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
上
"얘, 네 생각엔, 누가 될 것 같니?"
"무엇이요?"
"다음 삭망월 말이야."
같은 객식구 청이 언니가 그리 물었다. 톡 솟아오른 광대뼈처럼 높은 목소리는 반 쯤 잠겨 있었고, 무척이나 중요한 비밀 말인 듯, 소곤소곤했다. 딱히 관심이 가는 말은 아니라서 나는 마저 누비치마에 손을 댔다. 주인마님이 특히나 아끼시는 빠알간 치맛단이다. 괜한 실수로 잘못 단을 박았다간, 이 엄동설한에 그간 차곡차곡 정리한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밖으로 내쫓길 것이었다. 작은 방 안, 바느질을 위해 밝혀둔 초가 가물가물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넌 애가 너무 재미가 없어. 어떻게 된 걔집애가, 바깥 일엔 관심이라곤 일체 없구, 도무지 일 생각뿐이란 말이지. 으이구, 이것아. 그리 단정하게 살면 혼담 같은 거 안 들어온다."
"언니두. 제 주제에 혼담은 무슨……."
"그럼 너, 여기에 아주 빌붙고 살 작정이니?"
"……."
"아니잖아.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정네 만나서 시집 가야지. 이런 침선 짓도 다 관두고."
그 말엔 빙긋 웃어주는 게 다였다. 빠르게 바늘을 꿰어서 풀어진 자수에 새로운 실을 덧대고, 모양이 엉망이 되지는 않는지 확인해가며 손을 움직였다. 침선은 내가 떠맡는 잡일 중 가장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다. 우선, 단 한 곳도 헛으로 꿰매면 안 된다는 상당한 부담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손이 짧았다. 이런 일은 오히려 청이 언니 같이 가늘고 긴 손가락이 맡아야 했지만 주인마님은 항상 내게 치맛단을 맡기셨다. 사소한 실수라도 보이면 곧장 밖으로 나를 떠밀려는 심산 같았다. 이 곳에서 일한 지 벌써 반세가 다 되어가지만, 나에게 마음을 내어준 건 갈 곳 없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청이 언니뿐이었다.
"차라리 삭망월이 되었음 좋겠다. 그럼 이런 구질구질한 생활도 안녕인데."
"……."
"얘. 넌, 그리 생각 안 해?"
"삭망월이 되면 그 때부터 스물 아흐레도 못 살고 죽는다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못 누리고 보낼 인생, 그 잠시라도 향유해야지."
"무섭잖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데. 죽을 날을 알게 되면 다 소용 없을 것 같아요."
"이 꽉 막힌 것….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언니, 저 이제 다 컸어요."
"그래. 이팔청춘 지났음 어른이지."
청이 언니가 흐르는 말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바늘을 꿰었을 때, 초가 다 녹아서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하면 된다. 조금만. 참고 끝내면 잠을 잘 수 있다. 그래봤자 고작 다섯 시간 남짓일 테지만. 어쨌든 하루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불 위에 뉘인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 때만은 다 잊고 눈을 감을 수 있으니까. 그 생각에 마음이 들뜬 탓인지 치맛단에 쿡 찔러 넣어야 할 바늘을 엄지에 조준하고 말았다. 저절로 아야, 하는 소리가 나왔고 놀란 청이 언니가 괜찮냐며 손을 가지고 갔다.
"어머, 어떡해. 얘. 피가 함지박이야."
"유난은요. 그냥 조금 찔린 건데, 가만히 있음 괜찮아져요."
"조금만 기다려. 도련님이 벗한테서 약초를 받아 오셨거든."
"…맘대로 쓰면 혼나지 않을까요?"
"에이, 어디 도련님이 그럴 분이니. 주인마님이면 모를까."
