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문학
w. 랑데부
김원필은 없어져야 한다. 지구 상에서도, 저 우주에서도, 불안정한 나의 세계에서도.
11.
불행은 불행을 낳을까, 행복은 행복을 낳고?
2학기에 김원필은 전학을 간다. 그러니까 이 얼마남지도 않은 여름이 끝이다, 행복이 행복을 낳는다면 뚝심있게 행복만 줘야지 왜 그 루트에 불행을 던져줘서 그 길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걸까. 입을 벌리면 관계의 끝을 억지로 집어넣어야 한다, 눈을 뜨면 현실의 현실을 담아야 한다, 가혹한 여름이다.
- 필아
- 교복 언제 사러가?
"몰라"
-같이 가
"그래"
어설프게 그린 피아노 위에 한 자 한 자 적었다. 김원필은 목소리 대신 입모양으로 답했다, 대답을 내놓기도 더운 날이었다. 김원필의 교복 카라가 곱게 접혀 있었다, 신기하게 매일 일어나 다림질 하는 것은 전에 보고 놀란 장면1이었다. 그리고 김원필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았다, 김원필은 다시 반바지를 입었다. 데일밴드도 어느새에 떼었다. 김원필이 맞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냥 어쩌다. 여느때 없이 담장에서 김원필을 기다리다 열린 이층 창문으로 봤다, 우연히. 매가 부러지면 다른 매로 때리고 또 때렸는데, 눈만 질끈 감을 뿐 김원필은 꿋꿋했다. 이런 거로 김원필을 묶으면 안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유일한 공통점이 아니었을까.
이유 없이 김원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김원필은 놀라지 않는다. 탁 트인 숨을 내쉬고 주머니를 뒤진다. 필아 먹어. 무슨 맛 사탕이었는지 기억은 안났다, 그냥, 사탕을 건넸다.
12.
피아노 쳐봐
내가 왜?
잘 친다고 했잖아
안쳤다고
나보다 잘 치던데?
어쩌라고
13.
-필아
-왜 안와?
아- 구식 선풍기에 절절한 바이브레션이 울린다. 동시에 안개꽃이 약풍에 날라간다, 김원필이 꺾어다 준 다발이었다. 일교시 늦게 등교한 김원필은 대뜸 안개꽃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흔하게 신문지로 포장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어디서 꺾어온 꽃.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교를 하다가도 주저 앉아 한참을 핀 꽃이랑 이야기를 했다. 그럴때마다 김원필은 세워둔 자전거에 중심을 기대고 기다려주었다,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손톱만한 한 잎이 고결한 생명을 머금고 차례 차례 포개진 게 좋았다, 끝내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다. 담 생이란는 게 있다면 꽃으로 태어나 살다가고 싶었다. 김원필 집 앞에 핀 꽃으로, 한 생을. 물컵에 꽂아둔 안개꽃이 서슴없이 바람과 동화되어 날아가는 것이 오월의 벚꽃 같다가도 십 이월의 첫 눈 같기도 했다.
14.
"필아"
"원필아"
침대에 누워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 김원필을 불렀다. 괴물이 뜯어먹다가 또 내팽겨쳤을때 미친듯이 그곳에서 도망나왔다. 빗방울이 거칠고 바람이 불친절해 곱지 못한 시야를 뚫고 달려 나와 보니 모르는 골목이었다. 거기서 다섯번쯤 뱅뱅 돌아보니 학교였고, 축축하게 걸어 다시 보니 집이었다. 열쇠를 찾다 현관에 찢긴 종이를 주워 들었다. 제대로 찢지도 않았다, 매우 성의 없이 찢긴 입학 통지서였다. 최악의 날이다.
