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Crazy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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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웃었다. 웃고 있었다.
나에게 그 어떠한 원망의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웃고만 있었다.
"널 좋아해."
네가 집에 가는 길에 한 말 때문에 나는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십 년 동안이나 서로를 곁에서 지켜보며 서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게 네 말은 충격이었다. 호모포비아. 너는 내가 호모포비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왜 내가 그들을 경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나에게 좋아한다 고백하니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망설이다가 한 것인지 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심이야? 너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부터 세계가 무너졌다. 너와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던 세계는 와르르 무너지고, 오직 '나' 만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가 새로이 구축되었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에게 웃어준 너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동무를 하고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식한 후로, 평소와 같은 생활은 할 수 없었다. 곧잘 하던 스킨쉽에도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고, 너는 그럴 때마다 머쓱하게 웃으며 하려던 행동을 그만두었다. 나는 너를 그저 좋은 친구로,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친구로 여기고 있었는데 너는 아니었다니. 처음에는 당혹감이 내 전신을 휩쓸었고, 그 후 차례로 우울함과 허무함, 허탈감, 마지막에는 분노와 증오, 경멸만이 남았다. 언제나 함께 다니던 친구는 없어졌다. 나에게는 너 말고도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나를 신 떠받들듯 추켜세웠다. 나는 잔인한 신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의 조력자였던 너는 한순간에 노리갯감으로 던져졌다. 열 여덟 번째 해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했다. 예전에는 네 앞에서 설설 기던 녀석들이 웃으며 너를 농락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나의 친구라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놈들이 내게 재밌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영상을 틀어주었을 때, 나는 짧게 숨을 멈추었다. 조그마한 그 화면 안에는 네가 들어 있었다. 울부짖으며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지르며 애원하는 네가 들어 있었다. 내 양 옆에서 그것을 같이 보던 놈들은 낄낄거리며 떠들어댔다. 온갖 더럽고 추잡한 말로 너를 욕보였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강간당하는 네가, 마치 십여 년 전의 내 모습과 겹쳐져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잊어 버렸던, 잊어 버린,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내가 당했던 일을 너도 똑같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불쌍함은 아니었다. 정확히 뭐라 칭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나는 끝내 그 영상을 다 보고야 말았다. 마지막에 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도 않는 듯 했다.
그 후부터 나는 너를 더욱 기피했다. 너와 마주치면 영상과 함께 과거가 재생되어 견딜 수 없었으니까. 내가 이럴수록 너는 더욱 고통 받는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원래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점점 지나갔다. 한 달 같았던 일주일이 지나가고, 일 년 같았던 한 달이 지나가고, 십 년 같았던 여섯 달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았다. 너 또한 그랬겠지만, 그 때의 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나만 상처받았다 생각했다. 나는 너를 무시했다. 간절히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너를 무참하게 짓밟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무너뜨렸다. 짐승이 따로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나는 일종의 희열과 쾌감을 느꼈다. 너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즐겁기라도 한 것 같았다.
노력하던 너도 지친 것인지 한동안 너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고, 그것이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다. 너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던 내게, 어느 날 네가 말했다. 액정에 뜬 너의 번호에 짜증나는 한 편, 반가운 마음이 들어 글자들의 조합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저녁에 그 곳으로 나와 줄래?" 너의 말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너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조심스레 대했다. 소리지르고 때리지 못 할 망정. 나는 그런 유약한 너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유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때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네가 보낸 네 마음을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놈들에게 보여주며 놀림감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나가고 싶었다. 너의 부탁대로. 그래서 나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고 핑계를 댄 후 네가 말한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은 너와 나의 연결고리였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피폐해진 나와 쾌활하고 명랑한 네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아직 어렸을 때, 우리는 이 곳에서 화단을 가꾸며 놀고는 했다. 너는 자그마한 생명들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다. 봄이면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꽃씨들을 가져와 화단에 심고, 여름이면 화사하게 핀 꽃들을 보며 웃었다. 가을에는 낙엽들을 가져와 커다랗게 쌓아 놓고는 그 속에 푹 파묻혀서 청량한 웃음소리를 내었고, 겨울에는 소복히 쌓인 눈을 보며 눈사람을 만들고는 했다. 난간에 서서 바람을 맞기도 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기겁을 하고는 했지만, 너와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 곳은 단순한 옥상이 아닌, 우리들의 보금자리였다. 크고 나서는 잘 오지 않았던 곳에 새로이 발을 들이자 옛 추억들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추억의 힘인 것인지, 내게 남아 있던 양심의 힘인지, 아니면 이상함을 감지한 나의 본능의 힘인지 나는 너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나는 내가 너에게 용서를 빌면 너도 모든 것을 잊고 원래의 네 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쌀쌀한 바람이 내 얼굴을 휘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누군가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의 너였다. 너는 어렸을 때 네가 그러한 것처럼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편안해 보이던 곳이 그 날 따라 위험해 보였다. "왔네?" 하는 너의 놀란 목소리에 나는 너를 타박했다. 네가 불러놓고 그렇게 놀라는 건 무슨 경우냐면서. 그러자 너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실 네가 미안할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용서를 빌려고 입을 여는 순간, 너의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너."
"왜."
너의 목소리에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어째서였을까. 오랫만에 들어보는 너의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싸늘하게 맞이했다. 그런 나를 보고 너는 해맑게 웃었다. 한순간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자, 네가 말을 이었다.
"잔인해."
너는 웃었다. 웃고만 있었다. 나에게 그 어떠한 원망의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웃고만 있었다. 너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는 황급히 앞으로 뛰어갔다. 난간을 잡고 밑을 내려다보니, 아직도 떨어지는 중인 네가 보였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너는 웃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고, 동시에 너의 몸에서 붉은 꽃들이 만개했다.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손을 떨며 급하게 응급실의 단축번호를 누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정신이 나간 듯, 혼이 빠져버린 듯 두 다리만 움직여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꿈인 것이 분명했다. 정말 지독히도 더러운 꿈이다. 깨고 나면 너에게 꿈에 대해서 말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건물을 나섰다. 나를 맞이하는 것은 꿈이 아닌, 실제의 네 모습이었다. 이미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 네가 있었다. 일그러진 채로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왜 너는 나에게 한 마디 원망도 하지 않은 것일까. 왜 끝까지 웃고 있던 것일까.
답은 아직도 찾지 못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나는 세상에 남아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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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을 다 정신병자로 만드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이번에도 '나' 와 '너' 가 등장합니다. 누구일까요.
하루에 한 번씩. 이 기세를 몰아 달린다면 다음주면 끝나겠네요.
열심히 달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