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密會
07
「태형아.」
「…폐하?」
「오랜만이구나.」
태형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분명히 제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황제가 맞았다. 그가 늘상 걸치고 있는 황금빛 곤룡포 대신 사람들의 눈에 띄이지 않도록 수수한 옷을 걸치고, 입가에 자신만만한 특유의 미소를 드리운.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태형이 제 옆에 서 있는 호석의 팔을 잡아당겨 제 뒤에 두었다. 팔과 몸이 뻣뻣이 굳은 것이 여실히 느껴져 태형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호석에게는 황제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날의 기억을 태형은 떠올렸다.
황제가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의 뒤에 서서 황제보다도 화려한 붉은 비단을 입고는 여전히 부채를 살랑거리며 작게 고개를 까닥 숙이는 윤기에게 태형은 시선을 얼핏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의 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제 형을 보고서 태형은 조금 놀랐다. 황제에게 석진을 보러 예까지 직접 행차할 용무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어이하여 대답을 않느냐.」
「아, 아닙니다. 잠시 당황하여…」
「그래, 잘 지냈고?」
「…예. 폐하께서도 옥체-」
「너는, 잘 지냈느냐?」
황제가 태형의 안부인사를 뚝 자르고는 툭, 태형의 어깨 너머로 말을 던지었다. 그 한 마디를 정통으로 맞은 호석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슬핏 흔들린다. 아랫입술을 꽉 다문 호석이 태형의 뒤에서 슬그머니 나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더는 그 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자신에게도, 태형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예, 폐하.」
「호오, 이제는 저번처럼 쓰러지지 않는구나.」
「…….」
「내 그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모처럼의 궁중에서 열린 잔치였는데.」
호석을 놀리는 것이 분명한 능글거리는 어조에 호석이 조개마냥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 호석의 파르르 떨리는 뒤통수를 보고 있던 태형이 폐하, 그만 하십시오. 하고는 그 앞으로 나섰다. 태형의 얼굴에 가득 서린 분노를 꾹 눌러담은 듯한 강경한 목소리에 정국이 푸흐흐, 하고 작게 웃었다. 도대체 저년이 무엇이길래 그 어떤 것에도 쉬이 동요하지 않던 네가 이렇게까지 저년을 싸고돈단 말이냐. 태형아, 나는 지금 몹시도 저 아이가 탐이 난다.
「둘만 이야기하고 싶구나.」
「예?」
「태형이 너와 나. 둘이서 얘기할 것이 있다.」
폐하, 하고 태형이 무엇을 더 말하려는 듯한 운을 떼었으나 그 이상 태형은 말을 뱉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황제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빠른 눈치로 알아차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석진의 방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태형의 방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정국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태형이 옆에 서 있는 호석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예 서 있거라.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터이니. 그 소리를 들은 황제가 아아, 하고는 무언가 깜박 잊었다는 듯이 고개를 든다.
「거기 너, -너도 들어오너라.」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황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태형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헉. 호석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그 곁에 서 있던 남준 역시도 놀라움으로 구겨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휘적휘적, 호석의 가련한 손이 불안한 듯 갈 곳을 잃고 움직인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 움직임을 귀신같이 잡아낸 남준이 제 투박한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는다. 그제야 떨림이 멎는다.
「…이 아이를요? 폐하, 어이하여-」
「폐하의 말씀이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윤기가 항의하려는 태형의 말을 가로막았다. 입 바로 앞에서 살랑거리는 부채 덕에 윤기의 깔끔한 목소리가 부채에 부딪혀 울린소리를 낸다. 윤기를 있는 힘을 다해 홱 째려본 태형이 상소리를 마음속으로 내뱉고는 호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자연스레 단단히 잡히어 있는 호석의 왼손으로 향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호석의 동그란 눈동자가 저를 쳐다보는데 태형은 정말이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낚아채듯 그 왼손을 뺏어 잡은 태형이 호석을 이끌어 황제가 들어간 제 방으로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제 손에 남아 있는 온기에 남준이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후우. 남준이 한숨을 자그맣게 내쉰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윤기가 살풋 미소를 짓는다.