"왜 안 가"
"그냥"
"원필아"
갑자기 전학을 안간댄다. 턱을 미끄럼 타 추락하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두어 방울 맞고 눈만 떴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안가냐구. 귀찮아서. 안그래도 폐부가 터지도록 아빠한테 뒤지게 처 맞느라 뱃 속까지 도망친 심장이 아주 바닥을 친다. 그게 말이 돼? 응 돼. 맞기는 아빠한테 맞았는데 그 설움이 괜히 김원필에게 향한다. 아, 이와중에 제대로 닫지 않은 문 틈새로 습도 짙은 물기가 방 안을 침공한다. 고스란히 김원필에게 향한 설움으로 문을 꽝 닫아버린다. 지극히 되는 일이 없다. 네가 안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15.
너도 니 애미랑 똑같애, 그냥 죽어. 그 손 분질러 놓으면 알아서 뒤져버릴꺼지? 엉?
그렇게 아빠는 나를 죽였다. 손목이 붙으면 손가락이 부러졌다, 부러진 손가락은 소용이 없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은 건반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의 세계는 정확하게 흑백이 됐다. 손가락이 부러졌으나 귀가 멀었고, 눈도 멀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재능이였지 내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외면했고 아무도 재능을 잃은 나를 원하지 않았다.
ㅇㅇㅇ의 목표는 그럭저럭 사는 거다. 그냥 있는 세상을 보통만큼만 보고 인파에 섞여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사는 것.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하는 사람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됐다. 부러진 손가락이 쳤던 마지막 연주였다, 애석하게 나를 버리고 가는 여름을 붙잡고,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매달려 엉망진창으로 망친 연주였다.
괜히 건들인 거면 미안해
그냥 잘 치길래
그 엉망으로 끝난 연주의 유일한 청자였다 김원필은
나는 없어져야 한다. 지국 상에서도, 저 우주에서도, 다정한 김원필의 세계에서도.
16.
"원필아"
"나 자퇴해"
끝끝내 간절히 바라진 않았지만 봄은 오지 않는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내가 봄이 되면 되는 거였다. 김원필이 건반을 누르다 처음으로 올려다 보았다. 굳이 입을 떼진 않았지만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 그냥. 이제 너랑 레슨 같이 못간다구 말하려고 온 거야. 김원필이 피아노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팔을 괴어 조금 오래 볼 거 없는 ㅇㅇㅇ를 좀 오래 바라보았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으나 더 할 말이 없었다. 내일까지 와, 학교는. 더더욱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그러나 김원필은 더 묻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왜?라고 물으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을테다.
매미가 다 떨어졌다. 엊그제만 해도 빽빽 울어대던 매미들은 사랑을 이루었을까? 더이상 시끄럽지 않은 여름이었다. 그리고 태양의 귀가가 조금 빨라졌다, 여덟시가 되어도 집에 갈 생각이 없어보였던 그 큰 행성의 귀가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있었다.
17.
언급하지도 않았던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김원필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왔다, 김원필은 피아노를 쳤고 나는 문제집을 풀었다. 다섯곡을 지루하지 않게 번갈아 쳤다, 아마 김원필은 좋은 대학에 진학할 거였다. 꼭 보지 않아도 대충 어딘가 괜찮은 대학에서 김원필은 어제 보았고, 오늘 보고, 일주일 전에 한 달 전에 이 여름에 보았던 것처럼 피아노를 칠 거다. 그게 내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김원필의 모습이었다.
"필아"
"다시 만나면 필아 너는 나한테 인사 하지마"
"내가 할게"
운동장을 가로 지르다 김원필에게 말했다. 약속해, 김원필이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ㅇ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약속하라구. 알겠어. 진짜? 김원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김원필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 이거. 김원필이 품에 사탕뭉치를 쥐어주었다. 아 김원필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스란히 돌아온 사탕을 알알이 확인했다. 사탕 포장지가 마찰하며 포옹의 음, 같이 보낸 계절의 음, 오롯한 마음의 음이 불협화음을 낸다, 아 돌아갈 곳이 없다.
