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준회가 나가자 객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요함과 함께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애써 걱정되는 마음을 다잡으며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불안한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리며 소파에 몸을 뉘는데, 딱딱한 물체가 허리쯤에 느껴졌다. 팔을 넣어 꺼내보니 검은 무전기였다. 배에 탄 이후로 주로 이메일로 연락을 취해 왔기에, 무전기는 잠시 잊고 있었는데, 소파에 두었나 보았다.
우리 멤버들은 개별 무전기를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8년 전, 나와 구준회, 김동혁이 15살, 한빈 오빠가 19살, 지원 오빠가 20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될 때 받았던 무전기였다. 15살 때 시작한 일은 ‘바벨탑의 설계자’로서의 정식 업무가 아니라, 인턴 격의 임무였다. 나이가 더 많은 다른 정보요원 옆에서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말이 좋아 보조였지, 딱히 하는 일은 없고 그냥 구경하며 작전 현장의 감을 익히는 정도였다. 그렇게 3년의 트레이닝이 끝난 후에야 ‘바벨탑의 설계자’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비로소 시작했다.
무전기 처음 받았을 때는 신기하다며 장난도 자주 치곤 했는데. 코드넘버 0001, 초선의 환생. 내 코드넘버와 코드네임을 대며 지원 오빠를 호출하면, 재밌어? 이런 거 신기해하는 거 보면 그냥 아가인데, 벌써부터 작전에 투입되고, 오빠 마음 아프게. 숙소 도착했어? 왔으면 다트 한 판 하자. 지하로 내려와. 나긋한 목소리로 다트나 한 판 하자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져. 클리어 앤 아웃.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무전 용어가 그때는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나는 무전기에 호출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한 멤버당 한 채널. 채널을 조정하고, 호출 버튼을 누르면 선택된 채널로 호출이 갔다. 나는 괜히 채널을 0331에 맞추었다. 어차피 한빈 오빠가 지시를 내리고 있을 터라 호출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채널을 맞추어 두고 싶었다. 지금쯤 지정된 장소에 도착은 했으려나. 궁금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무전기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누군지, 무슨 일인지 당장 묻고 싶었지만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안테나를 더 길게 뽑았다. 손이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코드넘버 1022, 바벨탑의 주인.
한빈 오빠였다. 나는 숨을 삼켰다.
-초선의 환생, 지금 당장 카지노로 내려가 미다스의 손에게 가라. 두 시간 후 데리러 가겠다.
카지노로, 지원 오빠에게. 갑자기 그를 만나러 가라는 한빈 오빠의 말은 충분히 의문스러웠다.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어쨌거나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라져.”
한 마디 뱉고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아, 구준회가 방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준회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빈 오빠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었다. 너도 알지, 미안하다, 다음에는 네 말 들을게, 나는 옷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씻고는 나가야겠지,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아, 씨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불필요하게 선명했고, 선명한 만큼 추잡스러웠다. 귀찮다는 핑계로 아직도 갈아입지 않은 남색 원피스는 이미 다 구겨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답 없는 내 모습에 해답부터 찾아야겠구나.
지금 당장 내려가라는 것이 한빈 오빠의 지시였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끝마쳤다. 옷을 꺼낼 때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굳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 필요는 없었고, 그렇다고 카지노에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심플한 검은 숏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준비가 다 되자 서둘러 카지노로 향했다.
카지노 특유의 분위기는 사람의 기분을 변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평소와 같았다면 쿵쿵거리는 비트에 들뜨겠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짜증이었다. 들어서자마자 핑거푸드를 권하는 웨이터들이 눈앞에서 알짱거렸고, 답답할 정도로 어두운 조명에 눈을 억지로 찡그렸다. 아니요, 필요 없어요, 길을 가로막는 그들을 계속 밀어내며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하는 임무 중의 절반은 카지노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정도로, 카지노는 내가 가장 자주 방문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타이타닉에 탑승하고 난 뒤, 카지노에 간 적은 많았지만, 게임을 한 적은 없었다. 돈을 처바른 타이타닉인 만큼, 엄청나게 공들인 카지노일 텐데, 한 번쯤은 게임을 해 줘야지.
“A one pair. (에이 원 페어)”
“Two pairs. (투 페어)”
포커테이블에서는 게임이 한창이었다. 지원 오빠는 투 페어, 외치고는 웃으며 테이블의 칩을 끌어당겼다. 상대는 허망한 실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원 오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의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앉았다.
