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가끔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빠와 다르게 잘 삐치는 내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찬 투정을 많이 해서였을까. 내가 이 차가운 방에 홀로 버틸 시간들은 차마 계산하지 못한 걸까. 밤마다 집 안에 있는 유리란 유리는 다 깨버리는 아빠에게 몸도 마음도 상처가 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처음에는 그랬다. 엄마는 돌아올 것이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를 그렇게 끔찍히도 생각했던 오빠라도 돌아올 것이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1년을 채웠을 때 의문이 생겼다. 혹시 나를 데리러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그렇게 또 1년을 걱정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을 때,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깨달았다. 엄마는 오지 않는구나. 오빠 역시 오지 않아.
*
아저씨가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와 같이 일어나자마자 익숙한 번호를 눌렀지만 신호음만 갈뿐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안고 아저씨 집을 서성이다 아파트를 나섰다. 어젯밤은 조용했다. 아빠가 들어오시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꾼 것도 같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나를 안아 주었다. 아마 아저씨리라.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저씨일 게 분명하니까 그 사람은 반드시 아저씨여야 한다.
" 네가 왜 여기 있어? "
" 보고 싶어서요! "
씨걸이었다. 내 주변에서 맴도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즘 너무 자주 보이는 탓에 이제 저 얼굴에 정이 간다. 마주치면 반갑고, 인사하고 싶고. 꼭 대학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씨걸이 해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왔다. 꼭 어제가 생각나 얼굴이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아가며 손에 힘을 풀었다. 씨걸의 손이 점점 더 나를 조여왔다. 아파. 씨걸의 손을 벗어나려는 애처로운 몸짓에도 씨걸은 꿋꿋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올려다본 씨걸의 귀가 조금 빨개져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 근데 너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 "
*
" 이거 진짜 어렵다… "
" 그래도 누난 잘 배우는 편이에요. "
" 어머, 정말? 선생님이 좋아서 그런 거지~ "
익숙하지 않은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불편할 지경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소파에 앉은 저 둘은 아주 분홍빛이다. 김태형과 하지연. 하지연과 김태형. 나에겐 인사 한 번 제대로 해 주지도 않는 게 하 선배만 오면 깍듯하게 인사를 몇 번 하더니 어느새 저렇게 가까워져 있다. 이제야 알겠다. 하 선배가 요새 동방에 자주 오는 이유. 너 때문이었구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김태형을 보고 있으면 김태형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 선배의 어깨를 감싸쥐질 않나, 손을 마주잡질 않나, 아주 지랄도 저런 상지랄이 없다.
하 선배가 기타 잘 치는 건 내가 잘 아는데, 손에 굳은살 박혀 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해댔는데 기타 치는 게 어렵다느니, 선생님이 좋다느니, 비음을 가득 섞은 저 목소리에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동방이 저들 연애하는 곳은 아닌데 말이지. 한숨을 쉬며 하 선배의 어깨를 다부지게 잡은 김태형의 손을 힐끗 보았다. 쟤도 똑같아.
" 화장실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
화장을 고치러 가는 듯 하 선배가 수줍게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그제서야 하 선배의 어깨에서 손을 뗀 김태형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신사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 선배가 동방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정적이 찾아왔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함에 적응하지 못한 듯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푹푹 쉬어대던 한숨 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곧 김태형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하 선배를 대하는 것과 굉장히 다른 시선에 얼굴을 찡그렸다.
" 뭐. "
" ……. "
" ……. "
" 야. "
김태형을 불렀다.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 선배에게 당한 게 얼만데 이렇게 둘이 잘 되는 꼴을 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김태형에게 아무 말이라도 내뱉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 하 선배 기타 잘 쳐. "
" ……. "
" 손가락에 굳은 살 못 봤어? 그거 기타 많이 쳐서 그런 거야. 지연 선배 아버지가 기타 학원 하시는데, 그래서 저 선배 기타 엄청 잘 쳐. "
" 어쩌라고. "
" 저거 다 내숭이라고. 네가 멍청하게 넘어가는 것 같아서 내가 말해 주는 건데, 저 선배 예전에도 다른 남자 선배들한테도 막 저렇게 꼬리 치고, 심지어 우리랑 동갑인 동기들한테…, "
" 야. "
" 어? "
속에 담아두었던 걸 전부 쏟아내었더니 몇 년 간 묵혀두었던 토를 게워낸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조금만 더 뱉어내면 될 일이었는데, 사실 아직 말하지 못한 게 너무도 많은데 내 말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김태형이었다. 조금 전보다도 싸늘한 눈빛이 나를 향했고 금방이라도 욕을 싸지를 것만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태형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 곧 입을 열었다.