"필아"
"안아줘"
너랑 헤어지는 거 서운해서 그래. 그래. 김원필이 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서 김원필을 한없이 끌어 안았다, 매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ㅇㅇㅇ를 안아준 것처럼. 그렇게 한없이 끌어 안았다. 끅끅 울어 김원필의 교복 셔츠에 물기가 번진다. 더 말은 안했다. 계절은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양이 점점 빠르게 달아난다. 밤은 급하게 온다, 김원필의 잔음이 내 그림자를 밟는다. 김원필은 오지 않고 잔음만 졸졸 따라온다. 학교에 짐을 뺐다, 떨어지는 회벽에 기대 앉아 몇 날이고 김원필의 연주를 도둑질 했다. 그리고 완연히 여름이 떠날 때, 비로소 함께 갔다. 몰래 도둑질한, 바야흐로 여름의 음계, 김원필의 음계를 배낭에 챙기고, 나도 모르는 어디로
18.
아빠를 죽였다, 오랜 폭력이 끝을 보였다. 고결한 클래식과 상반된 장면이 눈을 덮었다, 모든 곳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비린내가 집 안을 뛰쳐나가 대문을 넘었다. 고결한 살인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그 후의 삶은 대충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새 삶일까? 집은 무너졌다. 그리고 완전히 그곳에 나는 없었다, 나는 봄이 되었다가 새 삶인지 재탕의 삶인지 또 다른 삶을 짊어졌다. 그럭저럭만 살고 싶었다.
억지로 삼킨 것은 결국 토해낸다.
그래서 억지로 삼킨 김원필을 토했다.
19.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끼쳐오는 강력한 더위에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젠가 죽을거다, 기숙사에 널어두고 온 빨래가 몇 시간 되지 않아 말라 비틀어졌다. 아마 그렇게 말이다. 뭐, 아닐 수도 있고. 도저히 밖을 나갈 수 없는 열대야에 약속을 물렀다. 결국 발걸음이 묶여 이도저도 할 것 없이 다시 강의실에 앉아 악보를 고쳤다. 고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복잡했지만 더러 완성도 높은 악장이 되었다. 그리고 꼭 건반으로 확인을 했다, 제대로 된 연주라 칭하기도 민망할 수준으로 한 음씩 눌렀다. 완전한 연주는 끝내 버거웠고 결국 불가능해 포기했다. 태양이 파할 쯤 악보를 챙겨 다시 강의실을 나섰다. 아, 인영이 낯익다. 한 계절의 삶을 다정히 주었던, ㅇㅇㅇ의 세계의 연주자.
주먹만한 얼굴 속 헤엄치는 깊은 눈이 맞물렸다. 퇴근한 줄 알았던 태양이 훅 끼쳐온다, 이내 질식되어가나 아른한 향이 코 끝에 맺히고 떨어진다. 그 찰나와 동시에 지나쳐 걸었다.
필아. 다시 만나면 너는 나한테 인사 하지마. 내가 할게
약속.
약속하라구.
알겠어
20.
여름이다. 바야흐로 슬라브무곡 2번 Op.72가 흐르는 연주실을 지나쳐 브람스 교향곡 3번을 등에 지고 나서는 건물 밖 세상은 여름이었다. 곧 이마에 송글 땀이 맺히고 빠르게 식는다, 가로등에 잔벌레가 때로 몰려든다. 자취방이 즐비한 골목으로 늦게까지 취한 고성방가가 머무른다. 손부채질은 더위를 불 지피고 척척하게 젖은 옷은 까끌거리며 마른다. 옆호실에 틀어둔 티비에선 내일의 장마를 예고하고, 옷장 어디엔가 처박힌 우산을 문에 건다. 아, 그제야 찾아온다. 후덥한 바람의 음, 날아간 나비의 펄럭이는 날개짓의 음이, 장마를 잔뜩 몰고 오는 어둑한 구름의 음도, 난다. 그리고 잔상이 완연하게 합쳐진다. 김원필과 손을 아주아주 꼭 잡은 어떤 사람.
김원필은 죽을때까지 행복했다. 그리고 ㅇㅇㅇ는 결국 김원필의 다정한 약속 안에서 죽었다. 이건 분명 해피엔딩이었다.
너는 끝까지 나를 다정하게 지켜줬어, 고마워.
-18. 8. 19 ㅇㅇ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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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ㅇㅇㅇ의 어렴풋이 슬픈 문학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