“Set the game. (게임 세팅하세요)”
게임 세팅하세요, 명령조의 말투였다. 오빠는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런 장소가 아니면, 내가 김지원에게 명령할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한 마디 할듯한 기세에 살짝 쫄았지만, 너는 딜러고, 나는 손님이야,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I said, set the game, please. (게임 세팅 하라고요, 부탁해요)”
패기 넘치게 외쳐놓고, 찌질한 please라니, 말을 하면서도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후의 방어책이었다. 눈을 감았다 딱, 뜨며 강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please, 라고 하자, 지원 오빠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Okay, okay, relax, lady. One shot? (네, 네, 아가씨. 한 판?)”
오빠는 여유롭게 카드를 섞으며 내 눈을 응시했다. 보지도 않고 잘도 섞네, 물 만난 고기마냥 김지원에게는 카지노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같이 포커 한 지도 꽤나 지났는데, 일 끝나고도 종종 해야겠다.
“한 판만 하죠.”
지원 오빠는 내 앞에 카드를 내려놓았다.
“아, 이번에는, 속임수 없이, 깔끔하게.”
나는 최대한 느긋한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 허를 찌른 모양이었다. 지원 오빠는 허,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웃고 말했다.
“제가 언제 속임수를 썼다고. 페어플레이는 당연한 건데.”
“제대로 섞은 건 맞죠?”
나는 내 앞에 놓인 세 장의 카드를 살짝 뒤집었다. 스페이드 3, 하트 2, 클로버 6. 씨벌, 좋은 게 하나도 없네. 포커페이스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표정을 담담하게 굳힌 채, 제 카드를 뒤집어보는 지원 오빠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하긴, 읽어낼 수 있으면 독심술사지, 우리가 표정 관리하는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오픈.”
우리는 카드를 한 장씩 뒤집었다. 나는 스페이드 3, 건너편에는 다이아몬드 8. 그는 카드를 하나씩 더 들이밀었다.
판돈도 많이 걸지 않을, 별것도 아닌 게임 한 판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테이블 옆에 둘러앉아 나와 그의 게임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약 같은 것이 걸린 게임도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은 과도하게 많았다. 관심 어린 시선을 끝까지 받아내며 카드를 읽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두 번 더 카드를 뒤집었고, 마지막 오픈만이 남았다.
무의미한 게임이긴 했지만, 나오는 패는 족족 심각했다. 이번 판은 그냥 하는 의미도 없는데, 버려야지. 썅. 칩도 얼마 없는데, 그냥 다 걸고 져야지. 역시 사람은 해탈하고 봐야 해, 마음이 얼마나 편해.
“올인.”
나는 가지고 있는 칩을 모두 내걸었다. 내가 가진 패는 2 원 페어였다. 당연히 질 것이 뻔했지만, 객기나 부려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주위 구경꾼들의 눈이 커졌다. 미친, 시발, 놀라지 마요, 그냥 좆 같은 패 가지고 호기 부리는 거니까.
내 앞에서, 아직 마지막 베팅을 하지 않은 지원 오빠를 응시했다. 이제 끝났어, 어차피. 나는 이미 올인을 질렀고, 얻을 것은 없었다. 아쉬울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다이.”
그는 다이, 외치고는 내 손목을 잡고 일어났다. 아, 잠깐만, 이건 또 뭔데. 오빠는 포커를 즐겨 했다. 내 패가 좋은 패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뭐, 다이? 뭐야, 물을 새도 없이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카지노 안쪽을 향해 정신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카지노 안쪽의 룸으로 나를 끌고 들어왔다. 문이 쾅 닫혔고, 갑작스럽게 움직인 탓에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아, 뭔데! 왜 갑자기 끌고 와요, 게임도 아직 안 끝났구먼. 다이는 왜 하는 건데? 나 완전히 진 판이라는 건 오빠도 알고 있었잖,”
“아가.”
내 말은 나를 꽉 끌어안으며 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가로막혀버렸다. 탄탄한 어깨가 내 볼에 와 닿았고, 나는 자연스레 팔을 올려 그의 등을 토닥였다.
“또 왜요. 한빈 오빠가 와 보라고 했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이구, 예뻐라. 아가, 오빠 걱정해주는 거야? 무슨 일, 있지.”
걱정이 엄습했다. 시발, 이런 곳에 와서도 일 걱정을 해야 한다니, 속이 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뭔데요?”
그는 품에서 나를 떼어내고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윽, 일부러 고개를 찡그리며 뺨을 닦는 시늉을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앉아, 그는 말했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응,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말해봐요. 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금색 만년필을 꺼냈다.
“뭔지 알아?”
“음, 만년필?”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년필이지. 손가락 사이에서 만년필이 빛을 반사하며 홰홰 돌았다. 넋을 놓고 금빛을 반사하는 만년필을 쳐다보는데, 그는 돌연 손가락을 딱 멈추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려는데, 그는 만년필의 몸체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보이지?”
아주 옅게, 무엇인가가 몸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글자인지, 로고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늬였다.
