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외과 VS 소아과 :: 08
By. 아리아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 눈을 꼭 감아버리면 제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니는 그의 얼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눈을 뜨면 어느새 또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저였고 결국 붉어진 얼굴을 베게 속으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이러면 잠시라도 제 머릿 속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카톡-
방금 전 그의 잔상을 잊으려 했던 행동들이 무색하게 잠금을 해제했다. 오늘따라 유독 길게 보이는 노란 화면이 미웠다.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치자 제일 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카톡에 몽글몽글한 미소를 띄우며 화면을 누르려던 순간,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놀라 히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수신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휴대폰 사이엔 정적 뿐만이 흘렀지만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나쁘지않았다.
"잘 들어갔습니까."
"집 앞까지 데려다 주셨으면서 뭘.."
저도 모르게 툴툴 대는 듯한 말투에 놀라기도 잠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이어 들리는 예쁜 말이 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뭘 웃어요."
"그냥, 귀여워서요."
분홍빛을 띄던 두 볼은 그의 말 한마디에 진한 선홍빛으로 변해갔다.
"ㅁ, 무슨."
"전화는 왜 하셨어요. 운전 중 아니에요?"
"카톡 안 보길래 했습니다."
"보낸지 1분도 안되셨는데?"
"......"
"이유 말 안 해주실거면 끊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하나, 둘, ㅅ-을 세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다급히 말을 이어오는 그였다.
"김교수 목소리 듣고싶어서요."
아무래도 이 남자, 선수가 틀림없는 것 같다.
***
그 날의 시작과 끝을 권교수의 달달한 목소리와 함께했고 주말 내내 제 기분은 하늘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평소 같았다면 그리 준비하기 싫을 월요일 아침마저 상쾌한 기분으로 맞았다. 다 마른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고데기를 해볼까 해 켰다 생각없이 맨 손으로 집는 바람에 손을 데였다, 난리를 피우다 어느새 9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에 결국 스킨로션만 바른 채로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김교수님, 잠 못 주무셨어요?"
"그래보ㅇ, 어. 뭐야? 너 왜 여깄어?"
"간호사 로테이션 때문에 왔다가 너도 볼 겸."
"어이구, 누나 보고 싶었어요?"
"미쳤냐? 어디 오빠한테."
맨날천날 게임초대 카톡만 보내던 흉부외과 최승철의 등장에 소아과 의국이 한 층 더 밝아졌다.
수간호사 쌤이 사윗감으로 점찍었단 소리도 있고.
교수실로 가 가운을 확인하니 이리저리 구겨진것도, 핏자국도, 무엇보다 아직까지 은은하게 배여있는 권교수의 향수 냄새 탓에 쉽사리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아 가운을 팔에 걸치곤 세탁실로 향했다. 뒤를 졸졸 따라오다 어느새 제 옆에 붙어 어깨동무를 한 채로 시덥잖은 이야기를 해오는 최승철과 함께.
"야, 넌 그 게임 초대 좀 그만 보내라 제발."
"그게 다 너에 대한 오빠의 사랑이야. 왜 무시해."
"사랑ㅇ, 어.."
"뭔 말을 하다 말아."
하다 말 수 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피로 범벅이 된 수술복에 더해 째진 눈으로 제 쪽을 보고있는 권교수를 봤다면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쫄지 않을까 싶다.
"안녕하세요."
"......"
밝게 인사하는 승철을 속된 말로 개무시하고 지나쳐가려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미동도 없이 바라보더니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놔 까치집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가진 채로 세탁실을 빠져나가는 그였다.
"와, 권교수 싸가지 없는 건 알았는데 저정도일 줄은 몰랐네."
"아, 뭐래. 꺼져. 회진 안 돌아?"
"아, 맞다. 오빠 간다-"
쌀쌀맞은 권교수를 욕하며 툴툴대기도 잠시 회진 시간이라며 일깨워주자 금방 미소를 띄우며 자리를 떠나는 승철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조금 앞에 있는 권교수의 뒷모습을.
이후 식당에서 지훈이와 석민이랑 밥을 먹다 눈을 마주쳐도, 승관쌤과 응급실을 돌아다니다 눈을 마주쳐도, 그리 바빠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표정을 굳히며 떠나버리는 그였다.
***
"김교수, 듣고 있나?"
"네? 아, 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별 거 아닐세. 권교수랑 둘 다 수고했다고."