「꽤나 아끼는 벗인가 봅니다. 걱정하는군요.」
「아, 예. 뭐…」
남준은 윤기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것 또한 민윤기는 잡아내었다. 분명히 정호석의 주변인물에 대해서는 다 조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내는 뭐지. 한낱 종놈에 불과했으나 윤기는 남준에게 자그맣게 흥미가 일었다.
「벗으로 지낸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 그….」
슬쩍, 남준이 고민했다. 이 사람에게 사실을 말해도 될까. 저와 호석이 벗으로 지내온 날짜 정도야 실상 그리 중요한 정보라고 남준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제 눈 앞의 이 새하얀 사내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언제죠?」
「그… 한 달쯤 되었나.」
그래요. 흐응- 윤기가 자그맣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새하얀 손목을 팔랑, 덩달아 부채도 팔랑거리며 윤기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날리게 한다. 남준이 흘긋, 윤기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민윤기… 남준이 속으로 읊조렸다. 이 사람이 민윤기구나. 예전 김 대감의 집에 얽매여 저자거리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해서 세상 물정에는 무지했던 호석과는 달리 자유로운 몸이었던 남준은 이곳 저곳을 늘상 쏘다니며 소문들을 담 너머로 많이 주워들었는데, 황제와 영의정 집 아들들에 대한 소문만큼이나 자주 들리었던 것이 바로 이 민윤기에 대한 소문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여인네들은 한 번이라도 부채 뒤에 숨겨진 얼굴을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리도 꺅꺅대었는지. 사실 그를 둘러싼 소문 중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없었다. 워낙에 공개된 것이 없는 인물이라 그런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라느니 하는 둥의 뜬구름 잡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남준이 저를 계속해서 힐긋힐긋 쳐다보는 꼴이 윤기는 정말로 우스웠다. 부러 그 쪽을 쳐다보지 않아도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남준의 시선이 온 몸에 그대로 느껴져 윤기는 부채로 가린 얼굴 뒤로 쿡쿡, 웃음을 삼키었다.
*
들어가니 이미 정국은 늘어지게 편안한 자세로 술상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였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곤 황제의 맞은편에 태형이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호석이 쭈삣하니 선다. 정국이 푸스스 웃었다.
「내가 불편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폐하…」
「긴장을 풀어라. 내가 너를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아, 저…」
「괜한 아이를 놀리는 것은 이쯤 하십시오.」
날이 선 목소리에 정국이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잡았다.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허리를 핀다. 조금 전 호석에게 농을 던질 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해진 모습에 호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것이 황제의 진짜 모습인 걸까.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던 황제가 태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형은 피하지 않았다.
「너는 이 아이를 각별히 아끼는 듯 보이는구나.」
「그저 시중을 드는 아이일 뿐입니다.」
태형이 똑바로 정국의 말을 맞받아쳤다. 마치 방패로 창을 쳐내듯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말대답을 하는 태형의 강직된 얼굴에 정국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띈다. 그저 시중을 드는 아이일 뿐이라, 태형아. 네 행동과는 너무도 다른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느냐?
「그저 시중을 드는 아이일 뿐이라…」
황제가 붉은 혀를 내어 제 윗입술을 천천히 핥는다. 흥미로운 것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나오는 황제 특유의 버릇이었다. 황제와 십여 년이 넘도록 함께해온 태형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태형 또한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음은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황제가 말꼬리를 잡을까 호석과 저의 관계는 일절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차가운 말을 했으나, 그것에 연연해할 호석이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호석을 올려다본 황제가 공격하듯 호석을 향해 언질을 던진다. 그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당황한 것은 비단 호석뿐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황제를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자꾸만 말을 걸어 허점을 드러내려 하는 황제에게 태형은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소, 소인은…」
「네가 이 아이에게 그저 한낱 종놈일 뿐이란 말이냐?」
「…….」
「그만하십시오!」
끝끝내 태형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야 만 황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낸다.