정말로 괜찮은데 청이 언니는 눈을 찡긋하며 몸을 일으켰다. 곧 방 안은, 청이 언니가 사라지니 삭막함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이제 정말 초가 다 녹아가고 있었다. 점차 어두워지는 방 안에서 무릎을 괴며, 나는 오랜만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득한 기분이 찾아왔다. 누구한테 말한 적 없지만 외로웠다. 청이 언니 말처럼, 나는 늘 주변성 없이 살았다. 원칙을 지켰고 간사하게 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조금 악착 같다 여겼고 때론 손가락질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되었다. 남들 다 가진 부모, 형제, 집, 모두 없는 나는 죽을 듯 돈을 벌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애였다.
쇠 냄새가 났다. 피에서 오는 냄새였다. 바늘이 관통한 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쓸쓸했다. 그 작은 구멍에 바깥 바람이 휘웅 불어오는 것처럼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피는 멎지 않았고 내 생각도 잘 멎지 않았다. 이 곳도 언젠간 떠나게 될 것이다. 청이 언니와도 언젠간, 꼭 끊어질 인연이 되고 말 터였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방랑자로 지내며 새로 일할 곳을 찾아다닐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측은했다. 본 적 없는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종일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바느질을 하는 그런 고된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됐을까.
"…언니, 누구어요? 그 분은?"
"난들 알겠니, 집 앞에 쓰러져 있다는 걸 주인님이 방금 부축해서 데리고 오셨어."
그리고 청이 언니는 다 죽어가는 남자 한 명을 질질 끄는 것처럼 해서 방 안에 들어왔다. 이름 모를 약초 대신 남자의 하얀 소복을 한아름 쥐고 있는 청이 언니가 무겁다면서 잠시 투덜댔다. 남자의 소복에 피 얼룩이 보였다. 검붉었다. 또 그것과는 다르게 남자의 얼굴 색깔이 눈보다도 희었다. 저 얼굴을 잘 알았다. 곧 죽을 운명의 얼굴이다. 남자는 얼마 못 가 숨이 끊어질 듯했다. 정해진 곳 없이 밖을 떠돌며 노숙할 때, 무수히 많이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아주 조금이라도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는 얼굴. 내가 보았던 그런 면상들은 단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남자도 그처럼 금방 죽을 몰골이었다.
"……곧, 죽을 듯한데…."
"그렇지?"
"어쩌지요?"
"도련님 방에 가려는데 그만 주인님한테 딱 걸렸지 뭐야. 뭘 하느냐고 물으시길래 아궁이 좀 보러 나왔다고 시치미했어. 약초는 내일 바르기로 하자."
"…그럼 이 분이랑, 오늘 밤 같이 자는 건가요?"
"주인님 아량이 좀 넓어? 원래 이런 일에 그냥 못 지나치시잖니. 우리더러 간호 좀 하라는데? 내일 눈 뜨면 자초지종 물으시겠다고 하셨어."
이제 잘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일이 늘어났다. 이 남자는 어디서 누구와 칼부림을 했기에 이런 몰골로 밖에 버려진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 주인님 집 앞에. 저절로 한숨이 났다. 아무래도 오늘 자긴 그른 것 같았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은 이제 살짝 얼얼하기만 할 뿐이었다.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피 냄새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남자한테서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청이 언니가 생경한 냄새에 코를 잡으며 인상을 썼다.
"어휴! 비린내. 얘, 난 오늘 여기서 못 자겠다."
"…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난 오늘 마굿간에서 잘게."
"춥지 않을까요?"
"괜찮아, 거긴 짚이 많으니까. 너도 그냥 간호하지 말고 자. 네 말대로 금방 죽을 것 같은데 괜히 손 대면 기분 찜찜하잖아."
"……."
"아님 대충 물수건이라도 놓아드려. 난 갈게, 이젠 한계다. 웩."