"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종류가 딱 두 가지 있거든. "
" ……. "
" 하나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
" ……. "
" 다른 하나는 남 험담하는…, 사람. "
" …야, "
" 너처럼. "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남을 험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김태형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지만, 경멸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을 김태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겨우 그런 아이로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만들었다.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마침 동방 문이 열리고 하 선배가 들어온다.
" 얼마나 세상을 힘들게 살았으면 열등감에 찌들어 있냐. "
" ……. "
김태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슴에 쿡 박혔다. 하 선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김태형을 쳐다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김태형 옆에 앉는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그 모습이 얼마나 여우 같은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김태형이 평가한 내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여 다시 한 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짜증이 났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내 앞에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하지연도.
" 사랑 못 받고 자란 거 티 내냐? "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졌다.
" 그게…, 티가 나? "
" 뭐? "
피가 혀 끝으로 새어들어왔다. 귀가 멍멍거렸고, 눈을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끔뻑였다. 초점을 담지 않은 채 김태형을 쳐다보았고, 아마 김태형은 여전히 나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끌어올랐고 화가 났지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크게 숨을 쉬어보는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몸이 떨려왔고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하던 시야가 곧 맑아짐과 동시에 뜨거운 것이 볼을 스쳐갔다.
" 야…, 너 우냐? "
*
퉁퉁 부은 눈에 차가운 손을 가져다댔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멈추지 않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울어본 적이 처음이었다. 엄마와 오빠가 떠났을 때도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순간이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 사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업에 들어갈 정도로 마음이 굳건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가방끈을 질끈 붙잡고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이어폰을 꼽고 씨걸이 추천해 준 노래를 틀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끈질기게 들어서인지 벌써 가사를 외워버렸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었다. 한층 나아진 기분에도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저씨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 정도 걸었을까, 몇 걸음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아파트 입구에,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느리게, 느리게. 방음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아저씨가 들을 수도 있었다. 이 시간에 들어온 걸 알면 왜 들어왔냐, 추궁부터 시작할 거고, 아무튼 일일히 다 설명하려면 나도 복잡하고 아저씨 마음도 복잡할 게 뻔하다. 그냥. 천천히. 아주 천천히. 라고는 했지만 겨우 몇 걸음을 늦춘다고 1분이 1시간이 될까, 벌써 도착해버린 입구에 다시 한 번 퉁퉁 부은 눈에 손을 올려두고는 발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층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낯선 실루엣에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색 모자, 검은색 마스크, 나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큰 키에 주머니에 손을 야무지게 집어넣은 남자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위험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경계보다는 집을 잘못 알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 몇 호 찾으세요? "
경계보다 친절이 앞선 건 아마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아파트에서 바로 옆집에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저씨가 화장실에 있지 않는 이상은 내 목소리가 들렸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곧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오겠지. 제작년 이맘때, 내가 조퇴했을 때도 아저씨는 그랬다. 늘. 그랬다.
남자의 눈이 나에게 닿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눈인데.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눈은 시선을 떨어뜨렸고, 곧 느릿하게 발을 움직였다. 동시에 아저씨네 집 현관문이 열렸고 예상에 들어맞게 아저씨는 검은색 슬리퍼를 끌며 나왔다. 나에게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검은 남자와 아저씨가 마주했고, 어쩐지 잠시 아저씨의 눈이 흔들렸던 것도 같다. 남자는 아저씨를 지나쳐 아주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비상계단을 통해 사라졌고, 아저씨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 이내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 어디 아파? "
" 그냥…… "
" 울었네. "
" 아니, 뭐…… "
아저씨가 슬리퍼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아저씨의 차가운 손이 내 양 볼을 감싸쥐었고 엄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쓸어내렸다. 시원한 느낌에 눈을 감았고, 곧 손을 내린 아저씨가 내 손목을 붙잡고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쉬고 가.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신발을 벗어 정리해놓고 벌써 저만치 들어가 소파에 앉아 있는 아저씨 옆에 앉았다. 아저씨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 누가 울렸어. "
" 그냥 혼자 울었어요. "
" 묻지 말라는 거지. "
" 혼자 울었다니까…… "
" 그럼 안 물을 테니까, "
" …진짠데. "
" 어디 가서 울고 오지 마. "
아저씨가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눕혀 아저씨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꼭 그 모습이 위로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꾹 참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받고 있구나. 지금 나는 사랑받고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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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치는 고삼 여러분들 힘내세요! 파이팅 파이팅 BGM ~ 스탠딩 에그 - Nobody Kno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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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러분... 저 그냥 남자 주인공 없이 갈까요...? 정국이 말고 다른 매력적인 캐릭터가 너무 많은 것 같... 독자님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