"오늘 왜 이렇게 넋이 나가있어요. 어디 몸이 안 좋은가?"
집중을 하지 못 하는 저를 어디 아프냐며 걱정스레 물어오는 교수님에 고개를 든 순간, 그 옆에 앉아있던 여전히 뭐 씹은 표정인 권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ㅇ,아, 네. 피곤해서 그런가봐요. 괜찮습니다."
자꾸만 마주치는 눈동자에 결국 대충 답해버렸다. 괜찮다며 고개를 내젓자 머리를 쓸어넘기며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권교수 덕에 그 회의의 뒷 내용은 일절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주말까지만 해도 다가가도 되냐느니, 목소리가 듣고싶다느니 여느 썸타는 남녀와 다를 바 없던 사이였는데. 나만 설렌건가. 무엇이 그의 표정을 저렇게 만든것인지, 무슨 일이 있나부터 시작해 내가 뭘 잘못했나로 끝이 났고, 동시에 회의도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만 남긴 채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권교수의 뒤를 쫓았다. 빨리 가서 잡기엔 아직은 우리 사이가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 생각과 더불어 뒷모습에서 조차 '나 기분 안 좋으니 건들지 마세요'를 뿜고 다니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저 거리를 유지한 채 발자국을 밟을 수 밖에 없었다.
***
소등시간이라 그런지 환자나 보호자 하나 없는 하늘정원이었다. 비록 권교수를 따라 올라 온 것이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함에 나른해지는 기분도 잠시, 저 쪽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담배냄새에 제 미간엔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는 권교수에게 가볼까도 싶었지만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터라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담배냄새 싫어하는 것도 한 몫 했지만.
그저 숨죽여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보다 한개비를 더 꺼내려는 그에 결국 뒤를 돌아 조용히 문고리를 잡으려했다.
"..김교수?"
"ㄴ, 네?"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뒤를 돌자 오늘 하루종일 보았던 무서운 표정보단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권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다 봤습니까."
"네. 담배 피시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 끊은지 좀 됐습니다."
"근데 지금은 왜 피셨어요? 의사라는 사람이.."
걱정 반, 투정 반이었다. 의사가 아니여도 담배가 안 좋은 건 충분히 알텐데 떡하니 피고 있는 것도 미웠고 걱정도 됐고.
제 말에 답은 하지 않고선 담배곽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점점 제 쪽으로 다가오는 그였다. 긴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다보니 등에 닿아오는 차가운 철문이 저를 막았고 고개를 들어올리자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흡하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에 서로를 담고만 있었다. 이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조심스레 문고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금방 그 손을 확 당겨 잡아버리는 권교수에 문을 열진 못했다.
"..나 오늘 엄청 힘들었습니다."
"......"
"새벽부터 콜 받고 나가서 테이블 데스 직전까지 갔다 겨우 살려내고, 나오자마자 또 응급환자 생겨서 수술복도 못 갈아입고 올라가서 진땀빼고."
"......"
"이상하게 오늘따라 진상환자도 많고 힘들었는데, 김교수 출근 시간 다 돼가니까 그냥 좋았습니다."
"김교수 볼 생각에."
"근데, 오늘 김교수 얼굴 처음 본게 세탁실에서 그 의사랑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거였어요."
"식당에서도, 응급실에서도 하루종일 남자들이랑 붙어 있는 것만 보는데."
눈을 마주치며 진심을 고백해오는 귀여운 그에 몽글몽글한 기분이 저를 감싸왔다.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그냥 짜증나 죽는 줄 알았습니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질투 해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머리를 헝클이다 제 말에 잠시 일시정지 되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제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그였다.
"그런가봅니다."
타이밍 좋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달한 선율이 우리를 감싸왔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그런 저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간질간질한 마음에 제 볼은 분홍빛을 띄었다. 그의 귀 또한.
또 다시 서로를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오늘 진짜 힘들었는데."
"알아요."
"알면, 한번만 안아주면 안됩니까."
무슨 용기였는진 모르겠다. 그저 제 본능에 충실했을 뿐. 그의 허리를 조심스레 껴안았고 이어 꽉 안아오는 그에 한참을 안겨있었다.
그 품은 봄 같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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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 권교수님 질투ㅎ한다헿헿헿 소재 주신 독자님들 다 너무 감사드려요!!!!!!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