청이 언니가 혓바닥을 늘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청이 언니는 물씬 처녀 같은 사람이었다. 나와 하는 일은 비슷했지만 생긴 것도 훨씬 성숙했고 몸도 호리호리했다. 그에 비해 난 이런 험한 모습에도 잘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덤덤했다. 이윽고 청이 언니가 방을 나갔다. 청이 언니가 방을 여는 사이, 차가운 바람이 훅 뺨을 쓸고 지나갔다. 그 생각에 무심코, 손이 남자의 목울대 어딘가로 움직였다. 맥박은 정상이었다. 찬 곳에 한참 나동그려졌을 몸도 그리 식어있지 않았다. 도리어 뜨뜻하기까지 했다. 숨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긴 잠에 빠져 있는 남자를 두꺼운 이불 위로 옮겼다.
헌 행주에 물을 잔뜩 머금게 해서 돌아왔다. 피와 땀에 젖은 머리칼 위에 조심스럽게 그걸 올렸다. 다시 남자의 목울대를 확인했다. 뜨거웠다. 홧홧한 불쏘시개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고열이란 걸 알았다. 아무래도 이 때문에 동상이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긴 속눈썹이,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가 꺼졌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혹시나 깨어날 듯해서 꾸벅꾸벅 졸며 남자의 앞을 지켰다. 잠을 깨기 위해 뺨을 몇 번 치고 몸을 일으켰다. 아궁이에서 불씨를 얻어와 새로운 초에 붙였다. 불꽃은 금방 쉽게 타올랐고 방은 아까처럼 다시 밝아졌다. 몰려오는 잠에 고개가 기우뚱했다. 일찍부터 노동한 몸은 쉽게 그 졸림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엔 아래로 풀쑥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야 되는데, 생각하고 있었지만 눈은 이미 감겼고 몸은 무거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햇살이 가득 느껴졌다. 몸은 정말로 피곤하지 않았다. 가뿐했다. 다만,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지금 내 몸통을 감싸고 있는 건 분명 남자의 팔목이었다. 바로 옆에서 남자의 숨 소리가 느껴졌다. 남자는 살아있었다. 이렇게 함께 몸을 뒤엉킨 채, 아주 잘 살아있었다. 남자랑, 그것도 초면인 자와 이토록 가까이서 몸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상하게 청이 언니에게 미운 마음이 갔다. 주인마님이 이 꼴을 보면 변명할 틈도 없이 다른 곳으로 견출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남자의 숨결 하나하나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이 감겼다. 숨을 가다듬고 남자를 옆으로 밀었다. 남자는 의외로 쉽게, 가벼운 홀씨처럼 밀려났다. 그 반동에 남자의 이마께를 지키고 있던 물수건이 투욱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까지 뜨거운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그걸 주웠다. 차갑게 적셨던 물수건은 미지근함을 넘어 뜨겁게 변해 있었다. 곁눈질로 남자의 꼴을 살폈다. 이상하게 처음 봤던 모습보다 훨씬 깨끗하고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잠을 오래 잤다고 저렇게 빨리 상태가 나아지진 않는다. 내가 잔 사이 청이 언니가 병간을 했나?
혹시, 그렇담, 내가 이 자와 그렇게 섞어 자고 있었던 걸, 청이 언니가 봤을까?
그 생각에 몸에 힘이 주륵 풀렸다. 청이 언닌 입이 무겁지만 본래 장난이 많은 사람이다. 주인마님에게 그걸 이를 이유는 없지만 좋은 놀림거리라는 건 분명했다. 난 몰라. 한동안 청이 언니 입에서 온갖 장난 말이 나올 걸 생각하니 저절로 눈 앞이 캄캄해졌다.
이리 늦은 시간, 물론 아직 본격적인 아침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그래도 이 즈음에 눈을 뜬 건 거의 처음이었다. 항상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아궁이를 확인하고, 마당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다. 문 틈으로 밖을 내다 보니 머슴들이 나무를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보통 기상하던 때보다 한 시간 쯤 늦게 눈을 뜬 모양이었다. 일이 밀렸을 것이다. 나 때문에 청이 언니가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뒤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딥니까?"