“수장의 만년필이야.”
그 말인즉슨, AFT의 수장을 찾았으니, 나의 임무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것 같았다. 정신은 아릿했고, 띵해진 머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자꾸 걸리는 사람이 있길래, 지갑을 훔쳤어.”
“뭐?”
아, 미친. 답이 없었다. 이제 내 임무가 시작될 차례인가, 고민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지원 오빠의 말에 온 정신이 달아났다. 수장의 지갑을 훔쳤다니. 지갑이 사라진 것을 수장이 눈치챘다면, 우리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놈도 정보요원 싹 깔아두었을 텐데, 무슨 간으로 그따위 짓을 했는지, 기가 찼다. 패기가 지나쳤다.
“수장의 지갑을 훔쳤다고? 미친 거 아니야? 김지원, 그럼 우리 이제 다 걸리는 거잖아. 한빈 오빠한테는 말했어요? 응?”
“쉿, 말했어. 별일 아니야. 만년필만 빼내고 나머지는 김동혁이 지문 없애서, 그대로 분실물 신고했으니 걱정 마. 어차피 그놈도 중요한 걸 지갑에 넣고 다닐 양반은 아니니까. 그래, 어쨌든, 지갑을 빼 왔는데, 별건 없더라고. 명함이랑 수표 몇 장, 만년필, 그게 다였어.”
“명함은 위조 명함 아니에요? 수장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김동혁이 캐낸 정보에 만년필에 관련된 것이 있었어.”
그는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화면을 터치하더니, 내게 화면을 보이게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화면에는 만년필 사진이 찍혀 있었다.
“사 년 전 사진이야. AFT의 테러 현장에 떨어져 있었던 만년필, CIA에서 입수한 고급 정보지.”
CIA의 고급 정보를 김동혁은 빼낸 것이었다. 세계에 10명도 되지 않는다는 소문만 무성한 네메시스급 해커의 위력은 대단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자료를 빼내다니, 새삼 그 대단함에 소름이 끼쳤다.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명함은 복사를 해 두었으니, 이제 수장에게 접근할 수 있어. 임무가 이제 반은 해결됐다, 얼른 끝내고 즐기자. 배를 침몰시킬 수는 없잖아.”
지원 오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수장을 알게 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일을 빨리 진행하지 않는다면 타이타닉이 언제 침몰할지 몰랐다. 배에 탄 지 단 사흘 만에 수장을 식별해낸 것이었다.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수장의 계획이 적힌 문서를 빼내기만 하면, 이미 배의 메인 시스템에 접근한 김동혁이 배를 조작하여 침몰을 막을 것이었다. 수장의 계획이 적힌 문서를 빼내기만 하면.
수장의 계획이 적힌 문서를 빼내기만 하면.
작전명 타이타닉. 타이타닉의 침몰은 막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바벨탑의 설계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단체 작전에서의, 내 임무를 개시할 때였다.
암호닉 |
(계속 신청 받습니다, 가장 최근글에 신청해주세요. 신청했는데 안 올라가 있거니 잘못 올라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비회원 신청도 받아요) 바벨탑 / 신 / 주내 / 마그마 / 토마토 / 준회원 / 준회 / 카누 / 준회(오빠) / 뿌요를 개로피자 / 꾸주네 / 둡우 / 숨소리 / 쓴다 / 동그라미 / 구주네 / 87주내 / 메추리 / 극찬준회 / 아침 / 밀실의 저격수 / 환생 / 시작 / 쭈꿁히 푸 / 코튼캔디 / 랄랄리 / 코드넘버_1221 / 꾸꾸 / 위저드 / 됴아 / 뽀로로 / 이퓨 / 김냥 / 거난영 / 예이 / 엽떡 / 까까 / 정수정 /기맘빈 / 느낫해 / 말랑 / 호빗 / 스벤 / 찌푸 / 유메 / 티록신 / 반지 / 이부 |
더보기 |
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사실 더 빨리 올릴 수 있었는데 브금을 첨부했는데... 안 나와서.... 이번 화 브금 쩌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꼭 있어야 해서 다시 다운받고 글 다시 쓰고 온갖 난리 치다가 드디어 첨부 성공했습ㄴㄴㅣ다 헤헤 늦어서 죄송해요... 다음 화는 더 늦을 것 같아요... 시험 2주남음.... 대신 시험 끝나면 최대한 자주 올게요 독자님들 사랑하는거 아시죠 뿅뿅 진심이예요 저 사랑한다는말 진심 아니면 안해요 사랑해요♡ 참참 포커할때 다이는 베팅을 포기하고 게임을 그만둔다는 뜻이예요! 는 저도 쓰면서 처음 알았어요 호호 |