「그저 시중을 드는 아이일 뿐이라 했느냐.」
「예. 그러니 그만…」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내게 넘겨라.」
「……예?」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제 귀를 찌르는 그 목소리에 태형은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그리 놀라느냐.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든다. 네게 아무 의미가 없는 아이라면 내게 넘기면 되지 않겠느냐. 황제의 빠르게 뱉어지는 말이 태형의 왼쪽 귀를 지나 오른쪽 귓구멍으로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린 태형이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폐하, 이건-」
「궁중의 시종을 한 명 보내어 주겠다.」
「아니오, 폐하. 이건, 이건-. …저는 아니 됩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이깟 시종아이 하나가 무엇이 그리 아깝다고. 황제의 말에 태형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태형은 머리가 좋았다. 정국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황제가 나랏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일을 처리한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덟의 치기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정국이 저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물론 호석이 그만큼 아름다운 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나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호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독점욕이 또다시 인 것이다. 태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긴 소매에 슬쩍 덮인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고 난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제가 호석을 아끼면 아낄수록 황제는 아이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십시오.」
「도련님!」
태형의 입에서 담담히 허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음을 졸이며 태형의 입에서 떨어질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던 호석이 흠칫 놀라 태형을 불렀다. 호석의 믿을 수 없단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로 태형은 표정을 지웠다. 눈 앞에 황제의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어떠한 내색도 태형은 할 수 없었다. 황제가 흡족한 듯이 웃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으니, 그럼 지금 당장 데려가도록 하지. 종아이는 내일 보내 주도록 하마.」
「뜻대로… 하십시오.」
정국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거라. 호석에게 속삭인 정국이 태형의 방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황제를 따라가려다 멈칫, 자리에 앉아 있는 태형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인 호석이 물기로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건네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호석마저 방을 나가고,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마 호석이 집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 까닭이겠지. 후우- 태형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러 기다란 한숨을 뱉는다. 머릿속을 정리해야만 했다. 절대로 저대로 호석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당탕, 곧이어 석진이 제 방을 요란스레 쳐들어왔다.
「문짝 부서지겠소, 형님.」
「지금 그것이 문제냐! 저 아이를 덜컥 황제에게 건네주다니, 무슨 생각이냐?!」
「…왜, 아니 되나. 애초에 형도 저 아이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잖아.」
「너…! 네가 그리도 아끼던 아이가 아니냐, 지금 넌…」
「형.」
태형의 칼 같은 음성이 석진의 잔뜩 흥분해 한껏 올라간 목소리를 끊어내었다. 헉, 헉. 목 끝까지 찬 숨을 석진이 다 고를 때까지 기다린 태형이 서늘한 빛을 담고선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저 아이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
「꼭 되찾아올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내 님들 안녕 안녕! 반가워요!!!!!!! (격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와아아아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ㅠㅠㅠ 개늑시 2편으로도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밀회가 독자님들과 처음 만나게 된 글이다 보니 감회가 새롭다!
너무 오랜만에 밀회를 가지고 왔지요? 미안해요ㅠㅠ 화 풀어요, 응?
저번에 독자님들과 한 번 만나려고 했는데 시간 되는 독자님들이 아무도 없어서 슬펐어.. 잉ㅠ^ㅠ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밥이라도 먹어요 :)
오랜만에 글을 쓰다 보니 손이 굳어서ㅋㅋ 제대로 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ㅠㅠㅠㅠㅠ 힝ㅠㅠ
못난 작가 늘 기다려주고 예뻐해주는 내 독자님들 내가 많이 사랑하고 아껴요♡ 늘 고맙습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