남자였다. 목소리는 끙끙 앓고 있었지만 정중했다. 남자는, 현기증이 올라오는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는지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저 꾸역꾸역 희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더 물을 뿐이었다.
"어디입니까, 말씀해주세요."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는데, 순간적으로 마음이 뜨악했다. 남자의 눈망울이 꼭 여인의 것처럼 청초했다. 방금 울음을 마친 듯 눈 밑이 붉었고 아른아른했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갔다. 목젖이나 체형은 분명 남자의 것이 맞는데, 가지고 있는 얼굴은 어찌 저렇게 어여쁠 수가 있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분명 조선 남정네들은 여기 머슴들처럼 덩치 크고 사납게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저 사람이랑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단지 각자 잠에 빠진 것뿐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한 있는 귀신의 집입니까?"
"…예? 아, 아니요……."
더듬대며 말을 잇자 남자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볍게 웃었다.
"난 또. 귀신에게 홀린 줄 알았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살아서 나갈지, 막 걱정하려던 참인데."
남자는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태연해 보였다. 이윽고 남자가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가 빤히 날 쳐다봤다. 심히 집중스러운 눈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너무 천하여서, 이름 같은 거,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아픈 곳을 건드려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처음 봤을 적과는 다르게 한층 갠 얼굴이었다. 곧 죽을 것처럼 골골해 보이지도, 피에 젖어 휙 쓰러질 듯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와 내가 멀찍이 떨어져 앉은 그 사이사이에 기나긴 침묵이 내려 앉았다. 이름 없는 내가 얼마나 한심스러울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의미 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주인님께 남자가 깨어난 것을 알리기 위해 이만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아쉽습니다. 이름을 꼭 알고 싶었는데."
"……."
"이름마저 사랑스러우면 잘 잊히지가 않을 듯하여서요."
남자가 아픈 얼굴로 빙긋 웃었다. 그 말에 심장이 쿵 추락해버리는 건, 그 현상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아무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곳곳에 피 흔적이 낭자한 소복 차림으로 몸을 일으켰다.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을 모습이었는데, 고작 몇 시간을 따뜻한 방 안에서 보냈다고 해서, 저렇게 가뿐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그런 잡다한 생각 중일 때 남자가 영영 여길 떠나는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찬 기운이 훅 끼쳐 들어왔다.
입술을 짓이겼다. 이대로 보내선 안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기!"
"……."
비명 같은 내 부름에 남자가 휘청이는 몸을 돌렸다. 놀라 다가가니 따가운 열 기운이 느껴졌다.
"그 몸으로 대체 어딜 가시려구……. 저희 주인님, 착한 분이십니다. 혜민서에 기별을 놓아주실 겁니다. 바쁜 일이 없으시면 좀 더 몸을 쉬어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미 나를 극진히 간호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적 없었다. 그저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몸에 차가운 물수건만 덩그러니 올려준 게 다였다. 남자의 과분한 평에 목이 바싹 말랐다. 이상하게 수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주변이 뜨겁게 증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서서히 몸을 틀었다.
"…그래도……."
"……."
"이름, 이름을 알려주시면, 제가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대범한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난생 처음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금방이라도 헛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윤형."
"……."
"윤형입니다. 윤형."
남자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름을 되새겨주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눈 부신 시선이 활짝 접히고 있었다. 따뜻한 웃음이었다. 몸이 뜨거웠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윤형이 나갔다. 내 앞에서 사라졌다. 걱정이 되었다. 짧은 만남에, 왜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상당한 고열이었다. 분명 몸이 펄펄 끓었고 최소 며칠은 제대로 된 간호를 받아야만 하는 열병이었다. 걱정스러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윤형이 나가고 한참, 그 앞을 뜰 수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을 시작하기 위해 짚신에 버선발을 집어넣었다. 추위에 몸이 으슬으슬했다. 답지 않게 늑장을 부렸으므로 평소보다 빠릿빠릿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엌과 이어진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저 앞에 도련님이 보였다. 예를 갖추기 위해 꾸벅 고갤 숙였다. 이 시간에 태평하게 도련님과 대면하는 건 낯선 일이었다.
