찾아왔다.
"……도련님."
택운이는 강을 참 좋아했다. 차가운 물의 그 느낌이 좋다며, 유독 나와 강을 많이 찾았었지.
비 내음에 너의 향기가 묻어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눈을 감으면, 죽어서도 너의 향기를 잊지 않겠지. 너를 품고 하늘로 날아가련다.
"이것을……. 강물에 띄워 주세요."
언젠가 택운에게 그려 주기로 했던 나비 그림.
차마 너에게 전해 주지는 못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죄스럽다.
자신의 사랑 때문에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진다.
고통이 서서히 멎어온다. 숨도 함께 멎어오는 것만 같다.
이제 가야할 때가 온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택운아.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게 못내 후회가 되는구나.
사랑한다. 아직까지도. 죽어서도. 평생…….
"내가, 많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재환의 손에는, 보름달 모양의 돌맹이가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