"어딜 가느냐?"
"예, 부엌에 불도 좀 보구, 마루에 걸레질도 하려구요."
"일찍부터 바쁘구나."
"늘 하는 일인데요."
괜찮다는 뜻으로 웃자 도련님이 기특하다며 내 댕기를 살짝 쓰다듬어주셨다.
"동혁아! 잠시 이리 들어오너라!"
안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주인마님의 호된 음성이었다. 도련님이 곧장 알겠다는 대답을 올리시고, 이만 내 머리칼에서 손을 떼어내셨다. 그리고 그 체온이 빼먹지 않고 내 손을 꽉 잡았다. 흠칫 몸을 떨자 도련님이 가볍게 웃었다.
"손이 차구나. 가진 마음이 따뜻해서인가."
"……."
"감기 들지 않게 부디 조심하거라."
도련님이 말갛게 미소지었다.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도련님이 걸음을 돌려 안채로 향하셨다. 그 손이 매만지던 내 머리칼 어딘가를 확인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잔상이 거기에 남아있었다.
부엌엔 예상대로 청이 언니가 있었다. 항상 같은 남색 치마에 연두 저고리였다. 밥이 익는 냄새가 났다.
"청이 언니, 죄송해요. 늦잠을 자버려서……."
"괜찮다, 괜찮어. 남자랑 동침하는 데 그 정도는 시간을 벌어야지."
그 뒤엉킴을 본 게 틀림 없었다. 청이 언니가 아궁이 앞에 앉아 힘겹게 불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미안해져서 얼른 그 옆에 앉아 청이 언니를 거들었다. 불을 태우는 데 목이 따가워졌다. 잠시 기침하고 있자, 청이 언니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얘. 너 남자랑 잔 적 있니."
집적적인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부정의 표시로 세차게 고갤 저었다. 일하면서 빌어 먹고 사는 몸종 주제에 다 큰 남자와 같은 방에서 섞여 자고 있는 걸 들켰으니 그것 말고 추잡한 일은 더 없을 것이었다. 갑자기 진중하게 변한 청이 언니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쫓겨나는 거 아닐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큰일났어. 진이 아씨가 다음 삭망월 후보에 오르셨대."
"……예?"
큰 소리가 튀어나았다. 청이 언니가 어서 목소릴 낮추라는 뜻으로 쉿, 중얼거렸다. 청이 언니가 바깥 눈치를 살피며, 더욱 세게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말을 끊지 않았다. 진이 아씨라면 도련님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예뻤고 그만큼 욕심 많은 분이기도 했다.
"삭망월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순결의 몸이어야 하면서, 스물 이전의 아름다운 여자아이."
"…알고 있지요."
"주인마님께서 단단히 마음을 먹으신 것 같아. 진이 아씨를 왕실에 보내지 않으시려고."
삭망월은 서른 날 동안 각각 변하게 되는 달 모양을 뜻하면서 한 처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다. 달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발광하면서까지 세상에 빛을 내주고 싶지 않아 했다. 달은 자신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존재, 그러니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여자를 원했고, 서른 날이 지나면서 삭망월의 주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서른 날이 지나면서 조선에 있는 처녀 하나가 왕실에서 죽었다. 삭망월로 뽑힌 여자는 서른 날 동안 왕실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고 딱 그 시간이 지나면 달에게 혼이 먹혀서 죽었다. 누구는 왕실에서의 황홀한 서른 날 때문에 삭망월이 되는 것을 꿈꿨고, 달에게 굴복하는 치욕스러운 짓이라며 욕을 하기도 했다.
그 삭망월에 진이 아씨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날짜를 가늠했다. 이번 서른 날이 끝나기까지 약 닷새의 시간이 남았다. 청이 언니가 어느 순간 부채질을 멈추었다. 마른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왕실에서 채택한 삭망월을 거부하는 건 반역이야. 얘, 넌, 이것도, 알고 있지?"
"그럼요."
"……주인마님이 따님을 위해 반역을 준비 중이셔."
"정말이요?"
또 큰 소리가 나왔다. 청이 언니가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널, 진이 아씨를 대신해서 왕실에 보내시려는 것 같아."
"……."
"아까 새벽에 안채에서 나오는 얘길 엿들었어."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주인마님이 날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예전부터 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도, 나도 죽은 누군가의 자식이고 앞으로 살 날이 많은 존재였다. 딸을 위해서 다른 목숨을 내놓으려 하다니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내가 하찮은 목숨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어여쁘고 귀중한 운명을 대신해 가차 없이 버려질, 목숨이었던 것이다.
"얘."
늘 당당하던 청이 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넌 내일 여길 떠나야 돼. 그래야 살 수 있어."
"……."
"나 말고 네가, 안채 밖에서 그걸 엿들은 걸로 하자. 네가 도망간 것 같다고 변명할게. 무슨 말인지 알지? 오늘 안으로 짐 싸. 여태 일한 품삯은 내가 그간 모은 걸로 줄게. 물론 네가 일한 거에 비해선 턱 없이 모자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론 어쩔 수 없어. 얘, 너 살아야 해. 알겠니? 앞으로 서른 날만 살다가 죽을 순 없잖아. 평생…. 평생, 평생 모진 일만 했는데. 응?"
마지막 말을 하면서 청이 언니는 거의 울먹였다. 고갤 들었다. 일부러 밝게 웃었다.
"괜찮아요, 언니. 저, 가도 돼요."
"……."
"제가 안 가면 진이 아씨가 가는 거잖아요. 주인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도련님도."
"……."
"언니도 그랬잖아요. 삭망월, 되는 거, 부럽다고. 어차피 못 누리고 죽을 바에 누린 다음에 죽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저도 그리 생각해요. 저, 진짜 괜찮아요."
"…이, 이 철 없는 것아. 말 함부로 하지 마!"
"나중에 외롭게 혼자 죽는 것보다, 달빛 속에서 죽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아요.
청이 언니가 기어이 울었다.
+
안녕하세요!
6233입니다.
다들 일주일 동안 잘 지내신 거죠~?
자주 글도 올리고 독자 님들이랑 댓글 놀이도 하고 싶은데 야자에 묻혀 사느라... (먼 산)
오늘은 사춘주의 말고 단편선으로 찾아왔어요.
삭망월은 달의 모양에 따른 공전 주기를 뜻하는 말로 29.5일의 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학교에서 지구과학 시간에 달에 대해서 배우는데 갑자기 소재가 떠올라서 급하게 써봤어요.
그래서 막장 느낌이 좀 없지 않아 있지만 ㅎㅎㅎ... 그래도 독자 님은 착하시니까 꾹 참고 읽어주시겠죠...? ㅎ... ㅎㅎㅎㅎ
아마 상중하? 아니면 상하 정도로 끝날 것 같은 글입니다.
아이콘이 드디어 데뷔라니 믿기지가 않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왜 콘서트를... ㅠㅠㅠㅠㅠㅠ 시험 기간에 하는 겁니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랑 같이 울 분... ㅜㅜㅠㅠㅠㅠㅠ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제 이사를 해서 정신이 없네요!!
짜장면은 맛있었지만 이사는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마치 조별과제 같은 그런 것...☆ ㅋㅋㅋㅋㅋ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쁜 꿈꾸세요~
늘 말씀드리지만 항상 사랑해요. ♡ ㅜㅜ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